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오스카 타베라스(Oscar Tave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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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스카 타베라스(풀네임: Oscar Fransisco Taveras)
생년월일 1992년 6월 19일
사망날짜 2014년 10월 26일(사망 당시 22세)
국적/출신지 도미니카 공화국/푸에르토 플라타
포지션 우익수
투타유형 좌투좌타
프로 입단 2008년 11월 25일(국제 아마추어 계약)
소속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2008~2014)
수상경력

마이너리그 올스타(2010,2012)

텍사스 리그 올해의 선수(2012)

개요[원본 편집]

무려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비교되던, 리그 최고의 타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슈퍼탤런트

1992년생의 어린 선수로써, 한때 세인트루이스 타선의 미래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기대를 받던 빅뱃 좌타 유망주였다.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던 마지막 시즌(2014년, 22세)을 기준으로 188cm 91kg의 건장한 체격을 바탕으로 뛰어난 장타력을 뽐냈다. 루키 리그에서부터 AAA까지 고속으로 승격하는 동안 한 단계도 빠짐없이 상대 투수들을 폭격해가며 22살의 나이에 당당하게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유년기[원본 편집]

도미니카 공화국의 푸에르토 플라타 지방에서 태어난 타베라스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흥미를 보이며 야구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타바레스는 겨우 5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부터 스스로를 '엘 페노미노'(한국어로 의역하면 '괴물')라고 칭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툭하면 자신에게 "제가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로 만들어드릴게요. 저는 스타가 되고 싶어요.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구요. 저는 괴물이에요, 언젠가는 최고가 될 거에요!"라며 당돌하기까지 한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타베라스가 이렇게 어릴 적부터 야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데에는,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가까이서 접하며 지켜볼 기회가 많았던 타베라스였기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타베라스는 이후 12살부터 16살 사이에는 몬트리올에서 학교를 다니며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했다. 16살이 되자마자, 타베라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타베라스가 고등학교까지 캐나다에서 다녔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기다린 후에 정식으로 MLB 드래프트를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도미니카로의 귀향은 최대한 빨리 프로 구단과 계약을 하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프로 데뷔와 마이너리그 시절[원본 편집]

타베라스는 2008년 11월 25일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부터 145,000달러를 받고 국제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타베라스를 곧장 루키 리그인 도미니카 서머 리그 카디널스로 배정했다. 프로 전향 이후 첫 해에는 65경기에서 겨우 .265의 타율과 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나,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타베라스의 가능성을 믿고 곧바로 애팔라치안 리그 소속인 루키 리그 구단 존슨 시티 카디널스로 승격시켰다.

존슨 시티로 자리를 옮긴 타베라스는 구단의 기대에 부응하며 곧장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겨우 53경기에서 무려 .322의 타율과 8홈런 43타점을 기록하며 리그를 초토화해버렸다. 타베라스의 엄청난 적응 속도에 놀란 세인트루이스는 그를 곧장 미드웨스트 리그 소속의 싱글 A 구단 쿼드 시티 리버 밴디츠로 또 다시 승격시켰다.

2011년을 리버 밴디츠 소속으로 시작한 타베라스는 이 곳에서 1년을 보내며 실력을 가다듬었다. 5월 11일부터 6월 11일까지 햄스트링 부상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달의 공백따위는 무색하게, 타베라스는 이 해에 무려 33번의 멀티히트 게임과 17번의 3안타 게임, 5번의 4안타 게임을 기록하며 싱글 A 투수들마저 자신의 발 아래에 뒀다. 특히 한 번 흐름을 타면 무섭게 몰아치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미드웨스트 리그 이주의 선수로 선정됐던 7월 셋째주와 8월 넷째주에는 각각 .600의 타율(25타수 15안타)과 .581의 타율(31타수 18안타)를 기록하며 혼자서 '본즈놀이'를 시전하기도 했다. 결국 타베라스는 2011년에 78경기에 출전해서 .386/.444/.584라는 아름다운 타/출/장과 함께 8홈런 62타점을 기록하며 미드웨스트 리그 타격왕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아니다.

하위 리그에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었던 타베라스는 겨우 20살이 된 2012년에 곧장 텍사스 리그 소속의 더블 A 구단 스프링필드 카디널스로 승격하며 초고속으로 마이너리그를 돌파해나갔다. 이때부터 타베라스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으며 엘리트 유망주로써 주목을 끌게 된다. 당장 BA에서는 2012년 시즌에 앞서 발표한 유망주 랭킹에서 타베라스를 세인트루이스 구단 내 #3 유망주(전체 #74)로 선정하며 높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보통의 20세 청년이라면 갑작스레 늘어난 관심에 부담을 느낄만도 했지만, 타베라스에게 '주눅'이라는 말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 타베라스는 2012년에도 더블 A에서 124경기에 출전해 .321의 타율과 23홈런 94타점을 기록하며 '상위 리그? 그거 먹는거야? 우걱우걱'라고 외치는 듯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실제로 투수들을 남김없이 잡아먹었다. 이 해에 타베라스는 장타(67개), 2루타(37개), 총루타(273개), 고의사구(10개)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안타(153개), 타점, 장타율(.572) 부문에서도 2위를 기록하며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심지어 이 해 스프링필드 카디널스는 타베라스의 활약에 힘입어 텍사스 리그 우승까지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결국 타베라스는 겨우 20살 시즌에 더블 A 텍사스 리그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쥐며 본격적으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이제 '거물급 유망주'가 된 타베라스의 이름 뒤에는 어느샌가 '카디널스의 미래'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무려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비교하는 기사들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3년 시즌 시작에 앞서 BA는 타베라스를 세인트루이스 #1 유망주로 선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해에 비해 무려 71계단 전체 #3 유망주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2013년 WBC를 앞둔 캐나다 대표팀에서는 타베라스에게 국가대표팀 승선까지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갑자기 달리진 기대치와 관심도에 놀랄만도 했지만, 타베라스는 이를 오히려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 메이저리그까지 남은 관문은 단 하나, 트리플 A였다. 그리고 타베라스 역시 이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2013년 시즌을 앞두고, 세인트루이스는 타베라스를 퍼시픽 코스트 리그(PCL) 소속의 트리플 A 구단 멤피스 레드버즈로 승격시켰다. 메이저리그를 목전에 둔 타바레스는 이번에도 금새 적응을 마쳤다. 5월 한달에만 47타수 17안타(타율 .362)를 때려내며 트리플 A의 수준 높은 투수들마저 넉다운시켰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잘 나가던 타베라스의 앞에 부상이라는 악재가 닥쳤다. 베이스에 슬라이딩을 하던 와중에 발목이 꺾이며 부상을 당한 것이다. 결국 타베라스는 치료를 위해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며, 이 부상을 당한 이후에는 시즌 내내 겨우 15경기밖에 더 뛰지 못하며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시즌 최종 성적은 .306의 타율과 5홈런 32타점으로 나쁘지 않았다. 프로 데뷔 이후 첫 해를 제외하고 4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정교함을 뽐낸 타베라스는 결국 2013년 시즌 종료 후 BA로부터 '최고의 컨택 툴'을 지닌 타자로 선정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메이저리그 입성[원본 편집]

이렇게 엄청난 기대를 받고 밟는 마이너리그 무대마다 박살내며 올라온 타베라스는 2014년 시즌을 앞두고 메이저리그 승격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침착했다. 부상에 시달린 타베라스가 조금 더 감각을 되찾을때까지 기다리며 차분하게 메이저리그에 올리는 쪽을 선택했다. 타베라스 역시 이러한 구단에 기대에 부응하여 2014년 마이너리그 트리플 A에서 49경기에 출전하는 동안 .325/.373/.524 7홈런 40타점을 기록하며 환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결국 2014년 5월 30일, 세인트루이스는 이제 겨우 22살이 된 타베라스를 메이저리그 무대로 불러들였다. 당시 타베라스의 데뷔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전국구 이벤트'였으며, 실제로 많은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내며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타베라스 역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며 치렀던 샌프란시스코와의 데뷔전에서 상대 투수 유스메이로 페팃을 상대로 자신의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엘 페노미노'가 세인트루이스에 상륙했음을 선언했다. #첫 홈런 영상

하지만 고작 22살의 신인에게 메이저리그 무대의 벽은 아직 높았다. 이후 타베라스는 최고 투수들의 공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9월이 되어서야 뭔가 감을 찾은 모습이 보였으나, 이미 시즌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결국 타베라스는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에 248타석을 소화하는 동안 .239/.278/.312 3홈런 22타점을 기록하며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고, 주로 대타 요원으로 출전하며 포스트시즌에서 7타수 3안타를 기록하는 멋진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NLCS 2차전에서 7회 대타로 나서 결정적인 대타 솔로 홈런을 때려내며 세계 각지의 야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동점 홈런 영상 하지만 2차전을 잡아낸 세인트루이스가 이후 내리 3연패를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했고, 타베라스의 험난했던 2014년 역시 그대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중요한 순간마다 멋진 활약을 펼친 타베라스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컨택이 향상되며 공을 맞춰내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기대해마지 않았다. 빅리그 투수들의 변화구에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푸홀스의 뒤를 잇는 거포가 되어 카디널스의 비상을 이끌거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게 다 장밋빛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넘치는 재능, 충분한 기회, 보장된 미래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란 정말 얄궂은 것이다. 슬픈 일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절망의 늪에 바닥은 없다.

불의의 사고, 날개가 꺾인 홍관조[원본 편집]

2014년 10월 26일, 갑작스레 전해진 끔찍한 소식에 카디널스 팬들은 물론 모든 야구 팬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오스카 타베라스가 교통사고를 당하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해당 기사 이후 보도에 의해, 타베라스가 고향인 도미니카의 푸에르토 플라타에서 여자친구 에딜리오 아르벨로와 드라이브를 즐기던 도중, 그가 몰던 셰보레 카마로가 도로를 벗어나 근처에 있던 나무와 충돌했다고 밝혀졌다. 당시 타베라스는 여러 부위에 부상을 입고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숨졌고, 그의 여자친구 에딜리오 역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사고가 나던 시각은 미국 동부시 기준으로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이었는데, 하필 이 때는 2014년 월드시리즈 5차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당시 소식을 접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회장 윌리엄 드윗은 곧바로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조의를 밝혔다.

"카디널스의 미래를 밝혀주던 젊은 인재의 사망에 우리 구단 식구들은 모두 깊은 충격에 빠져있다. 타베라스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멋진 청년이었으며, 그가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떴다는 사실에 슬픔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사고로 인해 그 누구보다 상심하고 있을 그의 친지,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존 모젤리악 당시 다음과 같은 성명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전달했다.

"믿을 수가 없다. 나는 타베라스가 16살일때부터 옆에서 지켜봐왔던 사람으로써, 그가 얼마나 멋진 청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축복받은 재능과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세인트루이스의 감독 마이크 매서니와 MLB 사무국장 버드 셀릭 역시 각자 성명을 발표하며 타베라스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자 멋진 인간이었는지 강조하며 애도를 표했다.

추모 물결[원본 편집]

타베라스의 사망 사고가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캔자스시티에서 치러진 2014년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캔자스시티의 홈 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공식적으로 타베라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영상 당시 캔자스시티의 선발 투수로 나선 요다노 벤추라는 같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동포로써 타베라스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며 그의 모자챙에 'R.I.P O.T #18'이라는 문구를 새겨넣기도 했다. 같은 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 구장 부시 스타디움에서는 타베라스가 수비하던 우익수 자리의 조명만 켜둔 채 그를 추모하는 아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트위터 사진

이후 타베라스의 고향 마을인 소쉬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무려 5,000명의 사람이 운집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에 '엘 페노미노'라는 문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팀 동료 카를로스 마르티네즈는 타베라스를 두고 "타베라스는 이 지역에서 슈퍼맨 취급을 받던 친구였죠. 이 동네 아이들은 그를 영웅처럼 우러러봤죠. 이 지역의 희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마르티네즈는 타베라스의 뜻을 이어 야구를 하겠다며 자신의 등번호를 44번에서 타베라스의 등번호였던 18번으로 바꾸겠다고 구단에 요청했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마르티네즈는 세인트루이스의 에이스로 등극한 지금까지도 18번을 달고 뛰고 있다.

여담 및 마이너리그 시절 평가[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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