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진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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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9일 (수) 16:59 판

틀:문화재

개요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를 방어하고 관리위해 건설된 진성으로 1678년 지방관인 최관에 의해 축성된 성곽유적이다. 당시 화북진은 동편의 조천진과 함께 제주목에서 직접 관리하던 육지와의 교통로였기에 제주도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관문이라 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의 규모는 606척(약 184m), 높이 10척(약 3m)로 동문과 서문의 2개 문이 있었으며 진 내부에는 진사, 공수, 사령방, 마방, 무기고 등이 있었다. 숙종 25년인 1699년에는 제주목사 남지훈이 객사인 환붕정을 지었고, 이후 헌종대에는 북쪽 성벽쪽에 망양정이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어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화북진이 기능하던 당시에는 조방장 1인 치총 2인 방군 92인이 배치되었으며 병선으로는 사후선 1척을 배치하고 있었다.

기타

  • 현재 화북진지에는 "화북 청소년 문화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해당 시설물의 경계선이 과거 성벽 자리와 거의 일치한다.
  • 화북진 앞의 화북포구는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었던 곳이다. 1737년(영종 13년) 항만 축조가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 때 마다 항 내의 선박들이 부서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정이 스스로 돌을 들어 나르는 등 앞장서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 때문인지 김목사는 이임해서 육지로 나가기 직전 화북진에서 사망하게 된다.
  • 추사 김정희나 최익현이 제주도로 유배올 당시 이 화북진을 통해서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 화북진과 화북포구 사이에는 해안용천수가 나는 샘이 있으며 금돈지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