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진 전투

여요전쟁 시기 고려군과 요나라군이 흥화진(興化鎭)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 총 4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서기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요군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 조정은 이 갑작스러운 침입에 매우 동료하였고, 신료들은 당장 항복하자는 주장과 "그냥 항복하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니, 자비령 이북을 할양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이때 서희가 할지론을 강하게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군을 격퇴하면서 조정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인 끝에 송나라와 단교하고 요나라의 연호를 쓰는 대가로, 청천강 이북,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여진족의 영토인를 고려가 점거하는 걸 승낙받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서희는 친히 안북부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280리의 땅을 확보한 뒤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주를 설치하니, 이것이 바로 강동6주였다.

그 중 흥화진은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에 설치된 성보(城堡)로, 995년에 설치된 뒤 고려와 요나라의 최전선 요충지로 기능했다. 그러던 1010년 9월, 요 성종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정벌하겠다는 군령을 내린 뒤 그해 11월 40만 대군을 소집하여 의군천병(義軍天兵)이란 이름을 붙인 뒤,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다. 이리하여 흥화진 전투의 막이 올랐다.

1010년 전투[편집 | 원본 편집]

101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4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최전방의 고려군 요새인 흥화진을 포위했다. 순검사 겸 형부낭중 양규, 진사 겸 호부낭중 정성, 부사 겸 장작주부 이수화, 판관 겸 늠희령 장호 등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이에 요군은 일부 병력으로 흥화진을 포위해 놓고, 나머지 병력으로 남하하여 통주 전투에서 30만 고려군을 격파하고 지휘관 강조를 사로잡은 뒤 처형했다. 이후 강조의 서신을 거짓으로 꾸며서 흥화진에서 발송하여 항복을 권했다. 이에 양규가 말했다.

나는 왕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지, 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요 성종은 통주성 밖에서 벼를 베던 남녀를 사로잡아 각각 비단옷을 하사하고 종이로 감싼 화살 하나를 준 뒤, 병사 300여 명으로 하여금 흥화진까지 호송하여 항복을 권유했다. 화살을 감싼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짐은 전왕 왕송이 조정을 섬긴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왕을 세웠기 때문에 친히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이미 국경에 이르렀다. 너희가 강조를 잡아서 어가 앞으로 보내온다면 곧 군대를 되돌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개경으로 들어가 너희 처자식들을 죽일 것이다.

뒤이어 칙서를 화살에 묶어 성문에 꽂아두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흥화진의 성주와 군인 및 백성들에게 명한다. 짐이 생각하건대 전왕 왕송은 그 조상을 계승하여 복속한 뒤 우리의 번신이 되어 변방을 지켜오던 도중 갑자기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짐은 정예병을 이끌고 와서 죄인들을 토벌하고자 하되, 여타 위협에 굴복하여 가담한 자들은 모두 용서할 것이다. 더욱이 너희는 전왕이 안무해주던 은혜를 받았고, 역대의 반역과 순종이 유래한 바를 알고 있으니, 의당 짐의 뜻을 체득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이수화 등이 요 성종에게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있는 자는 마땅히 간사하고 흉악한 자를 제거해야 하고, 아비를 의지하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개와 지조를 굳건히 해야 하니, 만약 이러한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민(民)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밝으신 지략을 거두어주십시오. 천망을 크게 펼쳐두고 어찌 참새와 같은 작은 새들이 먼저 뛰어들기를 바라십니까. 병거에 올라가 통할하시면 비휴와 같은 용맹한 군대의 복종을 얻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 성종이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흥화진 장수들에게 차등있게 하사하고 칙서를 내려 일렀다.

표문을 올려 아뢴 바를 모두 살펴봤다. 짐은 다섯 성군을 계승하여 천하에 임어한 이후로 충성스럽고 어진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을 보였고, 흉악하고 반역하는 자에게는 모름지기 형벌을 시행하였다. 강조는 옛 군주를 시해한 뒤 저 어린 군주를 끼고서 마음대로 간악한 권세를 부리며 크게 위압과 복덕을 보였다. 따라서 친히 죄인을 토벌하고 특별히 형전의 명분을 바로잡고자 바야흐로 모든 군사를 이끌고 국경 근처까지 이른 것이다. 앞서 특별히 칙서를 반포한 것은 초유하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는데, 문득 올라온 글을 보니 귀부하겠다는 말은 아뢰지 않았다.


진술하고 있는 바는 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화려한 문장은 단지 공경하는 듯 보이려는 것뿐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일찍부터 관직에 포열하여 필시 반역과 순종에 대하여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역당에게 계책은 보태면서 전왕을 위해 설욕할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의당 안위를 되돌아보면서 재앙과 미리 분별해야 할 것이다.

다음날 이수화가 표문으로 회답했다.

신들은 지난 날 조서를 받들 때마다 번번이 굳건한 심정을 진술하였습니다. 허물을 보고 눈물 흘리는 은혜를 내려주시기 바라고 그물을 풀어주는 인자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서리에도 버티고 눈을 감내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할 것이며, 뼈가 재로 변하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천년의 성업을 영원히 받들 것입니다.

요 성종은 표문을 본 뒤 흥화진 장수들이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결국 포위를 풀고 다시 칙서를 발송했다.

너희는 백성을 안무하며 기다리도록 하라. 20만 병력을 인주 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20만 병사들로 통주까지 진격할 것이다.

요군이 남하한 뒤,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는 700 결사대를 이끌고 추격하다가 통주에 이르러 병사 천여 명을 수습했다. 이후 곽주성을 탈환하고 성 안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후 그는 귀주 별장 김숙흥, 중랑장 보량 등과 더불어 요군을 무찌르고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들을 구출하는 등 종횡무진하다가 1011년 1월 28일 애전에서 요군 본대에게 포위되어 분전 끝에 장렬히 전사했다.

요군은 비록 양규, 김숙흥 등을 처치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게다가 큰 비를 만나 말과 낙타가 지치고 갑옷과 병기들이 모조리 상했다. 양규를 대신하여 흥화진 수비를 맡고 있던 정성은 요군이 지친 몸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는 걸 지켜보다가 절반 정도가 강을 건넜을 때 후미에서 공격하여 수많은 적병을 익사시켰다.

1014~1015년 전투[편집 | 원본 편집]

1014년 10월, 요성종의 장인인 상온 소적렬이 이끄는 요군이 흥화진을 공격했다. 이에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반격을 가해 7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수많은 적병을 익사시켰다. 1015년 음력 1월 22일(양력 2월 13일) 요군이 다시 흥화진을 포위하자, 장군 고적여와 조익 등이 반격하여 물리쳤다.

그해 음력 9월 12일(양력 10월 27일) 요군이 국경을 넘어 통주를 침략하자, 흥화진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태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해 700 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그러나 정신용 등 지휘관 6명은 전투 도중 전사했다.

현종은 정신용을 상서우복야 상주국으로, 주연을 장군으로, 임억을 중랑장으로, 양춘을 낭장으로, 손간을 상약봉어로, 강승영을 태사령으로 추증하였고, 정신용의 아들 정균백에게는 낭장 겸 상승봉어를 제수했다.

1017년 전투[편집 | 원본 편집]

1017년 8월, 요나라의 소합탁이 흥화진을 포위하고 9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군 견일, 홍광, 고의가 출격하여 요군을 크게 물리쳐서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1018년 전투[편집 | 원본 편집]

흥화진 전투.jpg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황제 직속 부대인 우피실군을 포함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현종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대장군 강민첨을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했다. 이때 소집된 고려군의 병력은 20만 8천 3백명으로, 영주에 주둔하였다. 강감찬은 흥화진에 기병 12,000명을 파견하여 흥화진 옆 삼교천 계곡에 매복하게 한 뒤, 굵은 줄로 쇠가죽을 꿰어서 성 동쪽의 큰 강을 막고서 적군을 기다렸다. 이윽고 요군이 흥화진을 우회하여 삼교천을 도하하자, 고려군은 쇠가죽으로 막을 둑을 터트린 뒤 복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개경으로 곧장 진격했다.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에 이르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내구산 전투) 시랑 조원도 마탄에서 크게 공격해 만여 급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그래도 소배압이 끝까지 개경으로 밀고 내려오자,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1만 별동대를 맡고 개경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고, 동북면병마사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 지원했다.

여기에 현종이 개경 주변의 초가를 철거하고 주민들을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끝까지 항전할 뜻을 비추자, 소배압은 개경으로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철군하려 했다. 이에 강감찬은 전군을 귀주로 집결시킨 뒤, 1019년 음력 2월 1일(양력 3월 10일) 구주 벌판에서 요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