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니시니혼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저는 분해서 분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의 생명을 빼앗고 두 사람의 미래를 빼앗고
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JR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벌레 잡듯이 ○○을 죽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이 싸움에서 질 수는 없어요.
저를 지옥으로 떨어트린 JR과 싸워주세요.
— 사망자의 연인이 남긴 유서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사고를 일으킨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あなたたちは、こういう事故を起こした会社に入ったのです.
— JR 니시니혼, 신입사원 연수에서
사고 현장

JR福知山線脱線事故 / Amagasaki rail crash

현대 일본 철도의 흑역사
대중교통이 시장 논리에만 매달린 결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20분경, JR 니시니혼 5418M열차(207계 7량 편성)가 후쿠치야마선 츠카구치역 ~ 아마가사키역 구간에서 과속으로 탈선한 사고.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다쳤다.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탈선 사고가 일어난지 불과 한달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해당 사고보다 몇십배의 피해가 발생해서 일본 철도 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4월 25일 아침[편집 | 원본 편집]

월요일 아침, JR 니시니혼 소속 207계 S16-Z18 편성 7량이 JR 타카라즈카선 쾌속 등급으로 투입되었다. 회차 전 종착역인 타카라즈카역에 진입하면서 ATS 비상 제동이 체결되어 출발이 지연되어 있던 상태였다.

9시 15분
정차역인 이타미역을 72m 오버런한다. 이타미역 정차 전 2번에 걸친 경고 음성이 송출되었으나 기관사는 두 번째 경고에서 제동을 실시해 오버런되었고, 관제소에 축소보고하도록 차장에게 부탁한다.(실제로 8m로 보고 되었고, 사고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다.)
9시 18분
사고 열차는 이타미역에서 정차 위치를 조정하느라 약 1분 20초 정도 지연된 채 츠카구치역 ~ 아마가사키역 구간 커브에 진입했다. 해당 구간의 제한속도 표지는 시속 70km였으나, 열차는 지연에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무려 시속 116km의 속도로 커브에 돌입했다. 기관사는 오버런 보고 무전에 신경쓰느라 제동을 걸지 않았고, 뒤늦게 제동을 시도했지만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열차가 탈선하여 진행 방향에 있던 맨션에 충돌한다. 잭 나이프 현상으로 객차가 지그재그로 배열되면서 구겨져 인명피해가 커졌다.

맞은 편 선로에서 특급 킨타킨키가 접근하고 있었는 데, 사고를 목격한 주민이 건널목 방호 장치를 작동시킴에 따라 특급 열차가 비상 정차를 해서 2차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 수습을 위해 효고 현의 소방 본부에서 4일간 광역 지원을 파견했음에도 구급차의 공급이 부족해서 부상이 경미한 경우 인근 주민 협조하에 자가용, 택시, 도보를 이용해 의료 기관으로 후송 되었으며, 경찰 호송하에 트럭 짐칸에 실려 후송되는 부상자들도 있었다. 빠른 후송을 위해 인근 중학교 운동장이 임시 헬기 이착륙장으로 활용되었다.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사고 열차는 출발부터 지연을 안고 가고 있었고, 이타미역에서는 80m 오버런까지 하면서 빡빡한 다이어에 의해 지연 시간이 불어나고 있었다. 기관사는 일근교육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타미역 오버런을 축소보고하도록 차장에게 부탁하고 지연을 만회하기 위해 과속을 했으며, 원심력에 의해 가벼운 차체가 뜨면서 탈선으로 이어졌다.

직접적인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조사 당국은 처음에는 건널목에서 차량과 충돌했거나[1], 외부 요인에 의한 선로 훼손으로 인한 탈선으로 원인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전동차의 잔해 중 속도계가 시속 106km를 기록하고 있었고, 조사 과정에서 커브 진입 속도가 시속 116km로 판명되면서 과속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간접적인 원인[편집 | 원본 편집]

  • JR 니시니혼의 사내 문화
    사고 이후 JR 니시니혼의 사내 문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았다. 당시 일근교육이라는 것이 있었는 데, 목적은 사원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방대한 양의 반성문 작성, 화장실 청소, 잡초 뽑기 등 처벌이 행해지고 있었고, 상사는 부하에게 욕설을 하거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게 심해져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사고 당시 JR 니시니혼 사원이 2명 탑승해 있었고 생존하여 사고 수습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회사 복귀 명령을 받고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도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 빡빡한 시간표
    JR 니시니혼은 국철 시대부터 대형 사철과 피터지는 경쟁을 하고 있었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속도전에 주력한다. 이는 운전 시간표가 매우 빡빡하게 나오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고 후 일본 전국의 철도 노선의 운전 시간표를 조사했는데, JR 니시니혼의 시간표가 가장 빡빡했다. 사고 열차의 운전 시간표도 구간을 최고 속도로 내달려야 시간을 간신히 맞출 수 있고, 러시아워에도 정차시간이 15초에 불과해 지연을 회복할 여유가 없었다.
  • 하드웨어 측면의 문제
    사고 지점의 커브는 선로가 이설되면서 반경이 더 작아졌다. 하지만 속도 제한의 조정은 없었고, 진입 속도 초과시 비상 제동을 체결하게 할 ATS 지상자가 있어야 했으나 설치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사고 차량인 207계는 경량화를 위해 스테인리스 차체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무게가 원심력을 짓누르지 못해 탈선의 원인이 되었다. 브레이크 제어 계통에도 취약점이 있어, 회생 제동 - 공기 제동 전환시 전환이 완료될 때까지 제동이 걸리지 않는 시간이 생겨서 비상 제동이 제때 작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한 차량마다 제동 특성이 달라 감속에 어려움이 있었다.

사고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사고 구간은 조사와 복구로 인해 2달 동안 운행이 중지되었다. 대체 수송이 실시되었으며 골든 위크가 끼면서 역 주변이 혼잡해졌다. 복구 후 사고 구간과 주변의 속도 제한이 시속 10km 가량 하향되었으며 커브 진입부에는 ATS 지상자가 설치되었다.

207계 전동차는 측면부 띠 도색을 JR 니시니혼의 이미지 컬러로 하고 있었으나 사고 후 이미지 개선을 위해 주황색으로 교체했다. JR 니시니혼에서 제공하던 종이모형도 내려졌으며, 철도모형의 생산도 중단되어 신도색 모형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된 ATS 지상자 설치가 지연된 것에 대해서 사고 당시 기술부문을 총괄했던, 이후 JR서일본의 야마자키 마사오 사장을 기소하였고, 이로 인해 야마자키 사장은 사직하였다.

피해 맨션은 JR 니시니혼 보상하에 거주자들이 모두 퇴거하였고, 추모 공원으로 조성중이다. 이 사고로 스이타 안전센터가 설치되어 안전 교육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사고 편성은 차량 기지에서 보존중이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사고 직후 주민에 의해 건널목 방호 장치 작동으로 추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