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이승엽(1982)

개요[원본 편집]

파일:Http://ko.yagongso.wikidok.net/api/File/Real/5acd9ff5ff416c173ea014be

이름 이승엽(李承燁)
생년월일 1982년 11월 28일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신체조건 184cm/88kg
출신지 부산광역시
출신학교 대저초-부산동정중-부산고-중앙대
프로 입단 2002년 두산 2차 6라 49번, 2006 입단
소속팀

두산 베어스(2006~2007)

고양 원더스(2011~2012)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이승엽과 동명이인인 두산 베어스 소속이었던 은퇴 선수. 한자도 李承燁으로 같다. 포지션과 포구하는 손은 달랐지만 똑같이 좌타자이고, 체격 역시 기존(?) 이승엽이 183cm / 87kg로 이승엽(1982)과 유사했기에 야구팬의 입장에서는 비슷함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조건이었다.

 

2006년, 그 해[원본 편집]

2006년은 ‘레전드’ 이승엽이 일본에서 가장 큰 활약과 명성을 보일 시기였다. 이전 2006년 WBC에서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었고, 명문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한 부분은 더욱더 큰 주목을 불러일으킬만했다. 최종 성적 .323/.389/.615 41홈런 108타점 OPS 1.003으로 흠잡을 데가 없는 성적이었다.

이때의 인기에 두산 베어스 역시 편승하려 했던 것일까. 한국의 이승엽(1982) 역시 2006년 이승엽의 역사의 장으로 들어오게 된다. 프로 첫해였고,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 했음에도 이승엽을 1군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콜업 당시 성적은 0.171의 타율(70타수 12안타) 무홈런 8타점. 2군 성적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콜업이었다. 심지어 같은 외야수인 김현수는 타율 0.291, OPS 0.859 6홈런 12도루(시즌 최종 성적)로 훨씬 더 좋은 성적(발 빠른 기레기?)을 거두고 있었지만 1군에서 받은 기회는 단 1타석뿐이었다. 당시 김경문 감독 역시 “우리 이승엽도 잘할 것 같아서 불러올렸다”라고 농담 식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의 이름이 아닌 2군 성적 대로였다. 12타석, 아주 잠깐의 흔적이었지만 그 기회 동안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한 채 삼진만 7번을 당하고 말았다. 1볼넷이 그가 ‘출루’로서 1루에 남긴 유일한 족적이었다.

결국 ‘이승엽 콜업 사건’은 프로야구적으로는 어떤 성과도 남기지 못헀다. ‘우리도 이승엽이 있습니다’, ‘응원해줍시다 우리 이승엽 선수~’와 같은 말로 응원을 독려하던 응원단장의 말과 팬들의 응원소리만 남게 되었다. 또한 이슈를 위한 야구 외적인 콜업이었다는 불편한 의혹 역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프로야구는 어디까지나 성적 내기가 아닌 ‘팬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우선시되는 가치이므로 팬들의 즐거움과 관심을 유도했다는 것엔 오히려 좋은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의 두산은 한 경기, 한 이닝이 아쉬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치열한 순위 싸움 속에서 항상 최고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두산은 그렇지 못 했고, 결국 단 한 경기 차이로 기아 타이거즈에 밀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공교롭게도 이승엽이 콜업되었던 기아와의 광주 3연전에서 두산과 기아의 순위는 4위와 5위에서 서로 바뀌게 되었다. 그가 1군으로 올라온 첫날, 6번타자로 바로 선발출장시켰던 만큼 분명 영향은 더 컸다. 기아는 이승엽이 ‘첫 선발출장’했던 이 경기를 잡아냈고, 다음 경기마저 잡아내면서 가을의 기운을 자신들에게 가져오게 되었다. 만약 이 때 한 경기라도 더 잡아낼 수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두산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에 있어서 이승엽의 출전이 영향이 컸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전년도 2위 팀, 그리고 여름까지 기아와 꽤 큰 차이의 성적을 보여줬던 팀으로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실패한 점은 분명 훨씬 더 커다란 여러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유들을 생각해봄에 있어서 ‘경기 내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다’가 포함이 되어선 안됐다.

3. 그 이후[원본 편집]

콜업 이후 다시 2군으로 내려와서는 34타수 13안타 1홈런으로 나름 1군에서의 성장을 보여주기도 하여 결국 2군 최종 성적을 0.240의 타율, OPS 0.752로 끌어올리며 시즌을 마친다. 시즌 후 미야자키 교육리그에도 참가하였지만, 프로에서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2007년부터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2011년 말 탄생한 고양 원더스에서 잠깐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2006년 여름 그는, 이름으로 빚어진 잠깐의 주목과 기대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