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염종석

== 개요 =={| class="wikitable" align="center"|| 파일:/api/File/Real/59b4a6f2a3ac740a536ecade||-| 이름| 염종석 (廉鍾錫)|-| 생년월일| 1973년 3월 20일|-|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키/몸무게| 192cm/98kg|-| 출신| 부산광역시|-| 학력| 부산중앙초-초량중-부산고|-| 프로입단| 1992년 롯데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1992~2008)|} 파일:/api/File/Real/59b4a8eda3ac740a536ecb0c롯데의 안경 에이스 2호기롯데 자이언츠의 前 선수이자 코치. 前 SPOTV 해설위원. 現 오꾸닭 양산 증산점 점주님.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두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이자 롯데판 불사조.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으며 초반 2년 이후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투수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평균 이상의 투구내용을 보여주었다.또한 안경 에이스로도 유명하다. 1984년 최동원과 함께 '롯데는 안경 에이스가 있어야 우승한다'는 징크스의 주인공이다. 이후 이상화가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현재는 kt에서 이적한 박세웅이 새로운 안경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수 경력 ==부산고 시절 후배 손민한, 주형광과 함께 부산고를 이끌어나갔다. 이후 고려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고교 졸업 직전 모친이 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급전이 필요해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되었다. 계약금 1,500만원에 연봉 1,000만원. 동기인 경남상고 곽재성에 비해 적은 계약금을 받고 들어왔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시범경기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충격과 공포의 '92시즌 ===[프로야구 기록추적 <6> 1992년 염종석 '불꽃을 태우다']1992년 개막 2연전부터 선발자리를 얻은 염종석은 첫 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되었으나 두번째 등판이었던 4월 11일 LG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며 화려한 92년의 서막을 열었다. 김시진과 박동희의 공백을 잘 메운 염종석은 5월 1일 태평양전에서는 완봉승을 기록했고 데뷔 후 첫 9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기록하는(완봉 2회) 엄청난 투구를 펼쳤다. 선발 22경기 중 13번의 완투, 그리고 완투한 경기는 모조리 승리했다. 구원등판한 13경기에서도 2승 6세이브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파일:/api/File/Real/59b4ab60a3ac740a536ecb3b당시 선동열을 이길 유일한 슬라이더라고 평가받은 염종석의 슬라이더는 타자들이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고 그는 데뷔 첫 해부터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15승을 기록할 때까지 이강철과 다승 선두였던 염종석은 송진우(19승), 이강철(18승)에 이어 다승 3위를 기록했고 선동열의 9년 연속 방어율왕 타이틀을 저지하며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2.33). 고졸 신인이었지만 완투 3위(13완투), 이닝 4위(204.2이닝)를 기록했고 선발등판 당 115구를 던졌다.포스트시즌에서도 이 기세는 이어져 준플레이오프 1차전 완봉승, 플레이오프 1차전 3이닝 구원승, 4차전 완봉승, 5차전 3이닝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러나 염종석은 플레이오프 5차전 투구 도중 팔꿈치에 통증을 느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 구원등판한 염종석은 4차전 선발로 나섰지만 '부모님이 주신 장어를 먹고 탈이 나' 6회를 겨우겨우 소화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러나 사실 이는 팔꿈치 통증 때문이었고 이후 염종석은 92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의 선수 시절 ===염종석은 92시즌이 끝나고 지리한 연봉협상 끝에 당시 역대 프로야구 최고 연봉인상률을 기록하며 뒤늦게 계약했다. 하지만 동계훈련 부족과 전년도의 무지막지한 혹사, 그리고 역대급 물타선으로 인해 전반기 단 3승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후반기 전열을 가다듬으며 7승을 추가하며 10승 10패 3.41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이것이 염종석이 기록한 마지막 10승이었다.파일:/api/File/Real/59b4b274a3ac740a536ecbe71994년 방위복무를 시작했지만 휴식없이 꾸준히 등판했고 (94년 14경기 102.1이닝, 95년 18경기 127이닝) 결국 어느 정도 92년의 구위를 회복했던 95년 팔꿈치 통증으로 페넌트레이스를 조기마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롯데 김용희 감독은 포스트시즌에 염종석을 등판시켰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승을 거두며 활약했지만 6차전 통증 재발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 투구영상1996년을 팔꿈치 수술 재활로 날린 염종석은 1997, 1998년 복귀했다. 구위도 떨어졌고 두 해 승률은 좋지 않았지만 평균 이상의 투구내용으로 꾸준히 로테이션을 소화해주며 신인들의 부상공백을 잘 메웠다. 1999년 타고투저 속에서도 평균자책점 3.31(80이닝 이상 선수 중 7위)로 호투했지만 다시 팔꿈치 부상이 재발했고, 그 와중에도 9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구원등판했지만 패전투수가 되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1차전 투구영상파일:/api/File/Real/59b4b6faa3ac740a536ecc5f염종석의 수술자국1999년 팔꿈치 수술 후 돌아온 염종석은 이른바 '5이닝짜리 선발'이 되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동안 매년 20경기 이상 선발등판했지만 2002년과 2006년을 제외하면 규정이닝을 채운 적이 없었다. 2007년에는 시즌 초 디셉션과 슬로우커브를 앞세워 부활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체력적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2008년 구원투수로 1패 3홀드 3.65를 기록한 염종석은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선수로 풀렸다. 100승에 7승을 남겨놓고 100승 도전을 위해 타 팀 이적도 고려했으나 롯데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4월 5일 히어로즈전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 이후 ===== 지도자 경력 ===파일:/api/File/Real/59b4b741a3ac740a536ecc76세웅아 임마 이기고 싶나? 그럼 완투를 해라!파일:/api/File/Real/59b4b780a3ac740a536ecc81왜 바꿉니꺼?은퇴 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후 2010년 퓨처스 재활코치를 시작으로 2014년까지 퓨처스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2015년에는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퓨처스 시절에는 유망주 육성 실패, 1군 코치 때는 역대급 불펜방화의 주범으로 팬들에게 낙인찍혔다. 결국 2015년 전반기 종료 후 주형광 코치와 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구단에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파일:/api/File/Real/59b4b8aaa3ac740a536ecca7이 불펜으로 8위나 했다는게 실화?투수코치로서는 평가가 좋지 않지만 딱 하나 그의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박세웅이다. 트레이드 이후 박세웅의 마른 체격과 자신없는 모습을 보고는 휴식과 함께 벌크업을 주문했고 매일같이 밤에 야식을 먹도록 지시했다. 마운드에서나 그라운드에서 무조건 자신감 있는 모습을 요구하며 이른바 '흑세웅' 모드로 돌아서게 만들었다.파일:/api/File/Real/59b4ba22a3ac740a536eccd9이러한 노력이 염종석이 있던 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후 박세웅이 성장하며 리그 에이스급 피칭을 보여주자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었다.=== 해설위원과 그 이후 ===파일:/api/File/Real/59b4baf1a3ac740a536eccf22016년 SPOTV에서 해설위원으로 데뷔했다. 롯데 팬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타 팀 팬들에게는 편파해설, 사투리 등으로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타 팀 경기에서 뜬금없이 박세웅을 소환하기도 했다. 사실상 자이언츠TV 해설위원 2016년이 끝나고 해설위원직에서 물러난 후 현재는 오꾸닭 양산 증산점 점주이자 미국에서 야구 연수를 하고 있다.== 투구 스타일 ==파일:/api/File/Real/59b4bc22a3ac740a536ecd19199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장종훈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슬라이더'염슬라'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1995년 팔꿈치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최고구속 145km/h의 빠른 볼, 그리고 130km/h대의 슬라이더를 통해 타자를 요리하며 '선동열의 뒤를 이을 슬라이더'라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