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덕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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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덕포진
덕포진.jpg
건축물 정보
주소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3-1번지 외
대지면적 48,829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292호
지정일 1981년 9월 25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강화 덕포진(德浦鎭)은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 하류인 염하의 좁은 구간인 손돌목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진영의 진성으로 김포 방면에서 손돌목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진의 처음 설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5년인 1679년 강화 광성보, 덕진진, 용두돈대등이 축성되던 당시 함께 축성되었다.

상대적으로 고지대이면서 해안 돌출부에 자리한 돈대가 있었으며, 대포를 쏘던 포대 3개소에 총 15개의 포구가 있었으며, 화포 사격에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군사 지휘소 역할을 하였던 파수청이 있었으며 북쪽 돈대터 인근에는 손돌묘가 자리하고 있다.

덕포진은 강화해협이 가장 좁아지는 길목의 요충지로 병인양요 당시에 프랑스 함대와 교전하였으며, 신미양요 당시에도 미국 함대와 싸웠던 전적지이다. 그러나 1895년 전국의 군진이 폐지될 당시 함께 폐지되면서 잊혀졌다가[1] 이후 마을 주민에 의해 1970년 세상에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포대[편집 | 원본 편집]

덕포진의 포대는 총 3개소로 남쪽부터 가, 나, 다의 순서로 포대 명칭이 붙어있다.

  • 가포대 : 총 7개의 포대가 곡선형태로 초지진덕진진의 남장포대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발굴 당시 중포 2문이 출토되었다.
  • 나포대 : 총 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구 방향은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5번째 포대에서 고종 11년인 1874년에 만들어진 소푸 2문과 중포 1문이 함께 묻혀있는 채로 발굴되었다.
  • 다포대 : 가장 북쪽에 있는 포대로 3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포구 방향은 강화 덕진진의 남장포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현재 복원된 다포대는 다른 포대와 달리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발굴 당시 포대 자리에서 발견된 기와에 근거해 복원된 것이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고종 11년(1874년)에 만들어진 중포 1문이 고정식 포가(화포 받침대)에 걸려있는 상태로 발굴되었다.

파수청 터[편집 | 원본 편집]

파수청 터

1980년 덕포진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건물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터로 추정되며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병이 있었다. 발굴 당시 7개의 포탄(포환)과 조선 후기에 사용된 화폐인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되었으며 건물터 내부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다. 파수청의 위치는 덕포진 돈대와 포대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포를 쏠 때 필요한 물자와 불씨를 보관하는 무기고인 동시에 포병 지휘를 위해 설치된 장대로 추정된다.

파수청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71년 통진부 읍지에서 파수청(把守廳)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고 당대 문서나 고지도에서는 다른 유사 명칭을 사용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아 덕포진 내에만 존재하는 고유성이 있는 명칭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고지대에는 포청, 포사청, 덕포진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여 건물의 기능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거나 여러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파수청 터는 1980년 발굴 이후 1982년 보호각을 설치하였으나 2016년 보호각을 해체하고 이후 파수청 자체를 복원할 계획이다.

손돌묘와 돈대 터[편집 | 원본 편집]

손돌묘
  • 손돌묘 :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고려시대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다. 본래 이 자리는 당시 왕의 의심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던 뱃사공 손돌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다. 그 후 1970년에 사당이 있던 자리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손돌의 가묘를 세우고 다시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1989년부터는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
  • 덕포진 돈대 : 손돌묘 바로 앞 해안 절벽이 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1980년 발굴조사 당시 돈대의 하부 구조가 확인된 곳이다. 이 위치에서는 강화도의 광성보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염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인다. 참고로 덕포진 돈대와 용두돈대 사이의 해협이 바로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유래하는 손돌목으로 이 위치가 강화해협(염하) 전체에서 가장 좁고 물살이 거센 곳이며, 중간중간 암초가 여울목을 형성하고 있어 항해가 어려운 곳이다. 현재는 이 위치에는 해안경계를 위한 해병대 초소가 자리잡고 있어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군사적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돈대터는 1981년 사적 지정 당시에는 돈대의 대략적인 위치만 확인하고 발굴조사 구역에서 제외되어 별다른 복원정비 없이 단순 평탄지로 조성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2017년 국토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돈대의 기초와 수구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외에 김포시에서 돈대 북쪽에 위치한 부래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량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확인한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인근 구릉지에 토루가 추가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고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래 덕포진 본진의 위치는 부래도 앞쪽인 현재의 신안1리 일대였던것으로 보인다.다만 현재 이 위치는 민가가 자리하고 있어 군영의 흔적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 이 덕포진은 1895년 갑오개혁 당시 군영 폐지와 함께 폐진되었던 곳이고 이후 완전히 잊혀졌던 곳이나 1970년 마을 주민인 김기송씨가 사비를 들여 포대 자리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0년이 지난 1980년 5월 대대적인 발굴과 동시에 복원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발굴 결과 포대 15개소, 화포6문, 파수청 건물자리가 확인되었다. 참고로 김기송씨는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던 손돌제의 복원을 주도하기도 하였었다.

각주

  1. 심지어 두 양요를 다룬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도 덕포진의 이야기는 쏙 빠져있을 정도. 다른 양요 당시 동일한 전적지인 정족산성, 문수산성.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와 비하면 처참한 수준의 인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