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미자

< 논어

微子第十九(미자제십팔)

18-1[편집 | 원본 편집]

微子(미자)去之(거지)하고, 箕子(기자)爲之奴(위지노)하고, 比干(비간)諫而死(간이사)하였다. 孔子曰(공자왈): “殷有三仁焉(은유삼인언).”

(은나라 주왕에게) 미자는 (간하다) 떠났고, 기자는 (간하다) 죄수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 죽었다.
공자는 말했다: “은(殷)나라에는 인륜을 다한 세 어진이가 있었다.”

18-2[편집 | 원본 편집]

柳下惠爲士師(유하혜위사사)하고, 三黜(삼출)되었다. 人曰(인왈): “子未可以去乎(자미가이거호)?” (): “直道而事人(직도이사인)이면, 焉往而不三黜(언왕이불삼출)? 枉道而事人(왕도이사인)이면, 何必去父母之邦(하필거부모지방)?”

유하혜는 사사(士師)가 되고 세 번 쫒겨났다.
사람들이 말했다: “선생은 떠날 수 없었는가?”
(유하혜가) 대답하였다: “도를 곧게 하면서 사람들을 섬기면, 어디로 가도 세 번 쫒겨나지 않겠는가? 도를 굽혀서 사람들을 섬기면, 부모의 나라를 반드시 떠나야 하겠는가?”


18-3[편집 | 원본 편집]

齊景公(제경공)待孔子(대공자)하며, (): “若季氏則吾不能(약계씨즉오불능), 以季(이계), 孟之間待之(맹지간대지).” (): “吾老矣(오노의), 不能用也(불능용야).” 孔子行(공자행).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대접하며 말했다: “만약 계씨처럼 대우하라하면 나는 그럴 수 없고,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는 대우하겠소.”
(그리고) 말했다: “나는 늙어서 (당신을) 등용할 수가 없소.”
공자는 떠났다.

18-4[편집 | 원본 편집]

齊人(제인)歸女樂(귀여악)하여, 季桓子受之(계환자수지)하고, 三日不朝(삼일부조)하였다. 孔子行(공자행).

제나라 사람들이 여자 악사를 보냈다. 계환자가 이를 받고, 삼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 공자는 떠났다.

18-5[편집 | 원본 편집]

楚狂接輿(초광접여), 歌而過孔子(가이과공자), (): 鳳兮(봉혜)! 鳳兮(봉혜)! 何德之衰(하덕지쇠)? 往者不可諫(왕자불가간), 來者猶可追(래자유가추). 已而(이이)! 已而(이이)! 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 孔子下(공자), 欲與之言(욕여지언). 趨而辟之(추이벽지), 不得與之言(불득여지언).

초(楚)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간하지 못할 것이나, 올 것은 오히려 따를 수 있을 것이다.[1]
말지어다! 말지어다! 지금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위태로우니-!”[2]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더불어 말하고자 하였으나, (접여가) 빨리 걸어가며 대화를 피하므로, 더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8-6[편집 | 원본 편집]

長沮(장저), 桀溺耦而耕(걸익우이경). 孔子過之(공자과지), 使子路問津焉(사자로문진언). 長沮曰(장저왈): 夫執輿者爲誰(부집여자위수)? 子路曰(자로왈): 爲孔丘(위공구). (): 是魯孔丘與(시로공구여)? (): 是也(시야). (): 是知津矣(시지진의)! 問於桀溺(문어걸익), 桀溺曰(걸익왈): 子爲誰(자위수)? (): 爲仲由(위중유). (): 是魯孔丘之徒與(시로공구지도여)? 對曰(대왈): (). (): 滔滔者(도도자), 天下皆是也(천하개시야), 而誰以易之(이수이역지)?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차이여기종벽인지사야), 豈若從辟世之士哉(기약종벽세지사재)? 耦而不輟(우이불철). 子路行以告(자로행이고), 夫子憮然曰(부자무연왈): 鳥獸不可與同群(조수불가여동군)!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오비사인지도여이수여)? 天下有道(천하유도), 丘不與易也(구불여역야).

장저와 걸익[3]이 둘이서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자로에게 나루터가 어디있는지 물어보게 시켰다.
(자로가 물어오자)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자로가 말했다: “공구라는 분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정말 노나라의 공구가 맞소?”
자로가 말했다: “맞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루터를 알기는 하오![4], 그러니까 나루터가 어디에 있더라!, 이미 나루터를 알고있지 않소!}”
자로이 걸익에게 물으니 걸익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정말 노나라 공구의 제자가 맞소?”
자로가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온 천하에 미치고 있으니, 누가 있어 그 흐름을 바꿀 수 있겠소? 또 사람을 피하는 선비[士]를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피하는 선비[士]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그들은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와서 이를 고하였다.
공자가 낙심하며 말했다: “새나 짐승과는 같은 무리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이러한 사람의 무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꼐할 것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 구는 그것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고사항: 자로를 경유하고 있는 공자와 장저, 걸닉간의 대화는 선(善)문답에 가깝다. 강과 나루터라는 시제를 세상의 흐름에 빗대어, 장저는 이미 공자가 나루터를 알고 있다 혹은 나루터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냐는 답을 한 것이고, 걸익은 도도한 강의 흐름을 빗대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 흐름 자체를 거꾸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자신이 사람을 피하는 선비가 아니라 사람과 같이하는 선비임을 피력했을 뿐이다.

18-7[편집 | 원본 편집]

子路從而後(자로종이후), 遇丈人(우장인), 以杖荷蓧(이장하조). 子路問曰(자로문왈): 子見夫子乎(자견부자호)? 丈人曰(장인왈): 四體不勤(사체불근), 五穀不分(오곡불분), 孰爲夫子(숙위부자)? 植其杖而芸(식기장이운). 子路拱而立(자로공이립). 止子路宿(지자로숙), 殺鷄爲黍而食之(살계위서이식지), 見其二子焉(견기이자언). 明日(명일), 子路行以告(자로행이고). 子曰(자왈): 隱者也(은자야). 使子路反見之(사자로반견지). 至則行矣(지즉행의). 子路曰(자로왈): 不仕無義(불사무의). 長幼之節(장유지절), 不可廢也(불가폐야); 君臣之義(군신지의), 如之何其廢之(여지하기폐지)? 欲潔其身(욕결기신), 而亂大倫(이란대륜). 君子之仕也(군자지사야), 行其義也(행기의야). 道之不行(도지불행), 已知之矣(이지지의).

자로가 공자 일행을 따르다가 뒤쳐졌는데, 우연히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제초용 농기구[蓧]를 메고 있었다.
자로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제 스승님을 보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사지(손발)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간할 수 없는데[5] 누구를 스승이라 하는가?”
(노인이) 지팡이를 땅에 꽂고는 풀을 베자, 자로는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붙들어 묵어가게 했다. 노인은 닭을 잡고 기장밥을 만들어 자로를 대접하고는 그의 두 아들을 만나보게 했다. 다음날 자로는 일행을 찾아가서 있던 일을 고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은자(隱者)이시구나.”
공자는 자로를 되돌려보내 그 노인을 만나게 했지만, 자로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했다[6]: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어른과 아이간의 예절[7]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간의 의(義)[8]도 이와 같은데 어떻게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몸만 깨끗하게 하다가는 큰 윤리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군자가 벼슬을 하려하는 것은 그 의를 행하기 위함입니다. 도가 잘 행하여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참고사항: 이 절도 선문답이다. 노인과 공자 사이에 자로가 끼어있는데, 직접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노인의 말 속에 숨은 뜻은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벼슬을 구하려고 떠도는 공자를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 자로는 벼슬을 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를 행하여 궁극적으로는 도가 행해지도록 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자로의 말은 공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18-8[편집 | 원본 편집]

逸民(일민): 伯夷(백이), 叔齊(숙제), 虞仲(우중), 夷逸(이일), 朱張(주장), 柳下惠(유하혜), 少連(소련). 子曰(자왈): 不降其志(불강기지), 不辱其身(불욕기신), 伯夷叔齊與(백이숙제여)! (): 柳下惠(유하혜), 少連(소련), 降志辱身矣(강지욕신의). 言中倫(언중륜), 行中慮(행중려), 其斯而已矣(기사이이의). 謂虞仲(위우중), 夷逸(이일): 隱居放言(은거방언), 身中淸(신중청), 廢中權(폐중권). 我則異於是(아즉이어시), 無可無不可(무가무불가).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서지 아니하고 묻혀 지내는 사람으로는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이 있었다.
공자가 말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지 않게 했으니, 백이와 숙제이구나!”
논평했다: “유하혜와 소련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으나, 말은 도리에 맞았고 행동은 생각과 일치했으니 그들다웠구나!”
논평했다: “우중과 이일은 숨어살며 말을 멋대로 하였으나, 몸은 맑음을 유지하였고 스스로 갇힌 것이 (정치적) 상황에 맞았다.”
(공자가 자신을 말했다) :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 할 것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참고사항: 無可無不可를 ‘정해진 것도 없고 정해지지 않은 것도 없다’, ‘그래야 할 것도 없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등으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중국어에서 無可無不可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아무래도 좋다를 뜻하는 숙어이다.

18-9[편집 | 원본 편집]

大師摯適齊(태사지적제), 亞飯干適楚(아반간적초), 三飯繚適蔡(삼반요적채), 四飯缺適秦(사반결적진). 鼓方叔入於河(고방숙입어하), 播鼗武入於漢(파도무입어한), 少師陽(소사양), 擊磬襄入於海(격경양입어해).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갔다. 아반 간은 초나라로 갔다. 삼반 요는 채나라로 갔다. 사반 결은 진나라로 갔다.북치던 방숙은 하수(황하)유역으로 들어갔고 작은 북을 흔들던 무는 한수(양쯔강)유역으로 들어갔다. 소사 양과 경을 치던 양은 바다쪽으로 갔다.

참고사항: 태사, 아반, 삼반, 사반, 소사 등은 노나라 악사들의 벼슬 이름이다. 팔일편 23장에는 공자가 태사에게 하는 말이, 태백편 16장에는 공자가 태사 지의 연주에 대하여 한 말이 실려있는데, 팔일장에 태사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동일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헌문장 42절에서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경을 치던 일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자한편 14장에는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 악(樂)이 바르게 되고 아와 송(조정의 음악과 종묘제례악)이 제자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기록된 인물은 공자가 악(樂)을 가르쳤던 사람들이거나 공자와 관련되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

18-10[편집 | 원본 편집]

周公謂魯公曰(주공위노공왈): 君子不施其親(군자불이기친), 不使大臣怨乎不以(불사대신원호불이). 故舊無大故(고구무대고), 則不棄也(즉불기야), 無求備於一人(무구비어일인).

노나라 주공(周公)이 아들 노공(魯公)에게 말했다: “군자는 {그 친족에게만 편중되서는 안 된다., 그 친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대신들을 써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원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랫 동안 함께한 사람이 큰 잘못이 없는 한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갖추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참고사항: 施는 '베풀다'는 뜻일 때는 로, '옮기다' 또는 '기울다'는 뜻일 때는 로 읽는데, 논어언해에서는 독음을 로 기록하고 있다. 주자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전자의 뜻으로 보면 요왈장 제1절에서 주나라 무왕이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18-11[편집 | 원본 편집]

周有八士(주유팔사): 伯達(백달), 伯适(백괄), 仲突(중돌), 仲忽(중홀), 叔夜(숙야), 叔夏(숙하), 季隨(계수), 季騧(계왜).

주나라에는 8인의 선비[士]가 있었다: 백달, 백괄, 중돌, 중홀, 숙야, 숙하, 계수, 계왜이다.

너무 짧아서 어떤 속뜻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1. 몇 가지 해석의 이설이 있다. 공자의 지난 행적은 이미 지나갔으니 돌이킬 수 없으나, 앞으로는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며, 지나간 도를 간하지 못하고, 새로 오는 도리를 따르는 것도 망설인다(猶)고도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덕이 옛 것이므로 간하지 못하고, 새롭게 오는 도를 따라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 위의 어떤 해석에 따르더라도 접여는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만은 만류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3. 걸닉으로도 읽을 수 있다. 15C 논어언해에는 '걸릭'으로 표기되었고, 각종 사전 표제어에서는 걸닉과 걸익이 반반씩 섞여있다. 다만 현재 인명용 한자에서 溺은 '물에 빠질 닉', '물에 빠질 익, 강이름 익'으로만 표기되어 있고, 대법원 인명용 한자에서 "한자는 이 표에 지정된 발음으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소리(初聲) "ㄴ"또는 "ㄹ"인 한자는 각각 소리나는 바에 따라 "ㅇ"또는 "ㄴ"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되어있으므로 '걸닉'이 될 것 같지만, 조선왕조실록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전부 '걸익'으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걸익으로 표기하였다.
  4. 논어언해는 "이 津을 아ᄂᆞ니라"고 언해했다. "나루터가 어디있는지 알고싶으면 걸익에게 물어봐라."처럼 이어서 보는 해석은 선문답으로서의 대담을 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5. ‘사체불근 오곡불분’은 ‘일을 조금도 하지 않고 생산 실정도 모른다’ 내지는 ‘세상물정을 모른다’를 뜻하는 숙어가 되었다.
  6. 누구에게 말했는지에 대하여는 추측을 해야한다. 1. 자로가 노인이 떠난 후 남아있던 가족에게 말했다 2. 자로가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로 추측할 수 있는데, 영역판이나 다수의 번역본은 1의 추측을 하고 있다.
  7. 쉽게 말하자면 오륜 중 장유유서를 생각하면 된다.
  8. 마찬가지로 오륜 중 군신유의를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