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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8일 (수) 11:36: 175.45.142.131 (토론)님이 왜성 (건축)에서 "edit" 동작을 수행하여 필터 0이(가) 작동했습니다. 조치: 경고; 필터 설명: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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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중}}
{{작성중}}
*倭城
[[파일:Ulsan waesung attack.jpg|섬네일|275px|[[울산왜성|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개요==
'''왜성'''(倭城, {{llang|ja|わじょう|와조오 [ウェソン {{해석|웨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된 [[일본]]식 [[성 (건축)|성곽]]을 말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침공해 온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일본식 성곽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지원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일시적으로승승장구하던 일본군과의 대치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어 강화협상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점령지를 수비하고 각 군영별 연락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해안 곳곳에 30여개의 성을 축성한 성곽이다. 이외에 전선 확장에 따라 보급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한 성이나 조선 정복 후 넘어올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해 한성, 평양, 부산에 쌓았던 것으로 알려진 고죠쇼(御座所), 왜란 초기 일본군이 조선 내 [[읍성]]을 이용하여 축조한 읍성 내 일본식 성벽 같은 것도 광의의 왜성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왜성의 축조 현황==
== 개요 ==
===임진왜란기===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 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성 (건축)|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양도성|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정유재란기===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목록==
*[[웅천왜성]]
*[[순천왜성]]
*[[구포왜성]]
*[[죽성리왜성]]
*[[죽도왜성]]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선진리왜성]]
*[[장문포왜성]]
*[[증산리왜성]]
*[[안골왜성]]


==왜성의 특징==
첫째는 연결성(連結城)<ref>소위 “つなぎの城”</ref>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 (건축)|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의 [[길주]]와 [[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ref>소위 “仕置の城”</ref>인데, [[대한민국]] 남해안([[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와 [[전남]] [[순천시 (전라남도)|순천]]) 지역에 쌓은 [[성 (건축)|성곽]]이다.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26여 개의 [[성 (건축)|성곽]]과 [[정유재란]] 기에 신규로 축성한 11개 등 37 여개의 성이 그것이다.<ref>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25.</ref> 곤양, 광양, 목창, 영춘 등 멸실된 왜성을 포함하면 그 수는 40여 개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ref name=":0">[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903111450071&code=116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 주간경향신문]</ref>
 
== 개설 ==
왜성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에서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구(遺構)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알 수 없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미 조사된 것만도 32개소에 달하였다.
 
== 내용 및 특징 ==
왜성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침략지인 조선에 축조된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는 성곽이었다. 왜성은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침략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방어기능 강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두 항(港)의 확보를 위하여 총구(惣構) 시설 같은 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왜성은 [[부산진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왜성]]·[[가덕도왜성]]·[[창원 진해 웅천왜성]] 등 32개소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92~1593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 [[부산일본성]]·[[부산진성]]·[[임랑포왜성]]·[[기장 죽성리왜성]]·[[구포왜성]]·[[김해 죽도왜성]]·[[가덕도왜성]]·[[가덕도 왜성지성]]·[[서생포왜성]] 등 19개이고,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축조된 것이 [[광리왜성|견내량왜성]]·[[울산왜성]]·[[양산 증산리 왜성]]·[[마산일본성]]·[[고성왜성]]·[[사천선진리성]]·[[남해 선소왜성]]·[[순천왜성]] 등 8개이다. 그리고 [[마산일본성]]([[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사왜성(김해시 생림면), 울포산성, 탑포산성 등 5개의 성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왜성은 거의 대부분 전시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지상으로는 강과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고 있다. 왜성은 [[왜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 관계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아니고서는 보급·연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후방기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손쉽게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주곽부(主郭部)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多重)의 곽(郭)과 곡륜(曲輪)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입구는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 아래에 호즉·해자가 시공된 흔적이 남아 있다.
 
== 구조 ==
남해안 일대 왜성은 40여 개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 (건조물)|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상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와 마스가타에 딸린 [[구루와#우마다시|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f>[http://sansung.culturecontent.com/e/ebd.asp 왜성 축소방식의 특징《한국의 산성》]{{깨진 링크|url=http://sansung.culturecontent.com/e/ebd.asp }}</ref>
 
=== 구루와 ===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 고구치 ===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llang|ja|橫矢|횡시}})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 (건축)|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 석벽, 성루 ===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 (건축)|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노보리이시가키 ====
{{본문|노보리이시가키}}
왜성에는 일본의 근세성곽에서 보이지 않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장대한 장벽도 설치되었다. 이것은 왜성만의 특징적인 구조로, 산성부의 본성과 산기슭부의 지성이나 부속시설을 하나로 연결하여 방어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서생포왜성]]이나 [[웅천왜성]] 등에서는 이 노보리이시가키가 잘 보존되어 있다.<ref>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32.</ref>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성에서도 간혹 보이는 축성방법으로 [[이요 마쓰야마 성|마쓰야마 성]], [[히코네 성]], [[스모토 성]]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왜란에 참전했다 귀국한 [[다이묘]] 들의 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쌓은 성이 대표적이다.
 
=== 해자 ===
왜성은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성 아래에 [[해자]]가 시공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담에 뚫린 사마(?間)으로 공성군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천수각]]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 특징 ===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있게 배치되었다. 또, 동래성 같은 경우는 기존의 조선성곽에 붙여서 왜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혼마루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일본군의 석축은 조선식에 비해 빠르게 올릴 수는 있지만 내구력 자체는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빨리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택건축의 안정성과 유지력에서 분화된 다른나라의 축성술과 달리, 오로지 성을 쌓기 위해서만 방벽으로 발달한 일본식 축성술의 특징으로, 왜란 당시까진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쥐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인스턴트]] 성벽이다.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 연구 ===
{{인용문|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이 축조한 성인 왜성(倭城)의 연구 결과를 정리했다.<ref name="현지">현지 안내문 인용</ref>
 
나 팀장은 1597년 왜군 1만6천 명이 40여 일간 만든 울산 왜성이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국내에 있는 왜성 30여 곳이 개발과 환경 변화로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ref name="현지" />
 
그는 "왜성은 400여 년 전 치열했던 동아시아 전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강조했다.<ref name="현지" />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공동 주관하고 KEB하나은행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22일까지 이어지는 '정유재란' 특별전과 연계해 기획됐다.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발발, 노량해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순천성 전투 등에 관한 발표도 진행된다.<ref name="현지" />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정유재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전쟁의 실상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민중의 삶과 생활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현지" />
 
'''정유재란 목적은 한반도 남부 정복…조선인 모조리 연행'''<ref name="현지" />}}
 
== 의의 ==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써 거듭 개·보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곽 축성 시기의 축성법을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의미가 있다.
 
== 기타 ==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의 행정지명도 있다.<ref>[https://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38150325 네이버 지도 역설. 기장군의 행정지명. 왜성]{{깨진 링크|url=https://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38150325}} 2018년 12월 21일 확인</ref><!---->
 
* 지난 2019년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 name=":0" />
 
== 주요 왜성 상세 목록 ==
<ref>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http://www.gnchc.re.kr/down/9-1.pdf],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시리즈[http://panzercho.egloos.com/m/11191023]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m/11191023 |date=20181229031754 }},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전자도서관 [http://lib.aks.ac.kr/search/DetailView.ax?sid=1&cid=446834] {{웨이백|url=http://lib.aks.ac.kr/search/DetailView.ax?sid=1&cid=446834 |date=20181229031758 }},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11100047], 420년 전 임진왜란의 전리품, 왜성을 다시 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22164.html#csidx488d610a35e397eaf231208744e8ee1], 국립진주박물관 - 교육/행사/연구 - 학술조사연구 - 왜성조사 - 남해 선소왜성 [https://jinju.museum.go.kr/html/kr/research/research_04.html], NAVER 학술정보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38294225]{{깨진 링크|url=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38294225 }}, 코리아스칼라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http://db.koreascholar.com/article?code=272127]{{깨진 링크|url=http://db.koreascholar.com/article?code=272127 }}</ref> PDF 링크 참조. 정부 근거 자료 제시 Untitled 역사문화센터의 자료.<ref>方*鎭 2015年.11/28土 [https://story.kakao.com/_4XJdk2/KZW2ct00w4A] {{웨이백|url=https://story.kakao.com/_4XJdk2/KZW2ct00w4A |date=20190708025814 }}, 팬저의 국방여행 : 부산지역의 성곽(읍성,진성,왜성,산성) [http://panzercho.egloos.com/9677777]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9677777 |date=20190708025818 }}, 경향신문 문화 - 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091648001&code=960100#csidx2212d61f9606738af697096a1ab8e0d],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정유재란(1597~1598)과 왜성 [https://blog.naver.com/yisunsin21/221517614114], 팬저의 국방여행 마산왜성_03 [http://panzercho.egloos.com/10407610]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10407610 |date=20190710073757 }}, 김해박물관교재_7회차.indd 김해왜성의 축성과 그 의의 (나동욱),‘나성’은 알아도 ‘왜성’은?…잊어선 안 될 400년 전 ‘치욕의 성’[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708718.html]</ref> 웹사이트 참조. 블로그, 매거진, 도서관 근거 자료 제시.<ref>[http://cafe.daum.net/kkh0820/KHqR/44?q=%EC%98%81%EB%8F%84%EC%99%9C%EC%84%B1 {{웨이백|url=http://cafe.daum.net/kkh0820/KHqR/44?q=%EC%98%81%EB%8F%84%EC%99%9C%EC%84%B1 |date=20190924035817 }} 과학의 산책|왜성 조사 편, 조선왕조실록 연계 왜성(倭城)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862] {{웨이백|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862 |date= }}</ref>
 
=== [[임진왜란]]기 (1592 ~ 1598) ===
*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order-bottom:solid 3px #00a7db;"
! style="background:#ccf" | 왜성명
! style="background:#ccf" | 축성 시기
! style="background:#ccf" | 축성
! style="background:#ccf" | 수비
! style="background:#ccf" | 소재지
! style="background:#ccf" | 비고
|-
|}
 
=== [[정유재란]]기 (1597 ~ 1598) ===
*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order-bottom:solid 3px #00a7db;"
! style="background:#ccf" | 왜성명
! style="background:#ccf" | 축성 시기
! style="background:#ccf" | 축성
! style="background:#ccf" | 수비
! style="background:#ccf" | 소재지
! style="background:#ccf" | 병력
! style="background:#ccf" | 비고
|-
| 광리왜성</br><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견내량왜성·왜성동성</span>&#93;</sup></span>(廣里倭城)
| [[1593년]] ~ [[1597년]]
| [[일본군]]
|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
|
|-
| [[고성읍성|고성왜성]](固城邑城)
| [[1597년]]
| [[깃카와 히로이에]]
| [[다치바나 무네시게]] 外
| [[경남]] [[고성군 (경상남도)|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서외리,수남리일대
| 7,000명
|
|-
| [[남해 선소왜성]](南海船所倭城)
| [[1597년]]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소 요시토시]]
|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3-1
| 1,000명
|
|-
|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 [[1598년]]
| [[모리 데루모토]] 外
| [[고니시 유키나가]]
|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광역시)|동구]] [[범일동]]
|
|
|-
|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 [[1597년]]
| [[나베시마 나오시게]] 外
| [[나베시마 나오시게]]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 12,000명
|
|-
| [[사천선진리성]]<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곤양왜성</span>&#93;</sup></span></br>(泗川船津里城)
| [[1597년]]
| [[모리 가쓰노부|모리 요시나리]]<ref>[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사천 선진리성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 [[시마즈 요시히로]]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외
| 10,000명
|
|-
| [[순천왜성]](順天倭城)
| [[1597년]]
| [[고니시 유키나가]]
| [[고니시 유키나가]]
| [[전남]]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 13,700명
|
|-
| [[양산 증산리 왜성]](勿禁甑山里倭城)
| [[1597년]]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外
| [[구로다 나가마사]]
|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38-1번지
|
|
|-
| [[울산왜성]](蔚山倭城)
| [[1597년]]
| [[오타 가즈요시]]
| [[가토 기요마사]]
| [[울산광역시]] [[중구 (울산광역시)|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 10,000명
|
|-
|}
 
=== 멸실중인 왜성 ===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ackground-color:#CCCCCC"
!성
!소재지
!축성 지휘관
!시기
!멸실 여부
|-
|}


== 외부 링크 ==
{{도요토미 정권}}
== 각주 ==
{{주석}}
{{주석}}
{{글로벌세계대백과}}
{{전거 통제}}
[[분류:왜성]]
[[분류:왜성]]
[[분류:성곽]]
[[분류: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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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중}} *倭城 ==개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침공해 온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일본식 성곽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지원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일시적으로승승장구하던 일본군과의 대치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어 강화협상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점령지를 수비하고 각 군영별 연락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해안 곳곳에 30여개의 성을 축성한 성곽이다. 이외에 전선 확장에 따라 보급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한 성이나 조선 정복 후 넘어올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해 한성, 평양, 부산에 쌓았던 것으로 알려진 고죠쇼(御座所), 왜란 초기 일본군이 조선 내 [[읍성]]을 이용하여 축조한 읍성 내 일본식 성벽 같은 것도 광의의 왜성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왜성의 축조 현황== ===임진왜란기===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양도성|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정유재란기===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목록== *[[웅천왜성]] *[[순천왜성]] *[[구포왜성]] *[[죽성리왜성]] *[[죽도왜성]]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선진리왜성]] *[[장문포왜성]] *[[증산리왜성]] *[[안골왜성]] ==왜성의 특징==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주석}} [[분류:왜성]] [[분류:성곽]] [[분류:한국의 성]]'
편집 후 새 문서의 위키텍스트 (new_wikitext)
'{{작성중}} [[파일:Ulsan waesung attack.jpg|섬네일|275px|[[울산왜성|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왜성'''(倭城, {{llang|ja|わじょう|와조오 [ウェソン {{해석|웨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된 [[일본]]식 [[성 (건축)|성곽]]을 말한다. == 개요 ==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 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식 [[성 (건축)|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연결성(連結城)<ref>소위 “つなぎの城”</ref>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 (건축)|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의 [[길주]]와 [[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ref>소위 “仕置の城”</ref>인데, [[대한민국]] 남해안([[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와 [[전남]] [[순천시 (전라남도)|순천]]) 지역에 쌓은 [[성 (건축)|성곽]]이다.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26여 개의 [[성 (건축)|성곽]]과 [[정유재란]] 기에 신규로 축성한 11개 등 37 여개의 성이 그것이다.<ref>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25.</ref> 곤양, 광양, 목창, 영춘 등 멸실된 왜성을 포함하면 그 수는 40여 개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ref name=":0">[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903111450071&code=116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 주간경향신문]</ref> == 개설 == 왜성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에서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구(遺構)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알 수 없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미 조사된 것만도 32개소에 달하였다. == 내용 및 특징 == 왜성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침략지인 조선에 축조된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는 성곽이었다. 왜성은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침략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방어기능 강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두 항(港)의 확보를 위하여 총구(惣構) 시설 같은 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왜성은 [[부산진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왜성]]·[[가덕도왜성]]·[[창원 진해 웅천왜성]] 등 32개소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92~1593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 [[부산일본성]]·[[부산진성]]·[[임랑포왜성]]·[[기장 죽성리왜성]]·[[구포왜성]]·[[김해 죽도왜성]]·[[가덕도왜성]]·[[가덕도 왜성지성]]·[[서생포왜성]] 등 19개이고,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축조된 것이 [[광리왜성|견내량왜성]]·[[울산왜성]]·[[양산 증산리 왜성]]·[[마산일본성]]·[[고성왜성]]·[[사천선진리성]]·[[남해 선소왜성]]·[[순천왜성]] 등 8개이다. 그리고 [[마산일본성]]([[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사왜성(김해시 생림면), 울포산성, 탑포산성 등 5개의 성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왜성은 거의 대부분 전시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지상으로는 강과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고 있다. 왜성은 [[왜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 관계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아니고서는 보급·연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후방기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손쉽게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주곽부(主郭部)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多重)의 곽(郭)과 곡륜(曲輪)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입구는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 아래에 호즉·해자가 시공된 흔적이 남아 있다. == 구조 == 남해안 일대 왜성은 40여 개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 (건조물)|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상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와 마스가타에 딸린 [[구루와#우마다시|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f>[http://sansung.culturecontent.com/e/ebd.asp 왜성 축소방식의 특징《한국의 산성》]{{깨진 링크|url=http://sansung.culturecontent.com/e/ebd.asp }}</ref> === 구루와 ===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 고구치 ===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llang|ja|橫矢|횡시}})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 (건축)|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 석벽, 성루 ===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 (건축)|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노보리이시가키 ==== {{본문|노보리이시가키}} 왜성에는 일본의 근세성곽에서 보이지 않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장대한 장벽도 설치되었다. 이것은 왜성만의 특징적인 구조로, 산성부의 본성과 산기슭부의 지성이나 부속시설을 하나로 연결하여 방어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서생포왜성]]이나 [[웅천왜성]] 등에서는 이 노보리이시가키가 잘 보존되어 있다.<ref>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32.</ref>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성에서도 간혹 보이는 축성방법으로 [[이요 마쓰야마 성|마쓰야마 성]], [[히코네 성]], [[스모토 성]]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왜란에 참전했다 귀국한 [[다이묘]] 들의 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쌓은 성이 대표적이다. === 해자 === 왜성은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성 아래에 [[해자]]가 시공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담에 뚫린 사마(?間)으로 공성군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천수각]]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 특징 ===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있게 배치되었다. 또, 동래성 같은 경우는 기존의 조선성곽에 붙여서 왜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혼마루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일본군의 석축은 조선식에 비해 빠르게 올릴 수는 있지만 내구력 자체는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빨리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택건축의 안정성과 유지력에서 분화된 다른나라의 축성술과 달리, 오로지 성을 쌓기 위해서만 방벽으로 발달한 일본식 축성술의 특징으로, 왜란 당시까진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쥐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인스턴트]] 성벽이다.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 연구 === {{인용문|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이 축조한 성인 왜성(倭城)의 연구 결과를 정리했다.<ref name="현지">현지 안내문 인용</ref> 나 팀장은 1597년 왜군 1만6천 명이 40여 일간 만든 울산 왜성이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국내에 있는 왜성 30여 곳이 개발과 환경 변화로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ref name="현지" /> 그는 "왜성은 400여 년 전 치열했던 동아시아 전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강조했다.<ref name="현지" />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공동 주관하고 KEB하나은행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22일까지 이어지는 '정유재란' 특별전과 연계해 기획됐다.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발발, 노량해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순천성 전투 등에 관한 발표도 진행된다.<ref name="현지" />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정유재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전쟁의 실상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민중의 삶과 생활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현지" /> '''정유재란 목적은 한반도 남부 정복…조선인 모조리 연행'''<ref name="현지" />}} == 의의 ==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써 거듭 개·보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곽 축성 시기의 축성법을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의미가 있다. == 기타 ==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의 행정지명도 있다.<ref>[https://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38150325 네이버 지도 역설. 기장군의 행정지명. 왜성]{{깨진 링크|url=https://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38150325}} 2018년 12월 21일 확인</ref><!----> * 지난 2019년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 name=":0" /> == 주요 왜성 상세 목록 == <ref>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http://www.gnchc.re.kr/down/9-1.pdf],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시리즈[http://panzercho.egloos.com/m/11191023]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m/11191023 |date=20181229031754 }},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전자도서관 [http://lib.aks.ac.kr/search/DetailView.ax?sid=1&cid=446834] {{웨이백|url=http://lib.aks.ac.kr/search/DetailView.ax?sid=1&cid=446834 |date=20181229031758 }},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11100047], 420년 전 임진왜란의 전리품, 왜성을 다시 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22164.html#csidx488d610a35e397eaf231208744e8ee1], 국립진주박물관 - 교육/행사/연구 - 학술조사연구 - 왜성조사 - 남해 선소왜성 [https://jinju.museum.go.kr/html/kr/research/research_04.html], NAVER 학술정보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38294225]{{깨진 링크|url=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38294225 }}, 코리아스칼라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http://db.koreascholar.com/article?code=272127]{{깨진 링크|url=http://db.koreascholar.com/article?code=272127 }}</ref> PDF 링크 참조. 정부 근거 자료 제시 Untitled 역사문화센터의 자료.<ref>方*鎭 2015年.11/28土 [https://story.kakao.com/_4XJdk2/KZW2ct00w4A] {{웨이백|url=https://story.kakao.com/_4XJdk2/KZW2ct00w4A |date=20190708025814 }}, 팬저의 국방여행 : 부산지역의 성곽(읍성,진성,왜성,산성) [http://panzercho.egloos.com/9677777]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9677777 |date=20190708025818 }}, 경향신문 문화 - 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091648001&code=960100#csidx2212d61f9606738af697096a1ab8e0d],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정유재란(1597~1598)과 왜성 [https://blog.naver.com/yisunsin21/221517614114], 팬저의 국방여행 마산왜성_03 [http://panzercho.egloos.com/10407610] {{웨이백|url=http://panzercho.egloos.com/10407610 |date=20190710073757 }}, 김해박물관교재_7회차.indd 김해왜성의 축성과 그 의의 (나동욱),‘나성’은 알아도 ‘왜성’은?…잊어선 안 될 400년 전 ‘치욕의 성’[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708718.html]</ref> 웹사이트 참조. 블로그, 매거진, 도서관 근거 자료 제시.<ref>[http://cafe.daum.net/kkh0820/KHqR/44?q=%EC%98%81%EB%8F%84%EC%99%9C%EC%84%B1 {{웨이백|url=http://cafe.daum.net/kkh0820/KHqR/44?q=%EC%98%81%EB%8F%84%EC%99%9C%EC%84%B1 |date=20190924035817 }} 과학의 산책|왜성 조사 편, 조선왕조실록 연계 왜성(倭城)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862] {{웨이백|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4862 |date= }}</ref> === [[임진왜란]]기 (1592 ~ 1598) === *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order-bottom:solid 3px #00a7db;" ! style="background:#ccf" | 왜성명 ! style="background:#ccf" | 축성 시기 ! style="background:#ccf" | 축성 ! style="background:#ccf" | 수비 ! style="background:#ccf" | 소재지 ! style="background:#ccf" | 비고 |- |} === [[정유재란]]기 (1597 ~ 1598) === *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order-bottom:solid 3px #00a7db;" ! style="background:#ccf" | 왜성명 ! style="background:#ccf" | 축성 시기 ! style="background:#ccf" | 축성 ! style="background:#ccf" | 수비 ! style="background:#ccf" | 소재지 ! style="background:#ccf" | 병력 ! style="background:#ccf" | 비고 |- | 광리왜성</br><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견내량왜성·왜성동성</span>&#93;</sup></span>(廣里倭城) | [[1593년]] ~ [[1597년]] | [[일본군]] |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 | |- | [[고성읍성|고성왜성]](固城邑城) | [[1597년]] | [[깃카와 히로이에]] | [[다치바나 무네시게]] 外 | [[경남]] [[고성군 (경상남도)|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서외리,수남리일대 | 7,000명 | |- | [[남해 선소왜성]](南海船所倭城) | [[1597년]]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소 요시토시]] |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3-1 | 1,000명 | |- |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 [[1598년]] | [[모리 데루모토]] 外 | [[고니시 유키나가]] |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광역시)|동구]] [[범일동]] | | |- |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 [[1597년]] | [[나베시마 나오시게]] 外 | [[나베시마 나오시게]]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 12,000명 | |- | [[사천선진리성]]<span style="font-size:10pt;"><sup class="noprint">&#91;<span class="plainlinks">곤양왜성</span>&#93;</sup></span></br>(泗川船津里城) | [[1597년]] | [[모리 가쓰노부|모리 요시나리]]<ref>[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사천 선진리성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 [[시마즈 요시히로]]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외 | 10,000명 | |- | [[순천왜성]](順天倭城) | [[1597년]] | [[고니시 유키나가]] | [[고니시 유키나가]] | [[전남]]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 13,700명 | |- | [[양산 증산리 왜성]](勿禁甑山里倭城) | [[1597년]]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外 | [[구로다 나가마사]] |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38-1번지 | | |- | [[울산왜성]](蔚山倭城) | [[1597년]] | [[오타 가즈요시]] | [[가토 기요마사]] | [[울산광역시]] [[중구 (울산광역시)|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 10,000명 | |- |} === 멸실중인 왜성 === {| border=1 cellspacing=0 style="text-align:center" |- style="background-color:#CCCCCC" !성 !소재지 !축성 지휘관 !시기 !멸실 여부 |- |} == 외부 링크 == {{도요토미 정권}} == 각주 == {{주석}} {{글로벌세계대백과}} {{전거 통제}} [[분류:왜성]] [[분류:성곽]] [[분류:한국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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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시점의 유닉스 시간 기록 (timest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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