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 새 문서의 위키텍스트 (new_wikitext) | '{{본관 정보
|본관 = 김해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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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김상좌]], [[김보]], [[김유 (14세기)|김유]], [[김저 (고려)|김저]], [[김수연 (조선)|김수연]], [[김극일 (조선)|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조선)|김대유]], [[김축]], [[김완 (1577년)|김완]], [[김경서]], [[공빈 김씨]], [[김예직]], [[김우항]], [[김홍도]], [[김만덕]], [[김대건]], [[김원봉]], [[김두봉]], [[김약수]], [[김상옥 (1890년)|김상옥]], [[김무정]], [[김준연]], [[김현철 (1901년)|김현철]], [[김철호 (1905년)|김철호]], [[김성곤 (1913년)|김성곤]], [[김종오]], [[김수영]], [[김대중]], [[김종필]], [[김상현 (1935년)|김상현]],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김일]], [[김지하]], [[김주열]], [[남진 (가수)|남진]], [[김홍신]], [[김훈 (소설가)|김훈]], [[김상곤]], [[김명곤]], [[김부겸]], [[김두겸]], [[김영춘 (1962년)|김영춘]], [[김병만]], [[김종국]]
| 년도 = 2015
| 인구 = 4,456,700명
| 순위 = 1
| 비고 = [http://www.garakkim.com/ 김해김씨]
}}
김해 김씨(金海 金氏)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수로왕(金首露)을 시조로 한다.
== 역사 ==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한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명의 촌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자주색 밧줄에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이 [[구지봉]]에 강림하고 여섯개 황금 알 중에 제일 먼저 나온 아이를 수로(首露)라 하고 가락국의 왕이 되니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다. 이후 후손들이 가락국이 세워진 김해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관가야는 5세기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532년(법흥왕 19년)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귀족이 된 가락국의 마지막 왕으로 김유신의 증조부가 되는 [[구형왕|구형왕]](仇衡王)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상등의 작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그의 세 아들 중 차남 [[김무력]](金武力)이 [[신라]]에서 장군이 되어 [[관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최고의 관등인 각간(角干)을 지냈고, 신라의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백제와 여려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고,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 받았으며, 김서현의 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혼인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은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렀고,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해김씨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해 왔다. 이런 신김씨의 위세가 쇠퇴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이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 왕통이 단절되고 [[선덕왕]]의 [[내물왕|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부터 다른 진골 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 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으로 추락했다.<ref>김유신의 적손인 김윤중(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金長淸) 역시, 집사부의 말단직 집사랑(執事郞)을 지냈을 뿐이다. 김융(金融)의 난과 관련 있어 보인다.</ref><ref>김웅원(金雄元)이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고 이어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신무왕]]의 사돈이 된 것으로 보아 몰락하였던 [[김유신]]의 가계가 다시 부흥한 것으로 보인다.</ref>
[[진성여왕]] 때에 [[신라]]가 혼탁하여 [[김상좌]](金商佐)가 [[왕건]]에게 위탁해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에 올른 이래 그 후손들이 문무 명신을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위세를 떨쳤다. 고려 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대게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 충신들이 많았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ref>조선 연산군대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빌미로 훈구세력에 의해 일어난 사화</ref><ref>연산조의 학자 [[성현 (조선)|성현]]은 『용재총화』에서「옛날에는 성했다가 지금은 쇠한」씨족을 지적하는 가운데 김해김씨를 하나로 들고 있다.</ref>를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에 휘말려 쇠락을 면치 못했다.
[[김희철 (1519년)|김희철]](金希哲)의 딸이 [[조선 선조|선조]](宣祖)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가 되면서 김희철은 [[부원군|국구]](國舅)로서 해령부원군(海寧府院君)에 봉해졌고, 아들 [[광해군]](光海君)이 왕으로 즉위한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역대 정승에서도 숙종조의 [[김우항]](金宇抗) 한 사람뿐이었다. 조선시대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정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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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金海 金氏)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수로왕(金首露)을 시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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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한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명의 촌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자주색 밧줄에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이 [[구지봉]]에 강림하고 여섯개 황금 알 중에 제일 먼저 나온 아이를 수로(首露)라 하고 가락국의 왕이 되니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다. 이후 후손들이 가락국이 세워진 김해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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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는 5세기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532년(법흥왕 19년)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귀족이 된 가락국의 마지막 왕으로 김유신의 증조부가 되는 [[구형왕|구형왕]](仇衡王)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상등의 작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그의 세 아들 중 차남 [[김무력]](金武力)이 [[신라]]에서 장군이 되어 [[관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최고의 관등인 각간(角干)을 지냈고, 신라의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백제와 여려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고,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 받았으며, 김서현의 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혼인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은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렀고,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김해김씨는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해 왔다. 이런 신김씨의 위세가 쇠퇴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이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 왕통이 단절되고 [[선덕왕]]의 [[내물왕|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부터 다른 진골 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 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으로 추락했다.<ref>김유신의 적손인 김윤중(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金長淸) 역시, 집사부의 말단직 집사랑(執事郞)을 지냈을 뿐이다. 김융(金融)의 난과 관련 있어 보인다.</ref><ref>김웅원(金雄元)이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고 이어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신무왕]]의 사돈이 된 것으로 보아 몰락하였던 [[김유신]]의 가계가 다시 부흥한 것으로 보인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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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때에 [[신라]]가 혼탁하여 [[김상좌]](金商佐)가 [[왕건]]에게 위탁해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에 올른 이래 그 후손들이 문무 명신을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위세를 떨쳤다. 고려 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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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대게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 충신들이 많았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ref>조선 연산군대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빌미로 훈구세력에 의해 일어난 사화</ref><ref>연산조의 학자 [[성현 (조선)|성현]]은 『용재총화』에서「옛날에는 성했다가 지금은 쇠한」씨족을 지적하는 가운데 김해김씨를 하나로 들고 있다.</ref>를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에 휘말려 쇠락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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