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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15시위.jpg|250픽셀|섬네일|3·15 부정선거 직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 [[파일:3.15시위.jpg|250픽셀|섬네일|3·15 부정선거 직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 ||
{{인용문|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이승만|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를 선언하기 직전에}} | {{인용문|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이승만|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를 선언하기 직전에}} | ||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대한민국]]에서 |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대한민국]]에서 {{날짜/출력|1960-3-15}} 치러진 부정선거이다. 원래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자리였으나 선거직후 부정선거로 드러나면서 선거무효 처리되었다. | ||
== 배경 == | == 배경 == | ||
무려 86세(한국나이)가 된 [[이승만]]은 아직도 대통령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 무려 86세(한국나이)가 된 [[이승만]]은 아직도 대통령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4번째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del>이쯤되면 대통령 선거 이야기보다 이승만의 건강비결이 더 궁금할 지경이다.</del>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선거였던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상대 유력후보([[신익희]])가 유세 도중에 사망하여 어부지리로 이승만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조봉암]](득표율 30.0%)과 신익희의 선전(총 투표수 중 무효표 비율 20.5%)은 더 이상 국민들이 덮어놓고 무조건 이승만과 자유당을 지지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자유당 정권은 국민들에게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개뿔이고, '''사악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 ||
자유당은 먼저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을 손봐주었다. 진보당은 [[북한]] [[노동당]]과 내통하는 이적단체로 고발되어 해산되었으며,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 자유당은 먼저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을 손봐주었다. 진보당은 [[북한]] [[노동당]]과 내통하는 이적단체로 고발되어 해산되었으며,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59년]] 사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가리켜 [[진보당 사건]]이라고 부른다. 진보당 사건은 당시에도 <del>워낙 속이 뻔하게 보이는 짓인지라</del> 정치적 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당의 이미지는 막장으로 치달았으며, 민주당 세력은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였다. 이렇게 맛이 갈 때까지 가버린 자유당은 다음 선거를 부정선거로 치룰 계획을 세우는 데에만 매진하였다. | ||
그렇게 선거기간이 시작되고, 자유당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승만의 4선은 불확실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의 선거전도 치열한 전개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조병옥이 선거 1달여 전에 [[미국]]으로 신병치료차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되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어 | 그렇게 선거기간이 시작되고, 자유당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승만의 4선은 불확실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의 선거전도 치열한 전개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조병옥이 선거 1달여 전에 [[미국]]으로 신병치료차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되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어 버렸다.<ref>시기가 너무 미묘했던 탓에 일각에서는 사실 자유당 측에서 암살자를 보내서 조병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나돌았으나, 근거는 없는 주장이다. 이런 종류의 음모론을 너무 많이 믿다보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으니 이 주장은 적당히 들어 넘기도록 하자.</ref> 덕분에 자유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 ||
하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6세에 달해 임기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망하게 되면 [[부통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유당 입장에서는 부통령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여야만 민주당에게 눈 뜨고 정권을 내주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갈고 닦아온 '''현란한 부정선거 기술들'''을 선보였다. | 하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6세에 달해 임기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망하게 되면 [[부통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유당 입장에서는 부통령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여야만 민주당에게 눈 뜨고 정권을 내주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갈고 닦아온 '''현란한 부정선거 기술들'''을 선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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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의 표를 사전투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어둔다. | *40%의 표를 사전투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어둔다. | ||
*읍, 면, 동 단위로 공무원 중심의 친목회를 실시, 부정선거 방법을 사전 교육시킨다. | *읍, 면, 동 단위로 공무원 중심의 친목회를 실시, 부정선거 방법을 사전 교육시킨다. | ||
*3인조, 5인조, 7인조로 유권자를 묶어, 투표당일 이들이 동시에 입장하여 투표용지를 서로 공개하여 보여준 후 투표함에 투입하도록 한다. | *3인조, 5인조, 7인조로 유권자를 묶어, 투표당일 이들이 동시에 입장하여 투표용지를 서로 공개하여 보여준 후 투표함에 투입하도록 한다. | ||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 투표한다. |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 투표한다. | ||
*고령층 및 신체 부자유 유권자에게 기권을 강요한 후, 기권표를 조작한다. | *고령층 및 신체 부자유 유권자에게 기권을 강요한 후, 기권표를 조작한다. | ||
*완장부대를 동원하여 개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 *완장부대를 동원하여 개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 ||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한다. |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한다. | ||
*개표장을 일시적으로 정전시킨 뒤 투표함을 바꿔치기한다. | *개표장을 일시적으로 정전시킨 뒤 투표함을 바꿔치기한다. | ||
== 선거 결과 == | == 선거 결과 == | ||
일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 자유당 측에서는 100% 득표율로 이승만 당선 확정인 대통령 선거를 굳이 부정선거로 치룰 필요가 없었다. 부정선거는 대통령 선거가 아닌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 | 일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 자유당 측에서는 100% 득표율로 이승만 당선 확정인 대통령 선거를 굳이 부정선거로 치룰 필요가 없었다. 부정선거는 대통령 선거가 아닌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선거|제 3대 대통령선거]] 당시와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은 무효표로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이 선거에서는 총 투표수 960만여 표 중 120만여 표가 무효표로 나타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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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 colspan=3|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11,196,490||colspan=2|97.0 | |align=left colspan=3|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11,196,490||colspan=2|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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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이후 == | == 선거 이후 == | ||
너무나도 명백한 부정선거였던 터라, 선거일 이튿날인 [[3월 16일]]부터 [[경남]] [[마산]](현재의 [[창원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마산 3·15 의거]]라 한다. 시위가 진행 중이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있는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로서 경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를 낸 것이 밝혀지자, 시위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3,000여 명의 고려대생이 연좌시위를 하고 귀가하던 길에 정치폭력배가 나타나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날 서울 시내 각 대학교에서는 총궐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4·19 혁명]]이라 한다. 총궐기 1주일 만인, [[4월 26일]] 이승만은 시민대표 5인과 면담을 실시, 이 자리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발언하면서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전면 수용하였다. 그런데 하야를 | 너무나도 명백한 부정선거였던 터라, 선거일 이튿날인 [[3월 16일]]부터 [[경남]] [[마산]](현재의 [[창원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마산 3·15 의거]]라 한다. 시위가 진행 중이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있는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로서 경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를 낸 것이 밝혀지자, 시위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3,000여 명의 고려대생이 연좌시위를 하고 귀가하던 길에 정치폭력배가 나타나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날 서울 시내 각 대학교에서는 총궐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4·19 혁명]]이라 한다. 총궐기 1주일 만인, [[4월 26일]] 이승만은 시민대표 5인과 면담을 실시, 이 자리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발언하면서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전면 수용하였다. 그런데 하야를 발표할 때나 후에도 자기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예로 " 3.15 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하니"라며 자기 책임을 축소해 까였다. 서중석 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특유의 책임 회피였다."면서 "3.15 부정선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가 4월 26시점에서도 3.15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마치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는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ref>(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258)</ref>이라고 말했다. 하루 뒤에 비서들이 극회에 제출할 사임서 초안을 이승만에게 내밀자 이승만은 서명을 거부했다. 여러 비서들이 서명하지 않을 수 없다했지만 이승만은 단호했는데 허정이 질서유지를 장담하자 받아들였다.<ref>(서중석, 같은 책 263)</ref> | ||
결국 자유당은 해산되고, 부정선거 혐의로 부통령 당선이 취소된 [[이기붕]]은 [[4월 28일]] 자살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del>그리고 후손들은 이후 선거 결과가 시원찮다 싶을 때마다 '''3·15 부정선거를 능가하는 부정선거다!'''라며 선거에 승리한 상대방을 괴롭히게 된다.</del> | |||
== 주석 == | |||
<references/> | |||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 |||
{{대한민국의 대통령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