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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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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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 간송본 ===
=== 간송본 ===
[[추가바람]]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 상주본 ===
=== 상주본 ===
[[추가바람]]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모씨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했다. 세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모씨가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 상주본은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서적을 오히려 훼손할 우려가 있어 서적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분쟁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으며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배씨는 형사 재판에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것이 안동 [[광흥사]]에서 복장유물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어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배씨에게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2심 과정에서 조씨가 주장하는 보관 과정과는 배치되고, 배씨와 일치되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부는 골동품상 조모씨등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고 직접 본 사람과 다른 점, 절취하였다는 날 직후에 공개된 점이 의심스러운 점을 무죄 선고의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1년]]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유권자는 조씨라고 확정 판결했다.
 
배씨는 [[2012년]] [[9월]] 무죄로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듯하여 조씨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배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들을 위증 및 교사 등 혐의로 고발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러나 경북 상주시는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을 상주박물관에 유치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고 [[2013년]] [[4월 9일]]에 밝혔다.
 
이후 [[추가바람]]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15년 4월 26일 (일) 19:40 판

訓民正音훈민정음 .

개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이념 등을 풀이한 서적이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단,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본 적이 있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로 시작하는 건 언해본으로, 해례본은 뜻은 같지만 '國之語音異乎中國'같이 한자로만 쓰였다.

내용과 구성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今正音之作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初非智營而力索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 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음양의)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훈민정음 스물 여덟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제자해〉(制字解)

판본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간송본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상주본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모씨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했다. 세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모씨가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 상주본은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서적을 오히려 훼손할 우려가 있어 서적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분쟁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으며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배씨는 형사 재판에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것이 안동 광흥사에서 복장유물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어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배씨에게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2심 과정에서 조씨가 주장하는 보관 과정과는 배치되고, 배씨와 일치되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부는 골동품상 조모씨등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고 직접 본 사람과 다른 점, 절취하였다는 날 직후에 공개된 점이 의심스러운 점을 무죄 선고의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1년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유권자는 조씨라고 확정 판결했다.

배씨는 2012년 9월 무죄로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듯하여 조씨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배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들을 위증 및 교사 등 혐의로 고발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러나 경북 상주시는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을 상주박물관에 유치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고 2013년 4월 9일에 밝혔다.

이후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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