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손민한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에서 뛰었던 투수 손민한에 대한 문서[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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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순회 코치
이름 손민한 (孫敏漢')

'Son Min-Han

생년월일 1975년 1월 2일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키/몸무게 179cm/85kg
출신 부산광역시''''
학력 대연초-대천중-부산고-고려대
프로입단 1997년 롯데 1차지명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1997~2011)'

NC 다이노스(2013~2015)


민한信

엔전드 횡...읍읍 마에삼

前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출신의 투수. 8888577 시절 고통받던 롯데 자이언츠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에이스였으나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NC 다이노스에서는 1군 진입 초기 얕은 투수진에서 기둥이 되어준 선수였다. 현재는 '손민한과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내 유소년 야구 보급과 생활야구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마추어 시절[원본 편집]

야구를 시작할 때는 포수로 시작했으나 유격수를 거쳐 고교 진학 후 투수로 전향했다. 부산고 시절 선배인 염종석, 후배인 주형광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고3 때 부상으로 주춤했지만 팀의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이끌었고, 배터리를 맞춘 진갑용과 함께 고려대로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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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 후에는 1년 선배 조성민을 받쳐주며 1학년 때부터 팀의 중심투수로 활약했고 팀의 백호기와 대통령배 3연패를 이끌었다.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는 국가대표로도 뽑혔다1 . 손민한과 진갑용을 두고 1차지명을 고민하던 롯데는 결국 손민한을 1차지명에서 뽑았고 손민한은 계약금 5억원을 받고 롯데에 입단한다.

프로 시절[원본 편집]

롯데 자이언츠(1997~2011)[원본 편집]

1997~1999년[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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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안고 1997년 데뷔 첫 해부터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었지만 첫 등판부터 끝내기 폭투를 기록하는 등 9경기(4선발)에서 1승 3패 1세이브 ERA 4.80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6월 전력에서 이탈한 뒤 그해 10월 어깨 수술을 받고 1998년을 재활로 보냈다. 1999년 부상에서 돌아와 10경기에 등판한 손민한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포함되어 롯데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패전투수가 되었다.

2000~2004년[원본 편집]

부상에서 돌아온 손민한은 그 위용을 되찾기 시작했다. 4월 30일 삼성전 완투승, 5월 21일 해태전 무사사구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손민한은 2000년 부활을 알렸다. 감독 추천으로 데뷔 첫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등 시즌 28경기에 등판해 174.1이닝 12승 7패 3.20을 기록했다. 이 활약으로 이른바 '야구 드림팀 3기'로 불린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승선하는데 성공했다. 올림픽 동메달 획득으로 손민한은 군 입대를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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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다승 선두권에서 경쟁을 펼쳤고 박정태의 부진과 김명성 감독의 사망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최하위를 기록한 팀 상황에서도 15승 6패 4.21을 기록하며 신윤호(LG)와 함께 공동 다승왕에 등극했다. 2002년에는 동료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3.6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염종석과 함께 팀의 마운드를 지켰다. 2003년에는 8월까지 1승 9패만을 기록하는 등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3승 11패 4.86으로 사실상의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다.

이후 FA 이상목의 입단으로 마무리로 돌아선 2004년, 손민한은 태업 논란까지 불거지는 등 롯데의 시즌 최다 무승부 기록의 주범이 되었다. 6월 3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세이브까지 1아웃을 남겨놓고 2루수 박진환의 어이없는 수비로 동점을 내주는 등 불운한 상황까지 더해졌다. 전반기를 1승 1패 9세이브로 마감한 손민한은 전반기 막판 노장진의 영입으로 인해 선발로 복귀했고 22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는 등 후반기 8승 1패를 거두며 에이스의 귀환을 알렸다.

2005년, MVP 시즌[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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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 수상의 순간

6월 15일 마산 두산전 투구영상. 7이닝 6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며 팀의 9연패를 끊었다.

명실상부한 커리어하이 시즌

전년도 후반기의 활약으로 부활을 예고한 손민한은 2005년 폭발했다. 4월 17일 두산전부터 5월 22일 KIA전까지는 7경기 연속 선발승을 기록했다. 팀이 9연패에 빠져있던 순간, 꼴찌로 추락할 위기에 놓였던 순간에서도 승리투수가 되며 그야말로 에이스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에서는 이용훈의 끝내기 폭투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황에서 이틀 연속 구원투수로 등판해 구원승과 세이브를 올렸다. 손민한은 전반기를 14승 3패 1세이브 2.53으로 마무리했고 데뷔 첫 올스타전 베스트10에 뽑혔다.

후반기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20승을 위해 무리한 것, 그리고 4년만에 150이닝 이상을 던진 상황으로 인해 체력적 부담이 왔고 결국 18승을 거둔 뒤 시즌을 조기에 종료했다. 시즌 성적은 18승 7패 1세이브 2.46. 다승, 평균자책점 2관왕에 올랐다. 이 활약으로 당시 팀 창단 이후 최고 연봉인 4억원을 받게 되었다.2

압도적 다관왕이 없었던 점, 주요 후보들이 전부 4강 탈락팀이라는 배경 속에 손민한은 꼴찌 탈출의 활약을 인정받아 2005년 페넌트레이스 MVP가 되었다. 롯데 소속으로는 1984년 최동원 이후 두번째, 그리고 1985년 김성한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탈락팀에서 나온 MVP가 되었다.

참고로 8월에는 번트와 도루에 대해 "비겁하다고 생각한다"고 인터뷰했다가 과거 팀 선배였던 전준호와 설전이 펼쳐질 뻔 했다. 다행히 손민한이 빠르게 사과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한 기사

2006~2008년[원본 편집]

2006 WBC 미국전에서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삼진으로 잡는 순간. 마! 에이로드 삼구삼진 잡아봤나!

2006년 1회 WBC에 출전하여 비록 준결승전에서는 아쉬운 투구를 했지만 2라운드 미국전에서는 호투를 펼치며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맹장 수술로 시즌을 늦게 출발한 손민한은 여전한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 11일 두산전에서는 팀의 6연패를 끊는 1대0 완봉승을 달성했고 문동환 vs 롯데 짤만 유명한 5월 20일 삼성전에서는 마무리로 등판해 위기를 넘기며 또 다시 6연패 탈출의 1등공신이 되었다. 시즌 성적은 10승 8패 1세이브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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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ㅠㅠ

2007년에도 13승을 기록하며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준 손민한은 FA를 앞두고 2008년 또 다시 폭발하는 듯 했다. 5월까지 7연승, 11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투구)를 기록하며 다승 선두로 치고 나갔다.5월 13일 삼성전 12탈삼진 경기

그러나 6월 7일 SK전에서 김광현과의 완투대결에서 패배한 이후 부진이 찾아왔고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끝자락에 송승준으로 교체되었다. 12승 4패 2.97을 기록하며 여전히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179.2이닝을 소화하며 팀의 가을야구 진출에 큰 공헌을 했지만 준플레이오프 선발 등판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종된 2009 WBC[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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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이때는 선수단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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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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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코 파크에서 팝콘을 튀기며 선수단 복지 향상에 여념이 없었던 캡틴 손

2008년의 활약으로 손민한은 2회 WBC에서도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주장까지 맡으며 활약을 예고했지만 본 경기에서 단 한 차례의 등판도 하지 못했다.인터넷 상에서는 손민한이 실종되었다는 우스개소리까지 떠돌았다. 당시 손민한 실종에 대한 드립들

실은 전년도 FA 계약을 위해 무리한 후유증이 왔고 대회 시작까지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하면서 코칭스태프가 등판을 꺼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2회 WBC는 손민한이 마지막으로 뽑힌 국가대표였다.

2009~2011년[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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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호야, 살살 던져 임마 손선배 기죽잖아! 선배에 대한 예우가 없어 이 짜식이!

WBC에서 돌아온 후에도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등판하지 못한 손민한은 6월 7일 두산전에 복귀하여 시속 144km의 속구를 꽂으며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제 모습을 찾는 듯 했다. 6월 26일 한화전에서는 통산 100승째를 기록했고 이후로도 많은 이닝은 소화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5이닝씩은 버텨주며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8월 3일 두산전 3이닝 5실점 이후 두 경기에서 7.2이닝 12실점을 기록하며 부진에 빠졌고 결국 8월 27일 삼성전에서 2.1이닝 투구 후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이것이 손민한이 롯데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정규시즌 경기가 되었다.

2009년 10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은 손민한은 2010년 복귀 예정이었으나 통증 재발로 결국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2011년에는 시범경기에 등판하여 2008년 수준의 제구와 구속을 보여주며 팬들을 기대하게 했으나 어깨 통증 재발로 다시 재활에 들어갔고 결국 2011년에도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이 시기 손민한은 FA 계약 후 3년 동안 활약이 없었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으며 선수협 초상권 비리의 중심이라는 의혹까지 받았다. 2011시즌이 끝나고 롯데 구단측에서는 코칭스태프 제안을 했으나 현역에 대한 열망을 보였고 결국 2011년 말 자유계약선수로 풀리게 되었다.

이후 비리와 배임 혐의로 새 선수협 집행부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 신생팀 NC 다이노스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싸늘한 여론 때문에 입단이 흐지부지되었다. 고소건은 선수협 측에서 고소를 취하했고 검찰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NC 다이노스(2013~2015)[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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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현역 복귀를 시도한 손민한은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박재홍 선수협 회장으로부터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박재홍이 용서를 하고 본인의 은퇴 기자회견에 손민한을 불러 공개사과를 하게 했다. 이후 선수협 측에서도 손민한의 현역 복귀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함에 따라 손민한은 현역 복귀의 길이 열렸다. 결국 손민한은 2013년 4월 NC 다이노스와 연봉 5,000만원에 육성선수 계약을 하게 된다.

6월 5일 박경완과의 대결로 화제를 모았던 첫 등판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후 선발에서 외국인 투수 찰리, 해커(당시 에릭)와 함께 주축이 되었다. 이후 체력적 문제로 구원투수로 등판하면서 이민호와 김진성의 난조로 비어있던 마무리 자리를 채우며 복귀 첫 해부터 신생팀 NC의 토종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복귀 시즌 성적은 5승 6패 9세이브 3홀드3 3.4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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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완전한 구원투수로 전업하며 개인 최다인 52경기(1선발)에 등판했다. 김진성, 임창민과 함께 NC의 필승조로 자리매김하며 팀이 1군 진입 2년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돼주었다.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4경기에 모두 등판하여 3이닝 무실점 1홀드를 기록했다.

2015년에는 다시 선발투수로 돌아왔다. 롯데팬들 환장하는 손민한 vs 장원준 매치업이 첫 경기부터 펼쳐졌고 아쉽게 패전투수가 되었으나 이후 노련함을 앞세워 호투를 이어나갔다. 5월 28일 통산 7,000타자 상대, 6월 18일 통산 1,700이닝, 6월 24일 통산 120승을 달성하며 개인 기록들을 작성해나갔다. 후반기 잠시 부진에 빠졌지만 9월 11일 넥센전에서 5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40대 최초, 그리고 역대 최고령 시즌 10승 투수가 되었다.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그해 최동원상 수상자 유희관을 꺾고 데뷔 첫 포스트시즌 선발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현역 은퇴 이후[원본 편집]

시즌이 끝난 2015년 11월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은퇴식은 2016년 7월 6일에 친정팀인 롯데전에서 거행되었다. 같이 은퇴한 박명환, 이혜천과 함께 초대 NC HONORS CLUB의 멤버가 되었다. 아너스 클럽 가입식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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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NC 다이노스 순회코치를 맡으며 '손민한과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유소년 야구 발전, 그리고 생활 야구 보급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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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스타일[원본 편집]

'완급조절'의 진수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경기 초반이나 주자가 없을 때는 설렁설렁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석구석으로 꽂아넣었고 위기상황이 찾아오면 바로 구속을 3~4km/h 끌어올려서 삼진이나 범타를 유도하는 유형이었다. 제구력도 수준급이어서 낮게 깔려오는 공이 일품이었고 아마추어 시절부터 명성을 떨친 슬라이더, 그리고 손민한을 MVP로 만들어준 체인지업(포크볼) 등의 구종도 리그 상위권이었다. 특히 체인지업은 조정훈이 그 그립을 보고 배워 본인의 포크볼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일:/api/File/Real/59b4a46fa3ac740a536eca8c 슬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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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업(포크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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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후반에는 투심으로 재미를 많이 봤다.

기타[원본 편집]

  • 대표적인 별명은 '민한신'이다. 원래는 '손민한이 등판하는 경기를 믿을만 하다'는 뜻의 민한'信'이었으나 2005년 대활약, 그리고 인터넷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한'神'이 되었다. 실제로 2004~2008년의 활약상은 神이라 불리기 모자람이 없었다.
  • 이 외에도 '손팝콘'(2009 WBC 이후), '횡령갑'(배임 혐의로 고소된 후. 이후 무혐의 처분) 등의 비하적 별명이 있다.
  • 펠릭스 호세의 끝내기 3점 홈런으로 유명한 1999년 플레이오프 5차전 승리투수였다. 이후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 롯데는 포스트시즌에서 홈경기 11연패를 기록했다.
  • 2009년 선수협 회장으로 취임했다. 선수협의 노조화를 시도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사무총장의 초상권 비리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오명을 쓰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 수비를 잘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고교 저학년 시절까지 포수와 유격수를 맡았고 운동신경이 좋아 번트 타구 처리, 강습 타구 수비에 모두 자신감을 가졌다. 정규시즌 중에도 연습 때 가끔 내야 펑고를 받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백인천 감독 재임시절 포수 전향설이라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