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강병철

前 야구선수 겸 야구 지도자. 현역시절 명 3루수였고 프로 감독으로 900승을 달성한 감독이었다.[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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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병철 (姜秉哲)
생년월일 1946년 8월 21일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출신 경상남도 김해시
학력 부산상고-우석대

소속팀

(선수)

크라운맥주(1965)

'한일은행(1966, 1970~1977)1'

해병대(1966~1969)

지도자 경력

동아대학교 감독(1977~1982) 롯데 자이언츠 작전코치(1983) 롯데자이언츠 감독

(19832 ~1986, 1991~1993, 2006~2007)

빙그레 이글스 수석코치(1988~1990)

한화 이글스 감독(1994~19983 )

SK 와이번스 감독(2000~2002)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2008)

== 1. 소개 ==

"꼴데를 2번 우승시켰다는 건 해태의 20번과 같고 뉴욕양키스의 200번과 같습니다." - 모 구단 관계자

前 야구선수 겸 야구 지도자.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명 3루수이자 우승 두번 밖에 없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두번이나 우승을 이끈 지도자. 그리고 선수 육성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투수 혹사라는 부정할 수 없는 실책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강병철 편

아마추어 시절[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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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상고 재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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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上 김응용 / 下 강병철)

1973년

실업야구 시절 최고의 실력과 인기를 구가하던 3루수였다. 일례로 당시 금융단과 실업단이 나뉘어서 펼쳐지던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1967년부터 은퇴시즌인 1977년까지 매년 올스타에 뽑혔다. 국가대표 3루수 자리도 역시나 강병철의 몫이었다. 당시 우용득, 허구연, 이후 김용철과 함께 이룬 한일은행의 내야진은 리그 최강으로 꼽혔다. 또한 실업야구 최초로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낸 선수이기도 하다. 1970년 강병철이 기록한 10홈런은 이후 1976년 박해종이 13홈런으로 깨기 전까지 실업야구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실업야구 700호 홈런의 주인공 역시 강병철이었다(1972년). 1970년에는 리그 MVP를 수상했고 1975년에는 실업야구 10년 올스타 19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부산상고 후배 김용철에게 3루수를 물려주고 1루수로 전향한 강병철은 1977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현역 통산 타율은 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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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감독 시절

이후 동아대 감독으로 부임한 강병철은 1981년 3관왕, 1982년 2관왕 등 부임기간 동안 총 10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학교와의 의리로 프로 진출을 미뤘던 강병철은 1983년을 앞두고 김응용 감독의 해태 부임 제안을 고사, 고향팀 롯데의 코치로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프로 지도자 시절[원본 편집]

만만디

혹사대마왕

롯데 자이언츠 1기(1983~1986)[원본 편집]

처음에 선수단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나보고 1, 3, 5, 7차전을 준비하라고 하더라. "이거 너무 무리 아입니까?" 하고 강병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곰곰이 생각하시다 뭐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말인지 알겠는가?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하시는거다. 그래서 두말할 것도 없이 감독님께 "네 알겠심더. 함 해보입시더" 라고 대답하고는 바로 출전 준비를 했다.

- 故 최동원(2006년 스포츠2.0과의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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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강병철

1983년 전반기 종료 후 박영길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해임되자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으로 승격되었다. 감독대행으로 무난하게 후기리그를 운영하고 83시즌 종료 후 정식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가 만 38세로 1986년 허구연(당시 35세)에 이어 역대 2번째로 어린 정식감독이었다.

정식 감독 부임 첫 해인 1984년에는 27승을 거둔 에이스 최동원을 앞세워 후기리그를 우승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그 유명한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로 대표되는 최동원의 5경기 등판, 4경기 선발이라는 엄청난 혹사로 굴렸다. 타선에서는 시즌 내내 부진했지만 끝까지 믿었던 유두열이 믿음에 보답하며 결국 4승 3패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역대 최연소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었다.

이후 1985년에는 전/후기리그 2위를 차지하며 무난하게 팀을 이끌었고, 1986년에도 후기리그에서 추락하긴 했지만 타선의 부진에도 5할 가까운 승률을 올리며 재계약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이희수 코치의 거취문제와 허구연 코치의 영입문제로 구단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른바 '애들 까자값(혹은 껌값) 사건'4 으로 인해 결국 롯데 유니폼을 벗게 된다.

==[원본 편집]

3.2. 빙그레 이글스 수석코치(1988~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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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OB 2군 인스트럭터 등을 하며 1987년을 보낸 강병철은 한일은행 시절 '아버지'로 부르며 따랐던 김영덕 감독의 요청으로 빙그레 수석 겸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이때 장종훈을 풀타임 주전으로 천거하는 등의 활약을 했으나 빙그레 파벌 싸움에 의도치 않게 휘말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이 터지며 1990년 사퇴한다.

롯데 자이언츠 2기(1991~1993)[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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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축하연에서(사진 오른쪽)

강병철 감독 커리어의 최전성기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으로 돌아온 강병철 감독은 롯데 역사에 길이 남을 소총부대를 완성한다. 기존 장효조와 김민호, 김응국과 신인 전준호와 박정태 등을 앞세워 공격적인 야구를 추구한 롯데는 프로야구 최초로 100만 홈관중을 돌파하며 7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다.

1992년에는 남두오성(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이 모두 3할 타율을 기록하고 공필성, 한영준, 조성옥 등의 선수들이 뒤를 받쳐주었다. 또한 에이스 윤학길과 '슈퍼 베이비' 박동희, 혜성처럼 떠오른 신인 염종석을 앞세운 마운드 역시 견고했다.

시즌 막판까지 해태와 2위 싸움을 벌이며 3위를 차지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염종석, 박동희 단 두명의 투수만을 투입하여 삼성을 꺾었다.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도 해태를 3승 2패로 누른 롯데의 한국시리즈 상대는 강병철이 코치로 있던 빙그레. 강병철은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단 4명의 투수(박동희, 윤학길, 염종석, 윤형배)만을 투입하면서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1993년에는 염종석의 부진과 박정태의 부상, 팀 타선의 추락으로 인해 6위에 그쳤다. 강병철 감독은 시즌 중반부터 이어진 끝없는 추파에 결국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한화 이글스 감독(1994~1998)[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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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올스타전에서 해임된 날이다 표정이 너무 어두운 감독니뮤ㅠㅠ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은 냉정히 말해 강병철의 커리어가 꺾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는 이미 노쇠화된 팀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본인의 실책 역시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우선 베테랑을 지나치게 홀대했다. 빙그레 시절 주역이었던 이상군, 이강돈, 강정길 등의 선수가 이 시기에 은퇴했고 부임 초기부터 트레이드 대상에 올리며 갈등을 빚은 이정훈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된다. 이로 인해 팀 케미스트리가 붕괴되는 지경을 초래했다. 그리고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구대성으로 대표되는 투수 혹사도 여전했다. 결국 한화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6년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 등의 신예를 앞세워 0.560의 승률로5 반 경기차 3위를 거두기도 했지만 다음해 다시 내려앉았고, 1998년에는 송진우와 정민철의 동반 부진이 치명타가 되면서 결국 1998년 올스타 브레이크에 경질되었다. 감독대행이자 후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강병철이 롯데에서 옷을 벗게 만든 이희수 코치였다.

SK 와이번스 감독(2000~2002)[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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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단을 물려받은 SK 와이번스의 창단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첫 시즌 종료 후 김성래 등 노장선수들을 정리하고 인천의 상징 김경기의 출장시간을 줄였다. 대신 이진영, 이호준, 채종범 등의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꾸려나갔다. 2002년에는 삼성과의 6대2 트레이드를 통해 팀 체질개선을 꾀했고 채병용, 제춘모 등 '신4룡'을 앞세웠다. 그러나 뒷심부족으로 6위에 머물렀고 결국 시즌 종료 후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사퇴하게 된다.

SK 시절에는 창단팀을 맡아 팀의 기둥을 만들었다는 긍정적인 면과 이승호, 에르난데스의 엄청난 혹사, 그리고 김경기와 최태원을 끌어안지 않는 등 역시나 노장선수를 홀대했다는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롯데 자이언츠 3기 /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2006~2008)[원본 편집]

파일:/api/File/Real/597628e051153dd53e3d09cb 정수근 저놈 저거... 승화야 성용아 번트대자~

파일:/api/File/Real/59762b6d51153dd53e3d09d2 강병철 3기 알파이자 오메가

야인생활을 하던 강병철 감독은 2006년 세번째로 롯데 감독에 부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세번째 만남은 롯데 팬들에게나 강병철 본인에게나 상처만을 안겨준 시기였다. 노장진의 무단이탈로 시작한 그의 임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수근과 손민한의 사실상 항명, 잘나가던 박현승과 이승화의 부상, 한화전 연패 등등. 결국 우승을 위해 데려왔던 강병철 감독의 결과는 2년 연속 7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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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성애자, 양아들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특정 선수 기용 등의 상황에 팬들은 분노했고 결국 플래카드까지 구장에 걸리게 된다. 그 유명한 '꼴데팬이라고 놀림받는 것도 지겹다'도 이 시기에 나온 문구이다. 결국 2007년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지 못했고, 2008년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을 끝으로 강병철의 프로 커리어는 끝나게 된다.

운영 스타일[원본 편집]

만만디[원본 편집]

그의 별명이자 그의 스타일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절친한 김응용 감독에게서 받은 영향이지만 두 감독은 다르다. 김응용 감독은 '페넌트레이스 우승 못하면 그냥 가을야구 하지 뭐'하는 스타일, 반면 강병철 감독은 '페넌트레이스에서 힘 빼지 말고 포스트시즌에서나 잘하자'는 스타일이다. 이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 1992년. 롯데는 상위 3팀(빙그레, 해태, 삼성)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며 관리하고 나머지 팀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며 페넌트레이스를 3위로 마감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염종석과 박동희를 앞세워 몰아붙이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한국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유두열을 7차전에서 5번타자로 배치한 일화나 감독 말년 롤러코스터를 타던 장원준을 시즌 내내 선발로 고정시킨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번 낙점한 선수는 조급하게 바꾸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아래의 항목과 더불어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육성 전문가[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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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병철이 재평가되는 요인

강병철 감독은 예전부터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었다. 롯데 초기에는 권두조, 김정수, 심재원 등의 노장을 쳐내고 대신 조성옥, 한영준, 한문연 등의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고 2기 때는 박정태, 전준호, 이종운, 공필성 등의 선수들을 중용했다. 감독생활 말년에는 양아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가면서 장원준, 김주찬, 강민호, 이인구, 정보명 등을 꾸준히 기용했고 이 선수들은 2000년대 후반 롯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외에도 한화 시절에는 박지상, 송지만, 이영우, 임수민, 백재호 등을 밀어주었고, SK 감독 부임기에는 이진영을 '강진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믿어주고 이호준을 거포로 개조시켰다. 이렇듯 강병철 감독은 리빌딩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지도자였다.

혹사대마왕[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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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의 평가를 깎아먹는 가장 큰 요인

우승도 두 번 했고, 3개 구단을 거치며 프로 통산 900승까지 한 강병철 감독이 아직까지도 저평가받는 것은 바로 투수 혹사 때문이다. 물론 최동원을 굴리지 않은 감독이 없었고 구대성을 굴리지 않는 감독 역시 없었으나 강병철은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최동원은 프로 입단 당시 이미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박영길 감독이 나름대로 관리해가며 구위를 회복한 최동원을 강병철 감독은 1984년 내내 무자비하게 굴렸다. 페넌트레이스 100경기 중 51경기 등판, 284.2이닝 소화.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 등판, 4경기 선발. 결국 지친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종료 후 코피를 쏟아내기도 했다.

이런 혹사는 9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992년 염종석은 고졸 신인임에도 포스트시즌까지 합쳐 235.1이닝을 소화했고 이듬해 10승을 끝으로 두번 다시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 못한다. 한화 시절 구대성은 1995년부터 풀타임 마무리로 전향했는데 1997년까지 평균 이닝이 132.1이닝, 그 중에서는 선발로 등판해 완투까지 한 경기가 7경기가 있었다.

파일:/api/File/Real/5976374051153dd53e3d0a0a 거지왕 강민호 감독님 다른 포수 좀 넣어줘요

SK 감독 때는 고졸 신인 이승호를 2000-2001년 2년간 77경기 360.1이닝을 투구시켰고 한 시즌 158.1이닝 투구가 최고였던 에르난데스를 2001년 한해에만 233.2이닝을 던지게 했다. 결국 에르난데스는 이듬해 팔꿈치 부상으로 퇴출되었고 이승호는 2004년 이후 긴 재활에 들어갔다. 롯데 말기에는 투수 혹사는 줄었으나 포수 강민호를 한 시즌 전 경기 선발출장을 시키며 팀 1118.2이닝 중 1040이닝을 출장시켰다.

물론 1980년대 ~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어느 팀이건 혹사를 하지 않는 팀이 드물었고 2000년대 초반의 투수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혹사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강병철의 혹사는 역대급으로 평가받았고 결국 '단기전의 마술사', '육성 전문가'라는 본인의 장점을 모두 묻어버리는 요소가 되었다.

기타[원본 편집]

  • 위 초등학생의 편지글에서도 보이듯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창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강병철이 부산상고 52기, 노무현이 53기이다. 김응용 - 강병철 - 노무현 - 김용철은 부산상고 동문으로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있었다.
  • 군대를 무려 40개월이나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래 해병대의 복무기간은 24개월이었으나 김신조 사건이 터지고 복무연한이 1년이 늘어났다. 이후 36개월을 다 채운 상황에서도 대회 참가를 이유로 전역을 시켜주지 않으면서 결국 군 복무를 40개월을 하고 전역하게 되었다. 남자라면 강병철 감독님 까지맙시다!
  • 롯데 말년 정수근과 엄청나게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2006년 현대전에서 정수근이 쉬운 플라이를 놓치며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하자 바로 교체 후 2군에 보내버렸고, 정수근이 2군에서 반성을 하지 않는다며 대노한 적이 있었다. 또 2007년에는 정수근이 4000만원짜리 선수보다 못하다며 디스했고 시즌 막판 FA 조건 때문에 규정타석을 채워달라고 요구하자 "진작 열심히 했어야지 이제 와서 자기 생각만 한다"며 정수근을 나무랐다. 이에 정수근도 최근까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 파일:/api/File/Real/59768e1e4c3f279354406bbc 오덕이다 "오승환 잡았다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