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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이토 마코토는 메이지에서 쇼와 시기(1919. 8.~1927. 12., 1929. 8.~1931. 6.), 일본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제 3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식민지 통치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 제 5대 조선총독으로 다시 취임했다.


[생애]
1858년 미즈사와에서 센다이 번의 번사인 사이토 고헤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이름은 도미고로였으나1873년 해군병학료의 예과 생도가 되었고, 본과로 진학할 때 마코토로 개명하였다. 1879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884년부터 1888년까지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공사관의 주재무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해군 제도와 수뢰 등 병기에 관해 조사하여 육해군 수뇌들을 접대하며 사회 관계망을 형성해왔으며 특히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를 수행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군사 현황을 시찰하고 정세와 풍습을 경험하였다. 1888년 귀국해 해군참모본부에서 일했다. 1892년에는 해군대신 니레 가게노리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니레는 사이토의 해군병학교 시절 교장이자 해군성 군사부에서 근무할 당시 군사부장이었다. 사이토는 당시 해군을 지배하고 있던 사쓰마 파의 유력자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 사이토는 대본영에서 근무하여 인천 경비함과 인천에 파견된 해군장교에게 중앙정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순양함 아키즈노즈와 이쓰쿠시마 함장 등을 거쳤다. 1898년 그는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의 추천으로 해군차관에 취임하였다. 관례상 해군차관에 소장이나 중장이 취임하는데, 대좌로 진급한 지 얼마 안 된 사이토의 취임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해군대신을 보좌해 제3기 해군 군비 확장을 실현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1906년부터 약 8년 동안 해군대신을 역임하였다. 사이토는 해군차관과 해군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07년 러일전쟁의 전공으로 남작을 수여 받고, 1912년에는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1914년 일본 해군과 독일 지멘스의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해군대신에서 물러났다.
[제 3대 조선 총독 취임]
현역에서 물러나있다가 3.1운동 이후 1919년 제 3대 조선총독에 취임했다.
[조선총독 취임 후]
사이토 총독은 하라의 [조선통치사견]을 근거로 문화통치를 실시하며, 점차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취임 후는 정무 총감과 연계된 정당내각의 영향력으로부터 안정적 조선총독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피지배자인 조선 지배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그리고 총독부관료들의 요구였던 지배정책 전환을 들어주며 자신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문화 정치를 시행하였다. 문화통치는 조선인과 총독부 관료들의 요구의 절충안이었던 것이다. 문화 통치를 통해 조선의 정책에 여러 개혁을 가한 뒤 1927년 병으로 조선총독에서 물러났고 추밀고문관에 임용되었다.
[제 5대 조선 총독 취임]
1929년 기존 조선총독이 해임되며 사이토가 다시 취임하였으나 1936년 쿠데타가 일어나 도쿄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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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이토 마코토는 메이지에서 쇼와 시기(1919. 8.~1927. 12., 1929. 8.~1931. 6.), 일본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제 3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식민지 통치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 제 5대 조선총독으로 다시 취임했다. [생애] 1858년 미즈사와에서 센다이 번의 번사인 사이토 고헤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이름은 도미고로였으나1873년 해군병학료의 예과 생도가 되었고, 본과로 진학할 때 마코토로 개명하였다. 1879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884년부터 1888년까지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공사관의 주재무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해군 제도와 수뢰 등 병기에 관해 조사하여 육해군 수뇌들을 접대하며 사회 관계망을 형성해왔으며 특히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를 수행해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군사 현황을 시찰하고 정세와 풍습을 경험하였다. 1888년 귀국해 해군참모본부에서 일했다. 1892년에는 해군대신 니레 가게노리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니레는 사이토의 해군병학교 시절 교장이자 해군성 군사부에서 근무할 당시 군사부장이었다. 사이토는 당시 해군을 지배하고 있던 사쓰마 파의 유력자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 사이토는 대본영에서 근무하여 인천 경비함과 인천에 파견된 해군장교에게 중앙정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순양함 아키즈노즈와 이쓰쿠시마 함장 등을 거쳤다. 1898년 그는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의 추천으로 해군차관에 취임하였다. 관례상 해군차관에 소장이나 중장이 취임하는데, 대좌로 진급한 지 얼마 안 된 사이토의 취임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해군대신을 보좌해 제3기 해군 군비 확장을 실현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1906년부터 약 8년 동안 해군대신을 역임하였다. 사이토는 해군차관과 해군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군사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07년 러일전쟁의 전공으로 남작을 수여 받고, 1912년에는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1914년 일본 해군과 독일 지멘스의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해군대신에서 물러났다. [제 3대 조선 총독 취임] 현역에서 물러나있다가 3.1운동 이후 1919년 제 3대 조선총독에 취임했다. [조선총독 취임 후] 사이토 총독은 하라의 [조선통치사견]을 근거로 문화통치를 실시하며, 점차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취임 후는 정무 총감과 연계된 정당내각의 영향력으로부터 안정적 조선총독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피지배자인 조선 지배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그리고 총독부관료들의 요구였던 지배정책 전환을 들어주며 자신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문화 정치를 시행하였다. 문화통치는 조선인과 총독부 관료들의 요구의 절충안이었던 것이다. 문화 통치를 통해 조선의 정책에 여러 개혁을 가한 뒤 1927년 병으로 조선총독에서 물러났고 추밀고문관에 임용되었다. [제 5대 조선 총독 취임] 1929년 기존 조선총독이 해임되며 사이토가 다시 취임하였으나 1936년 쿠데타가 일어나 도쿄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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