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구멍 뚫린 위장과 소화 실험

실험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나?[원본 편집]

 1822년 6월 6일 정오,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매키낵 요새는 윌리엄 보몬트(William Beaumont, 1785.11.21 ~ 1853.4.25)와 알렉시스 생마르탱(Alexis Bidagan St. Martin, 1802.4.18 ~ 1880.6.24)의 끈질긴 악연의 시작이었다. 그곳에서 발사된 한발의 산탄이 생마르탱의 배에 명중했고 군의관이었던 보몬트는 그를 치료했다. 그의 치료 덕분인지 생마르탱은 살아 남았다. 왼쪽 가슴에 아기 손보다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빼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까지만 있었더라면 훈훈한 이야기가 되었을 테지만...

실험과정 및 결과[원본 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마르탱은 본의 아니게 뚫린 구멍 때문에 걸어 다니는 위장이 되었다! 그의 구멍을 막는 데는 많은 붕대가 필요했지만, 나중에는 피부에서 생겨난 혹이 구멍을 막아주었다. 이를테면 가스 밸브처럼 손으로 여닫는 게 가능해졌다. 사이보그 이 '말하는 소화기관'은 그 후 십몇 년 동안 보몬트에게 끌려다니며 훌륭한 실험 교재로써 활동(?)했다.
 최초의 소화실험은 1825년 8월 1일 정오에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구멍에 음식물을 넣어주는 방법을 썼고, 그 방법을 발견하기 전엔 (음식물을 입에 넣어봤자 구멍으로 다 쏟아져 나왔으므로) 항문으로 영양분을 공급해서 그를 살려냈다. 무려 17일간(!) 항문으로(...) 
 그 진정한 실험이자 악몽은 명주실에 꿴 '양념을 진하게 한 쇠고기 한 조각, 소금에 절인 날돼지고기 한 조각, 오래된 빵 한 조각, 익히지 않은 배추 한쪽'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간격으로 이를 빼내어 소화과정을 관찰, 기록했다.
두 번째 실험에선 더 본격적으로 호스를 이용해 위액을 바깥으로 빼내어 쇠고기가 담긴 그릇으로 흘려보냈다. 또 구멍으로 술을 들이붓는 엽기적인 실험이 계속 행해지자 생마르탱은 1825년 9월 급기야 캐나다로 도주해버렸다. 하지만 보몬트는 그를 수소문한 끝에 그를 찾아내 1829년에는 1년에 150달러와 숙식 제공이라는 조건하에 그를 데리고 왔다. 돈에는 장사 없다. 그는 더 심한 실험을 생각해내어 그에게 폭식을 시키고 20분 뒤에 음식물을 꺼내보거나 다양한 음식의 소화 시간을 재고 감정이나 날씨가 소화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등 실로 다이내믹한 실험을 하였다. 결국 1834년 생마르탱은 가족을 만나러 간다며 캐나다 남부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보몬트가 생마르탱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이 스토커의 의학실험은 끝이 났다. 무려 238번의 실험이 행해진 뒤였다.
 보몬트에게 생마르탱은 그저 실험용 쥐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위액과 소화생리학에 관한 실험과 관찰」의 서문에서 그를 도와준 다른 의사들에게는 감사를 표했지만 생마르탱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다.

실험 이후[원본 편집]

 보몬트는 이 실험으로 인해 의학 분야의 고전인 「위액과 소화생리학에 관한 실험과 관찰」(1833)을 쓸 수 있었고 의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것임은 틀림없다. 다만 방법이 너무 엽기적이고 잔인해서 다른 방면으로도 유명한 의사가 된 것도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