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부

정초부
인물 정보
출생 1714년
사망 1789년
국적 조선
직업 시인

정초부(鄭樵夫, 1714년1789년)은 조선시인이다. 초부는 나무꾼이라는 뜻이며 《다산시령》에 실린 초부유고(樵夫遺稿)에 따르면 본명은 정이재(鄭彛載)라 전해진다. 오늘날 경기도 광주와 양평의 남한강 유역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본디 함양 여씨 가문의 가노였으며 이름처럼 나무꾼이었다. 노비 출신인 정초부가 한시를 지을 수 있었던 까닭은 주인 여춘영(呂春永, 1734 – 1812)이 그이의 재주를 알아보고 글을 배울 수 있도록 도운 덕분이었다. 여춘영은 정초부를 친구로 여기며 지냈는데 훗날 정초부가 죽자 몹시 슬퍼하며 제문과 만시(輓詩)를 짓기도 하였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 그 제문과 만시 12수가 실려 있다.

노비 시절부터 한시를 잘 지어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양반들과 함께 시회에 참여하고 주인 여춘영과 시를 주고받는 등 재주를 펼쳤다.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지은 신광수, 수원부사를 지낸 김상묵 등 내로라하는 양반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주인 여춘영은 나아가 아예 정초부를 면천하고 양인이 되게 하였으니 그 재주를 아주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분은 양인이어도 출신은 노비였기에 시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고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1789년 75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

《병세집》, 《다산시령》, 《삼명시화》 등에 정초부가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작품[편집 | 원본 편집]

翰墨餘生老採樵(한묵여생노채초)

시인의 여생은 늙은 나무꾼일 뿐

滿肩秋色動蕭蕭(만견추색동소소)

어깨에 쏟아지는 가을빛은 쓸쓸하기만 하고

東風吹送長安路(동풍취송장안로)

동풍이 시내 큰길로 나를 밀어 보내니

曉踏靑門第二橋(효답청문제이교)

새벽에 동대문 제이교를 걸어가네
— 노초부(老樵夫)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뚜렷이 보이는 것은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飛去盡(유로일성비거진)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노을이 물든 산빛만이 강하에 가득하다
— 동호(東湖)

江山樵夫屋(강산초부옥)

강가에 있는 나무꾼의 집

元非逆旅家(원비역여가)

나그네를 맞는 여관이 아니라오

欲知我名姓(욕지아명성)

내 성명을 알고 싶거든

歸問廣陵花(귀문광릉화)

광릉에 가서 꽃에게나 물어 보소
— 과객(過客)

半夜登樓 非玩月(반야등루 비완월)

한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구경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三朝壁穀 未成仙(삼조벽곡 미성선)

삼시 곡기 끊은 것은 신선이 되려는 것이 아닐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