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곶진

강화 5진 7보 중 하나로 남쪽으로는 강화해협인 염하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한강임진강의 하구인 조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 중 강화도쪽 돌출부인 월곶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월곶은 서해에서 한강, 임진강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조선시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강화와 서울, 인천, 연백 등지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월곶나루가 이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조선 건국 초기부터 수군만호를 두었으며, 당시에는 교동현에 배속되어 있었다가 이후 진관체제의 개편으로 종4품 수군병마사 관할의 수군진으로 변경되었다. 당시에는 대맹선 3척, 중맹선 6척, 소맹선 2척, 예비 선박인 무군소맹선 1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후 월곶진 자체가 폐진되고 화량진이 설치되었다가 부활하였으며, 이후 종4품 병마첨절제사 관할로 하였다가 승격하여 종3품 병마첨제사를 두면서 본래 소속이던 경기수영에서 육군 군진의 형태로 진의 성격이 변화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월곶진에 배속되어있던 월곶돈대와 나루터로 향하는 문루였던 조해루가 복원되어 자리하고 있다.

월곶돈대[편집 | 원본 편집]

월곶진에 속한 돈대로 숙종 15년(1679년)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전체적인 형상은 타원형의 돈대이며 동서방향의 폭은 약 47m, 남북방향의 폭은 약 38m이다. 염하 방향으로 총 3개의 포구가 있으며, 문루인 조해루까지 성벽으로 연결되어 강화 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연미정[편집 | 원본 편집]

연미정
건축물 정보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번지
대지면적 2,149 m2
문화재 정보
종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지정일 1995년 3월 2일

월곶돈대 안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로 돈대가 자리한 지점인 월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로 바로 흐르는 조강과 강화해협을 거쳐 인천 방향으로 흐르는 염하의 물길 모양이 두 갈래로 갈라진 제비꼬리(燕尾)와 같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강화 10경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배가 이 정자 아래 정박하였다가 물때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정자의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31년(1244년) 최충의 구재학당의 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후금과의 형제 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조선 영조 20년(1744년)에 중건되었으며, 조선 고종 28년 1891년에 중수하는 등 여러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쳤다.

1906년 화남 고재형이 이 장소를 방문하고 연미조범이라는 기행시를 남겼으며 이 시의 내용이 연미정 인근에 게시되어 있다.

燕尾漕帆 (연미조범)
鷰尾亭高二水中
三南漕路檻前通
浮浮千帆今何在
想是我朝淳古風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남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생각컨데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월곶진(연미정) 주차장 북쪽부터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구역에 들어간다.
  • 연미정 정자에서는 북한의 판문군[1]의 모습이 바로 보이며 정자에서 북동방향으로는 유도라는 무인도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1996년 홍수 당시 북한의 소 한마리가 이 유도로 떠내려왔었는데 하필 이 섬이 비무장지대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남북한 모두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말라 죽을 위기에 처한 소를 보다 못한 남북한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우리 군이 소를 구출하였고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이후 평화의 소는 제주도 출신(...)의 "통일염원의 소"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 연미정 옆에는 원래 수량 500년이 넘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2019년 9월 9일 태풍 링링의 내습 당시 북쪽의 느티나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었다. 다행히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이 정자를 피하는 방향이어서 연미정 자체에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나 500년을 지켜온 노거수 둘 중 하나가 부러져 나간 일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느티나무 뿌리와 줄기 자체는 살아있어서 현재 새싹이 다시 나고 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울타리를 쳐 놓았다.
  • 조해루와 월곶돈대 사이에는 조선 중기 무인이었던 황형의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황형은 삼포 왜변을 진압한 공로로 연미정 정자와 집을 하사받았으며 황형 사후에 월곶진이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그의 집을 그대로 월곶진 관아건물로 사용하기도 하였었다.

각주

  1. 개성특별시 판문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