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 명명

역대 완가 황제
1대 세조 가륭제 완복영 2대 성조 명명제 완복교 3대 헌조 소치제 완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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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상 마지막 명군

완복교 (阮福晈, 1791년 5월 25일 ~ 1841년 1월 20일)는 월남의 마지막 황제이자 대남의 초대 황제다. 그는 각종 개혁 정책으로 성과를 거두며 대남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토를 다스렸다. 그 덕분에 근대 완씨 베트남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수성군주로 평가받는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791년 5월 25일, 월남의 수도인 가정(嘉定)에서 초대 황제인 가륭과 순천고황후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가륭의 죽음 이후 월남의 차기 황제로 즉위했으며, 청나라에서 요구한 국호인 월남(越南)을 버리고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남(大南)을 국호로 정했다. 기본적으로는 가륭보다 더욱 보수적인 유교 제도와 중국의 성·현 제도를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마련했다.

재위 기간 동안 각종 진보적인 토지 개혁 정책으로 대남의 국력을 발전시켰다. 메콩강 유역과 대남 북부의 가경지를 확대하고 필요한 농구와 자금을 직접 대줬다. 개간한 토지는 일정 기간 세금까지 면제했으며 개간에 공이 큰 자에게는 관직까지 부여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해서 농민들이 토지를 개간하도록 유도했다. 덕분에 가정을 위시한 남부를 필두로 전국 쌀 생산량 수요량이 충당됐고 잉여 생산물은 동남아 각지 및 청나라로 팔려갔다. 게다가 1837년에는 동시대의 동아시아 왕조들도 시행한 적이 없는 공전제를 시행해서 지주로부터 일정 부분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려고 했다.

대외 교역은 주로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나누어졌다. 특히 프랑스식 범선 기술의 도입은 대남 조선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양식 기술을 도입한 대남의 범선들은 승조 인원이 적게는 60~70명, 많게는 400~500명에 이르렀다. 이 배들은 19세기 전반 내내 청나라 동남부 해안과 동남아시아 각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매년 계절풍을 이용하여 한 선단은 청나라 광동으로 가고, 또 한 선단은 동남아 각지를 방문해 물자를 교역했다. 뿐만 아니라 서양으로 가서 현지의 선진 문물들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도 대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 중 최초로 미국과 교역한 덕분에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대남에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대남인들 일부는 현지의 언어와 신기술을 직접 배우기도 했다. 그 덕분에 대남에서는 증기선까지 도입하기도 했으며,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했다.

외세에 대해서는 상당히 강경하고 무자비했다. 대남에 거주하던 화교들의 무역 활동을 금지하고, 남부에 거주하던 소수민족들에게 동화 정책을 시행해서 베트남식 복장과 베트남어 사용을 강요했다. 제후국으로 남아있던 짬빠도 완전히 병합시켰고, 짬족 무슬림들에게는 도마뱀 고기와 돼지 고기를 강요했다. 이웃나라인 캄보디아라오스를 침공해서 식민지로 삼기도 했다. 덕분에 이 시기 대남의 영토는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양인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근간을 흔든다고 판단하고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참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