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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한국어]] 표기에 주로 사용되는 [[표음 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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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조선]]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반포했다. 반포 당시 28자의 기본 [[한글 낱자|자모]]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쓰이지 않게 되는 자모가 생겼다. 이후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경시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실과 일부 양반층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 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현대 한국어에는 24자의 기본 자모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일부 합성 자모들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갈래는 표음 문자 가운데 음소 문자에 속한다. 음소 문자로서 음운 자질도 나타낼 수 있는 특이한 문자이고, 현대 한국어에서처럼 모아쓰기를 하는 경우 음절도 나타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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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는 다르다. 한글은 글자이고 한국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글을 언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모국어에서 쓰는 문자가 그 언어에서만 쓰이는 국가들이 문자와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개요 ==
'''한글'''은 [[한국어]] 표기에 주로 사용되는 표음 문자이다. 15세기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반포했다. 반포 당시 28자의 기본 자모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쓰이지 않게 되는 자모가 생겼다. 이후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경시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실과 일부 양반층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현대 한국어에는 24자의 기본 자모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일부 합성 자모들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갈래는 표음 문자 가운데 음소 문자에 속한다. 음소 문자로서 음운 자질도 나타낼 수 있는 특이한 문자이고, 현대 한국어에서처럼 모아쓰기를 하는 경우 음절도 나타내게 된다.
 
한국어와는 다르다. 한글은 글자이고 한국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명칭 ==
== 명칭 ==
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것으로 ‘크다’, ‘바르다’, ‘하나’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 글 가운데 바른 글(똑바른 가운데를 한가운데라 하듯이), 모난 데 없이 둥근 글(입 크기에 알맞게 찬 것을 한 입이라 하듯이)이란 여러 뜻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것으로 ‘크다’, ‘바르다’, ‘하나’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 글 가운데 바른 글(똑바른 가운데를 한가운데라 하듯이), 모난 데 없이 둥근 글(입 크기에 알맞게 찬 것을 한 입이라 하듯이)이란 여러 뜻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줄여서 ‘정음(正音)’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본래의 이름으로 쓰지 않고 막연히 ‘언문(諺文)’<ref>이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보인다. 예컨대, 세종실록은 훈민정음 창제를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주상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어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이라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이름이거나 또는 굳이 한글만 지칭한 것은 아니고 한자 이외의 문자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순조실록]](純祖實錄) 9년 [[12월 2일]] 기사에 역관 현의순(玄義洵)이 대마도의 사정을 보고한 글 가운데 敎之以諺文名之曰假名(언문을 가르치는데, 그 이름을 일러 가나라고 한다)과 같은 문장이 있어, 일본 문자에 대해서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에 언문청이라는 한글을 보급하는 구실을 하는 기관 이름이 나온다.</ref>, ‘언서(諺書)’<ref>한문을 지칭하는 ‘진서(眞書)’와 대비되는 표현이다.</ref>, ‘반절(反切)’<ref>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세간에서 이른바 반절 27자라고 하는 언문 자모). 최세진(崔世珍), 범례(凡例),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반절은 본래 2개의 한자로 다른 한자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말하며, 이렇게 소리의 표기에 사용된 글자를 반절자(反切字)라고 한다. 당시 훈민정음이 이와 비슷한 용법으로 한자음 표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절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ref> 로 불리거나, 혹은 ‘암클(여성들이 배우는 글)’, ‘아햇글(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단, 암클, 아햇글이라는 표현은 그 출전이 불분명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서(國書)’, ‘국문(國文)’이라고 불렀고 혹은 ‘조선글’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의 글이라는 보통 이름일 뿐이며, 고유명사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전에는 ‘가갸’, ‘정음’ 등으로 불렀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줄여서 ‘정음(正音)’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본래의 이름으로 쓰지 않고 막연히 ‘언문(諺文)’<ref>이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보인다. 예컨대, 세종실록은 훈민정음 창제를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주상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어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이라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이름이거나 또는 굳이 한글만 지칭한 것은 아니고 한자 이외의 문자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순조실록]](純祖實錄) 9년 [[12월 2일]] 기사에 역관 현의순(玄義洵)이 대마도의 사정을 보고한 글 가운데 敎之以諺文名之曰假名(언문을 가르치는데, 그 이름을 일러 가나라고 한다)과 같은 문장이 있어, 일본 문자에 대해서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에 언문청이라는 한글을 보급하는 구실을 하는 기관 이름이 나온다.</ref>, ‘언서(諺書)’<ref>한문을 지칭하는 ‘진서(眞書)’와 대비되는 표현이다.</ref>, ‘반절(反切)’ <ref>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세간에서 이른바 반절 27자라고 하는 언문 자모). 최세진(崔世珍), 범례(凡例),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반절은 본래 2개의 한자로 다른 한자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말하며, 이렇게 소리의 표기에 사용된 글자를 반절자(反切字)라고 한다. 당시 훈민정음이 이와 비슷한 용법으로 한자음 표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절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ref>로 불리거나, 혹은 ‘암클(여성들이 배우는 글)’, ‘아햇글(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단, 암클, 아햇글이라는 표현은 그 출전이 불분명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서(國書)’, ‘국문(國文)’이라고 불렀고 혹은 ‘조선글’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의 글이라는 보통 이름일 뿐이며, 고유명사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전에는 ‘가갸’, ‘정음’ 등으로 불렀다.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ref>[[1908년]] 설립한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1911년]] [[9월]]에 명칭을 바꾼 것으로, 공식적으로 한글과 한문 표기를 나란히 사용했다.</ref>’를 ‘한글모’로 바꾼 바 있고<ref>‘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 이 몯음을 세움몯음으로…’, 한글모세움몯음적발, 한글모 죽보기. 이규영. 1917.</ref>, 같은 해 [[9월]]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풀이’라 한 것이 있고<ref>한글풀이의 수록이 확인되는 것은 [[1914년]] [[3월]]의 제7호부터 [[1914년]] [[7월]]의 제11호까지</ref>,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이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꾼 것 등으로 볼 때 [[1913년]] 무렵 주시경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한다.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ref>[[1908년]] 설립한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1911년]] [[9월]]에 명칭을 바꾼 것으로, 공식적으로 한글과 한문 표기를 나란히 사용했다.</ref>’를 ‘한글모’로 바꾼 바 있고<ref>‘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 이 몯음을 세움몯음으로…’, 한글모세움몯음적발, 한글모 죽보기. 이규영. 1917.</ref>, 같은 해 [[9월]]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풀이’라 한 것이 있고<ref>한글풀이의 수록이 확인되는 것은 [[1914년]] [[3월]]의 제7호부터 [[1914년]] [[7월]]의 제11호까지</ref>,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이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꾼 것 등으로 볼 때 [[1913년]] 무렵 주시경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한다.


현재 한글의 명칭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로, [[북한]]에서는 ‘조선어자모’로 부르는데<ref>맞춤법, 조선말규범집. 북한 내각직속 국어사정위원회. 1987.</ref>, [[2001년]]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ICCKL 2001)’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 학자들이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록하기 위한 명칭으로 ‘정음(Jeongeum)’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현재 한글의 명칭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로, [[북한]]에서는 ‘조선어자모’로 부르는데<ref>맞춤법, 조선말규범집. 북한 내각직속 국어사정위원회. 1987.</ref>, [[2001년]]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ICCKL 2001)’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 학자들이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등록하기 위한 명칭으로 ‘정음(Jeongeum)’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글(Hangul/Hangeul)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지만, [[중국]]에서는 조선 자모(朝鲜字母, Cháoxiǎn zìmǔ, 차오셴 쯔무)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일본]]에서는 한글은 물론 한국어를 ハングル(한구루)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NHK]] 방송에서 한국어 강좌를 설립시에 [[남한]]의 ‘한국어’와 [[북한]]의 ‘조선어’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좌 명칭으로 '한글 강좌'를 사용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한글의 뜻을 한국어로 오해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글(Hangul/Hangeul)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지만, 중국에서는 조선 자모(朝鲜字母, Cháoxiǎn zìmǔ, 차오셴 쯔무)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일본에서는 한글은 물론 한국어를 ハングル(한구루)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NHK 방송에서 한국어 강좌를 설립시에 남한의 ‘한국어’와 북한의 ‘조선어’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좌 명칭으로 '한글 강좌'를 사용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한글의 뜻을 한국어로 오해한 것이다.


== 유래 ==
== 유래 ==
[[세종실록]]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본땄다(倣)”라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ref>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乃成字 :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중·종성으로 나뉘어 그것을 합한 연후에 글자를 이룬다.)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ref><ref>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인(因)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맞아). 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이 기사는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序)를 옮겨 놓은 것이다.</ref> 이 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고전’의 해석에는 한자의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당시에 ‘몽고전자’(蒙古篆字)로도 불렸던 파스파 문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단고기]]를 진짜 역사서라고 우기는 환빠들은 이것이 [[가림토]]를 일컫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본땄다’(倣)에 대해서도 그 생김새만이 닮았을 뿐이라는 풀이와 만드는 데에 참고를 했다, 또는 모두 본땄다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세종실록]]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본땄다(倣)”라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ref> 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乃成字 :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중·종성으로 나뉘어 그것을 합한 연후에 글자를 이룬다.)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ref><ref> 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聲)로 인(因)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맞아). 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이 기사는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序)를 옮겨 놓은 것이다. </ref> 이 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고전’의 해석에는 한자의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당시에 ‘몽고전자’(蒙古篆字)로도 불렸던 파스파 문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단고기]]를 진짜 역사서라고 우기는 환빠들은 이것이 [[가림토]]를 일컫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본땄다’(倣)에 대해서도 그 생김새만이 닮았을 뿐이라는 풀이와 만드는 데에 참고를 했다, 또는 모두 본땄다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그 유래에 대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전에 제기되었던 주요 학설은 다음과 같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그 유래에 대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전에 제기되었던 주요 학설은 다음과 같다.
* 발음 기관 상형설: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는 설. 신경준(申景濬), 홍양호(洪良浩), 최현배
* 발음 기관 상형설: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는 설. 신경준(申景濬), 홍양호(洪良浩), 최현배
* 전자 기원설: 한문 비석 등에 쓰이는 전자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황윤석(黃胤錫), 이능화
* 전자 기원설: 한문 비석 등에 쓰이는 전자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황윤석(黃胤錫), 이능화
* 몽골 문자 기원설: 몽골문자(파스파)에서 유래했다는 설. 이익(李翼), 유희(柳僖),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 몽골 문자 기원설: 몽골문자(파스파)에서 유래했다는 설. 이익(李翼), 유희(柳僖),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 범자(梵字) 기원설: 불경과 함께 고대 인도 문자<ref>산스크리트어에서 쓰던 글자.</ref>가 전해져, 그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성현, 이수광(李晬光)
* 범자(梵字) 기원설: 불경과 함께 고대 인도 문자가 전해져, 그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성현, 이수광(李晬光)
* 고대 문자 전래설: 훈민정음 이전 민간에서 전해지던 고대문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설.
* 고대 문자 전래설: 훈민정음 이전 민간에서 전해지던 고대문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설.
* 창문 상형설: 한옥의 창살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 에카르트(P. A. Eckardt)
* 창문 상형설: 한옥의 창살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 에카르트(P. A. Eckardt)
* 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ref>[[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문화〉, 한글 창제.</ref>
* 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ref>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문화〉, 한글 창제. </ref>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 각각에 대한 창제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기본 자음 5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추상화하고, 기본 모음 3자는 천지인 3재를 상징하여 창제되었고 다른 글자들이 획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여러 이설들을 잠재우고 정설이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 각각에 대한 창제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기본 자음 5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추상화하고, 기본 모음 3자는 천지인 3재를 상징하여 창제되었고 다른 글자들이 획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여러 이설들을 잠재우고 정설이 되었다.


== 역사 ==
== 역사 ==
[[파일:Hunmin jeong-eum.jpg|thumb|[[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두]]
[[파일:Hunmin jeong-eum.jpg|thumb|left|[[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두]]
{{-}}
=== 창제 ===
=== 창제 ===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또한 음절의 경우의 수가 많은 한국어 특성상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한자의 가짓수도 더 많아진다. 구결자는 일본어의 가나와는 달리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갑, 간, 갓) 초성, 중성만 존재(가, 나, 다)하는 가나보다도 가짓수가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문자생활의 불편은 한자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생활의 불편은 한자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에 관하여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첫째 한국어는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에 관하여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첫째 한국어는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ref>“훈민정음은 백성(百姓) 가르치시는 정(正)한 소리라”(현대어 표기로 옮김), 세종어제훈민정음, [[월인석보]]. [[1459년]].</ref>,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ref> “훈민정음은 백성(百姓) 가르치시는 정(正)한 소리라”(현대어 표기로 옮김), 세종어제훈민정음, [[월인석보]]. [[1459년]]. </ref>,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후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것의 발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목적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훈민정음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는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경이 운서를 아는가? [[동국정운#체계|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가? 만일 짐이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후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 (국가)|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것의 발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목적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훈민정음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는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경이 운서를 아는가? [[동국정운#체계|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가? 만일 짐이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낱자 28글자와 성조를 나타내는 기호([[방점]])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ㅿ]], [[ㆁ]], [[ㆆ]], [[ㆍ]] 네 글자와 성조 기호([[방점]])가 사라져서 24글자가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몇 곳에서는 아직도 ㆍ의 발음이 남아 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낱자 28글자와 성조를 나타내는 기호([[방점]])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ㅿ]], [[ㆁ]], [[ㆆ]], [[ㆍ]] 네 글자와 성조 기호([[방점]])가 사라져서 24글자가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몇 곳에서는 아직도 ㆍ의 발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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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제 논란 ===
=== 친제 논란 ===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이다. 창제 당시에 한글은 '훈민정음'이라 불렸으며 [[1446년]] 음력 [[9월]] 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책으로 엮어졌다. 이 사실은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序)로 확인된다.<ref>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하게 예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정인지, 서(序), 훈민정음. [[1446년]].</ref>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이다. 창제 당시에 한글은 '훈민정음'이라 불렸으며 [[1446년]] 음력 [[9월]] 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책으로 엮어졌다. 이 사실은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序)로 확인된다.<ref> 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하게 예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정인지, 서(序), 훈민정음. [[1446년]]. </ref>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종대왕이 홀로 글을 창제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글을 창제했는지가 문제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ref>“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세종실록 25년 [[12월]].</ref>,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ref>정인지는 훈민정음을 지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의 편찬을 명했다고 적고 있다. 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더하여 사람들을 깨우치라고 명하시어… 여러 풀이와 예를 지어 그 개요를 펴내니), 정인지, 서, 훈민정음. [[1446년]].</ref>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종대왕이 홀로 글을 창제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글을 창제했는지가 문제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ref>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세종실록 25년 [[12월]]. </ref>,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ref> 정인지는 훈민정음을 지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의 편찬을 명했다고 적고 있다. 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더하여 사람들을 깨우치라고 명하시어… 여러 풀이와 예를 지어 그 개요를 펴내니), 정인지, 서, 훈민정음. [[1446년]]. </ref>


다시 말하면 시월 상친제언문이십팔자(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세종 25년, [[12월 30일]])에서 ‘상친제(上親制)’란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는 뜻인데 '세종실록' 안에는 다른 업적에 관해서는 "친제"라는 말이 없었지만, 훈민정음(한글)에 관해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 중에도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는 내용이 있다.<ref>"錢下槍制', 훈민정음 해례본</ref>  
다시 말하면 시월 상친제언문이십팔자(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세종 25년, [[12월 30일]])에서 ‘상친제(上親制)’란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는 뜻인데 '세종실록' 안에는 다른 업적에 관해서는 "친제"라는 말이 없었지만, 훈민정음(한글)에 관해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 중에도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는 내용이 있다.<ref> "錢下槍制', 훈민정음 해례본</ref>  


그러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7권에서 세종이 [[언문청]]을 세워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글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년]])에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관여했다는 설이 우세하게 되었으나, [[이기문(언어학자)|이기문]]을 비롯한 학자들은 기록에 나타난 당시 정황을 볼 때 세종이 한글을 홀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창제 후 세종은 [[표음주의 표기]]가 일반적인 당대의 표기법과는 달리 [[형태주의 표기]]를 주로 활용하고 [[동국정운]] 같은 책을 편찬한 예에서 보듯이 국어와 [[중국어]]의 전반에 걸쳐 음운학 및 언어학에 깊은 조예와 지식을 보여 주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후 [[정음청]]에서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ref>훈민정음 친제론, 이기문, 한국문화 제13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2년]].</ref>
그러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7권에서 세종이 [[언문청]]을 세워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글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년]])에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관여했다는 설이 우세하게 되었으나, [[이기문(언어학자)|이기문]]을 비롯한 학자들은 기록에 나타난 당시 정황을 볼 때 세종이 한글을 홀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창제 후 세종은 [[표음주의 표기]]가 일반적인 당대의 표기법과는 달리 [[형태주의 표기]]를 주로 활용하고 [[동국정운]] 같은 책을 편찬한 예에서 보듯이 국어와 [[중국어]]의 전반에 걸쳐 음운학 및 언어학에 깊은 조예와 지식을 보여 주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후 [[정음청]]에서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ref> 훈민정음 친제론, 이기문, 한국문화 제13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2년]]. </ref>


=== 조선 ===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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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후 ===
=== 근대 이후 ===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國文)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ref>第十四條 法律勅令總以國文爲本漢文附譯或用國漢文</ref>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ref>第九條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써 本을 삼꼬 漢譯을 附하며 或國漢文을 混用홈</ref> 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1905년]]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한 6개 항목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으나,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5월|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었는데, 국문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 및 [[어윤적]], 이종일(李鍾一), 이억(李億),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지석영]], [[이민응]](李敏應)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國文)이라고 하여, {{날짜/출력|1894-11-21}}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ref> 第十四條 法律勅令總以國文爲本漢文附譯或用國漢文 </ref>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ref> 第九條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써 本을 삼꼬 漢譯을 附하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ref>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1905년]]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한 6개 항목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으나,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5월|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날짜/출력|1907-7-8}}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었는데, 국문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날짜/출력|1909-12-28}}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 및 [[어윤적]], 이종일(李鍾一), 이억(李億),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지석영]], [[이민응]](李敏應)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崔光玉)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兪吉濬)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金熙祥)의 초등국어어전(初等國語語典),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南宮檍)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李常春)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崔光玉)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兪吉濬)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金熙祥)의 초등국어어전(初等國語語典),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南宮檍)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李常春)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와 같은 모임에서 꾸준히 애쓴 덕에 조금씩 한국어의 표준 문자로 힘을 얻게 되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지은 것이며 조선어학회가 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다음에는 남북한 모두 공문서와 법전에 한글을 쓰게 되었고, 끝내 한국어를 받아 적는 큰 글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만, 현재 북한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글'이라 한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와 같은 모임에서 꾸준히 애쓴 덕에 조금씩 한국어의 표준 문자로 힘을 얻게 되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지은 것이며 조선어학회가 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다음에는 남북한 모두 공문서와 법전에 한글을 쓰게 되었고, 끝내 한국어를 받아 적는 큰 글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만, 현재 북한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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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
== 구성 ==
=== 창제 원리 ===
=== 창제 원리 ===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바탕으로 한글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바탕으로 한글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가.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가.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 기본 모음'ㆍ, ㅡ, ㅣ'를 보면 'ㆍ'(아래 아)는 양(陽)인 하늘(天)을 본 떠 만들고, 'ㅡ'는 음(陰)인 땅(地)을 본 떠 만들었으며 'ㅣ'는 음과 양의 중간자인 인간(人)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다. [[천지인]](天地人)은 [[단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나타낸다.<ref>{{뉴스 인용|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546339&cloc=olink|article|default|제목=‘천지인’ 개발자 특허권 기부 … 표준 제정 임박|성=|이름=최현철 기자|작성일자=2010-10-20|출판사=중앙일보|확인일자=2012-11-15}}</ref>
* 기본 모음'ㆍ, ㅡ, ㅣ'를 보면 'ㆍ'(아래 아)는 양(陽)인 하늘(天)을 본 떠 만들고, 'ㅡ'는 음(陰)인 땅(地)을 본 떠 만들었으며 'ㅣ'는 음과 양의 중간자인 인간(人)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다. [[천지인]](天地人)은 [[단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나타낸다. <ref>{{뉴스 인용|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546339&cloc=olink|article|default|제목=‘천지인’ 개발자 특허권 기부 … 표준 제정 임박|성=|이름=최현철 기자|작성일자=2010-10-20|출판사=중앙일보|확인일자=2012-11-15}}</ref>
 
*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ㅏ,ㅑ, ㅗ, ㅛ'는 'ㆍ'(아래 아) 계열의 글자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ㅏ,ㅑ, ㅗ, ㅛ'는 'ㆍ'(아래 아) 계열의 글자이다.
'ㆍ'(아래 아)의 속성은 양이다. 양의 특성은 위로의 상승, 바깥으로의 확장이다. 따라서 점을 위, 바깥 쪽에다 찍은 것.
'ㆍ'(아래 아)의 속성은 양이다. 양의 특성은 위로의 상승, 바깥으로의 확장이다. 따라서 점을 위, 바깥 쪽에다 찍은 것.
* 'ㅓ, ㅕ, ㅜ, ㅠ'는 그 반대로 'ㅡ' 계열의 글자이기 때문에 음의 속성을 따라, 하강, 수축의 뜻으로 점을 안쪽, 아래로 찍은 것.
* 'ㅓ, ㅕ, ㅜ, ㅠ'는 그 반대로 'ㅡ' 계열의 글자이기 때문에 음의 속성을 따라, 하강, 수축의 뜻으로 점을 안쪽, 아래로 찍은 것.  
 
나. [[자음]]은 [[오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나. [[자음]]은 [[오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각 방위와 발음기관을 연결시키고, 해당 발음기관에서 나는 소리 또한 방위와 연관시키고 있다. 방위는 또 계절과 연결이 되므로, 결국 소리는 계절과 연결된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각 방위와 발음기관을 연결시키고, 해당 발음기관에서 나는 소리 또한 방위와 연관시키고 있다. 방위는 또 계절과 연결이 되므로, 결국 소리는 계절과 연결된다.  
 
(소리=방위=계절, 소리=계절) 계절은 봄, 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 순이므로, 소리 역시 어금닛소리(ㄱ, 봄), 혓소리(ㄴ, 여름), 입술소리(ㅁ, 늦여름), 잇소리(ㅅ, 가을), 목소리(ㅇ,겨울) 순으로 배열한다.  
(소리=방위=계절, 소리=계절) 계절은 봄, 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 순이므로, 소리 역시 어금닛소리(ㄱ, 봄), 혓소리(ㄴ, 여름), 입술소리(ㅁ, 늦여름), 잇소리(ㅅ, 가을), 목소리(ㅇ,겨울) 순으로 배열한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기본 자음을 ㄱ,ㄴ,ㅁ,ㅅ,ㅇ,ㄹ 순으로 배열한 것은 오행 원리와 연관이 있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기본 자음을 ㄱ,ㄴ,ㅁ,ㅅ,ㅇ,ㄹ 순으로 배열한 것은 오행 원리와 연관이 있다.
 
{| class = "wikitable"
{| class = "wikitable"
|+ 자음과 오행의 관계 정리표
|+ 자음과 오행의 관계 정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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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낱자 자체의 칭호법(稱號法)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중종 때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이르러 각 낱자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기역, 디귿, 시옷은 이두식 한자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제시대의 [[언문 철자법]]을 거쳐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1231.html (북녘말) 기윽 디읃 시읏 / 김태훈, 한겨레]</ref>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낱자 자체의 칭호법(稱號法)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중종 때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이르러 각 낱자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기역, 디귿, 시옷은 이두식 한자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제시대의 [[언문 철자법]]을 거쳐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1231.html (북녘말) 기윽 디읃 시읏 / 김태훈, 한겨레]</ref>


각 자모에 대한 소릿값을 살펴보면, 첫소리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反舌半齒)의 7음으로 구별하였고, 모음은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7음과 각 자모의 독특한 배열 순서는 중국 운서(韻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쓸 적에는 각 낱자를 독립시켜 소리 나는 차례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닿소리와 홀소리를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ㅗ ㅜ ㅛ ㅠ >는 자음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 쓰기로 하였다. 즉 음절문자(音節文字)로 하되, 그 모양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자의 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각 자모에 대한 소릿값을 살펴보면, 첫소리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反舌半齒)의 7음으로 구별하였고, 모음은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7음과 각 자모의 독특한 배열 순서는 중국 운서(韻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쓸 적에는 각 낱자를 독립시켜 소리 나는 차례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닿소리와 홀소리를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ㅗ ㅜ ㅛ ㅠ >는 자음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 쓰기로 하였다. 즉 음절문자(音節文字)로 하되, 그 모양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자의 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 자음 ====
==== 자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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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기 가능한 글자 수와 소리나는 음절 개수 ===
=== 표기 가능한 글자 수와 소리나는 음절 개수 ===
{{안내문|독자연구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폐지된 낱자를 포함하여 기본 [[닿소리]]를 다 나열해보면<br>
폐지된 낱자를 포함해 모든 기본 [[닿소리]]를 다 나열해보면
[[ㄱ]], [[ㅋ]], [[ㄲ]], [[ㆁ]], [[ㄷ]], [[ㅌ]], [[ㄸ]], [[ㄴ]], [[ㄹ]], [[ᄛ]], [[ㅂ]], [[ㅸ]], [[ㅍ]], [[ㆄ]], [[ㅃ]], [[ㅹ]], [[ㅁ]], [[ㅱ]], [[ㅅ]], [[ᄼ]], [[ᄾ]], [[ㅆ]], [[ᄽ]], [[ᄿ]], [[ㅈ]], [[ᅎ]], [[ᅐ]], [[ㅉ]], [[ᅏ]], [[ᅑ]], [[ㅊ]], [[ᅔ]], [[ᅕ]], [[ㅿ]], [[ㆆ]], [[ㅎ]], [[ㆅ]], [[]]<br>
 
따위로 총 37개다.
[[ㄱ]], [[ㅋ]], [[ㄲ]](ㅺ), [[ㆁ]], [[ㄷ]], [[ㅌ]], [[ㄸ]], [[ㄴ]], [[ㄹ]], [[ᄛ]], [[ㅂ]], [[ㅸ]], [[ㅍ]], [[ㆄ]], [[ㅃ]](ㅽ), [[ㅹ]], [[ㅁ]], [[ㅱ]], [[ㅅ]], [[ᄼ]], [[ᄾ]], [[ㅆ]](ㅄ), [[ᄽ]], [[ᄿ]], [[ㅈ]], [[ᅎ]], [[ᅐ]], [[ㅉ]], [[ᅏ]], [[ᅑ]], [[ㅊ]], [[ᅔ]], [[ᅕ]], [[ㅿ]], [[ㆆ]], [[ㅎ]], [[ㆅ]] 따위의 36개이다.
 
[[홀소리]]
 
[[ㆍ]][[ᅟᆝ]][[ㅏ]][[ㅑ]][[ㅓ]][[ㅕ]][[ㅗ]][[ㅛ]][[ㅜ]][[ㅠ]][[ᅟᆜ]][[ᅟퟄ]]


[[홀소리]]는<br>
[[ㆍ]][[ᅟᆝ]][[ㅏ]][[ㅑ]][[ㅓ]][[ㅕ]][[ㅗ]][[ㅛ]][[ㅜ]][[ㅠ]][[ᅟᆜ]][[ᅟퟄ]]<br>
따위로 12 개.
따위로 12 개.


합해서 총 '''48'''개나 된다. 또 나머지 이중 모음, 합용 병서까지 다 나열하려면 [[페르마의 정리|여백이 부족]]하여 기본 글자만 나열하였다.
합해서 총 '''49'''개나 된다. 또 나머지 이중 모음, 합용 병서까지 다 나열하려면 [[페르마의 정리|여백이 부족]]하여 기본 글자만 나열하였다.


한편 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27 + 끝소리 없음 1))글자 마디를 쓸 수 있다. 11,172자 중 399자는 무받침 글자이며 10,773자는 받침 글자이다. 사용 빈도는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2,350글자가 상위 99.9%로 알려져 있다.
한편 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27 + 끝소리 없음 1))글자 마디를 쓸 수 있다. 11,172자 중 399자는 무받침 글자이며 10,773자는 받침 글자이다. 사용 빈도는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2,350글자가 상위 99.9%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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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성, 종성만 있는 비표준 한글(124×137): 16,988개
** 초성, 종성만 있는 비표준 한글(124×137): 16,988개
* ∴ 표준 한글 총 갯수(조합 가능한 한글 코드 − 비표준 한글): 1,639,011개
* ∴ 표준 한글 총 갯수(조합 가능한 한글 코드 − 비표준 한글): 1,639,011개
==컴퓨터에서의 표기==
===조합형(첫가끝)===
{{인용문|이것은 바로 첫가끝이다<ref>[http://ohi.pat.im/ 여기]서 입력해 [https://mothereff.in/utf-8 여기]서 비교해 보면 완성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ref>}}
조합형은 한글을 낱자별로 풀어 저장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감'이란 글자는 'ㄱ+ㅏ+ㅁ'으로 저장된다.
예전에는 완성형에는 모든 글자가 수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꽤 쓰였지만, [[유니코드]]의 도입 이후로는 낱자별로 저장하기 때문에 크기가 3배나 늘어나 [[옛한글]]표기, [[mac OS]]를 제외하면 잘 쓰이지 않는다.
=== 완성형 ===
{{인용문|이것은 바로 완성형이다}}
가-힣까지 모든 글자가 있는 표를 만들고 거기서 꺼내 쓰는 방식. [[유니코드]]도입 전에는 표의 용량이 적어 표기하지 못하는 글자가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유니코드]] 도입 후에는 거의 모든 한글은 이 방식으로 표기된다.


== 한글에 관한 이설 ==
== 한글에 관한 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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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증거로 레드야드는 ㄷ의 좌측 상단에 작게 삐져나온 형상(입술 모양으로)은 파스파 문자의 ''d''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입술 모양은 티벳 문자의 ''d''인 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증거로 레드야드는 ㄷ의 좌측 상단에 작게 삐져나온 형상(입술 모양으로)은 파스파 문자의 ''d''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입술 모양은 티벳 문자의 ''d''인 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레드야드의 이러한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티벳 문자→[[브라미 문자]]→[[아람 문자]]를 거슬러올라가 결국 중동 [[페니키아 문자]]의 일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레드야드 본인은 한글이 조음부위별로 기본형이 되는 5자의 구조만 파스파문자를 참고해 만들어졌을 뿐, 나머지 과정은 중국 운서의 음운론 지식에 따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실제 한글의 창제과정에서 파스파문자가 준 영향은 극초기에 제한된 미미한 수준이므로, 한글이 파스파문자의 변형이라는 식의 논리비약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만약 레드야드의 이러한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티벳 문자→[[브라미 문자]]→[[아람 문자]]를 거슬러올라가 결국 중동 [[페니키아 문자]]의 일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레드야드 본인은 한글이 조음부위별로 기본형이 되는 5자의 구조만 파스파문자를 참고해 만들어졌을 뿐, 나머지 과정은 중국 운서의 음운론 지식에 따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실제 한글의 창제과정에서 파스파문자가 준 영향은 극초기에 제한된 미미한 수준이므로, 한글이 파스파문자의 변형이라는 식의 논리비약으로 이어져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기원설에 대해 [[2009년]] 국어학자 [[정광]](鄭光)은 훈민정음이 36개 중국어 초성을 기본으로 하는 등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지만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반론하였다.<ref name="조선_1">[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346.html [Why] 세종대왕 한글 창제가 '표절' 누명 쓰고 있다고?], 《조선닷컴》, 2009.10.10.</ref>
아무튼 이런 종류의 기원설에 대해 [[2009년]] 국어학자 [[정광]](鄭光)은 훈민정음이 36개 중국어 초성을 기본으로 하는 등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지만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반론하였다.<ref name="조선_1">[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346.html [Why] 세종대왕 한글 창제가 '표절' 누명 쓰고 있다고?], 《조선닷컴》, 2009.10.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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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9월|1983년 9월]] KBS가 방영한 8부작 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은<ref>《新往五天竺國傳(신왕오천축국전)》. 문순태, KBS 특별취재반. 한국방송사업단, 1983. 참조</ref> [[구자라트 문자]]를 소개하면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으며,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83년#9월|1983년 9월]] KBS가 방영한 8부작 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은<ref>《新往五天竺國傳(신왕오천축국전)》. 문순태, KBS 특별취재반. 한국방송사업단, 1983. 참조</ref> [[구자라트 문자]]를 소개하면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으며,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천학회 회장 송호수<ref>당시 보도에는 S베일러대 교수로 소개되었다.</ref> 는 [[1984년]] 이를 인용하면서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ref>〈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송호수,《廣場(광장)》[[1984년#1월|1984년 1월]]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ref><ref>[http://kang.chungbuk.ac.kr/zbxe/news/12160/page/2 일본 神代文字 논란], 충북대학 국어국문학과 국어학강의실</ref>
또한, 개천학회 회장 송호수<ref>당시 보도에는 S베일러대 교수로 소개되었다.</ref>는 [[1984년]] 이를 인용하면서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ref>〈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송호수,《廣場(광장)》[[1984년#1월|1984년 1월]]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ref><ref>[http://kang.chungbuk.ac.kr/zbxe/news/12160/page/2 일본 神代文字 논란], 충북대학 국어국문학과 국어학강의실</ref>


그러나 구자라트 문자는 문자 구성상 자모로 완전히 분리되는 한글과는 달리 모든 자음이 [[딸림 모음]]을 수반하는 [[아부기다]]이며, [[데바나가리 문자]]에서 수직선을 제거한 데바나가리 파생문자로서 다른 인도계 여러문자와 친족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는 구자라트 문자의 특정 글자체와 한글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대한 착오일 뿐이다.<ref>[http://www.korean.go.kr/nkview/nknews/199910/15_3.htm 〈한글과 비슷한(?) 구자라트 문자〉], 김광해, 《새국어소식》[[1999년#10월|1999년 10월]]호. 한국어문진흥회</ref>
그러나 구자라트 문자는 문자 구성상 자모로 완전히 분리되는 한글과는 달리 모든 자음이 [[딸림 모음]]을 수반하는 [[아부기다]]이며, [[데바나가리 문자]]에서 수직선을 제거한 데바나가리 파생문자로서 다른 인도계 여러문자와 친족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는 구자라트 문자의 특정 글자체와 한글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대한 착오일 뿐이다. <ref>[http://www.korean.go.kr/nkview/nknews/199910/15_3.htm 〈한글과 비슷한(?) 구자라트 문자〉], 김광해, 《새국어소식》[[1999년#10월|1999년 10월]]호. 한국어문진흥회</ref>


=== 다른 언어에서의 한글 사용 ===
=== 다른 언어에서의 한글 사용 ===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되었다.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는 한글을 표기 문자로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2012년]] [[솔로몬제도]]의 토착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교육하는 활동이 시작됐다. [[2012년#10월|2012년 10월]] 현재 시행되는 것은 2개 언어이며 결과에 따라 솔로몬제도 전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100909363838562&outlink=1 솔로몬제도 일부 州,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ref>  
이밖에도 한국에서는 한글을 표기 문자로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2012년]] [[솔로몬제도]]의 토착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교육하는 활동이 시작됐다. [[2012년#10월|2012년 10월]] 현재 시행되는 것은 2개 언어이며 결과에 따라 솔로몬제도 전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100909363838562&outlink=1 솔로몬제도 일부 州,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ref>  


간혹,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옛한글 등을 부활시킨 표기법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개인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어]]나 [[인공 문자]] [http://www.omniglot.com/writing/jingbu.htm 井卜文(Jingbu Script)] 등에서 일부 한글 또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문자를 개인 수준에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간혹,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옛한글 등을 부활시킨 표기법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개인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어]]나 [[인공 문자]] [http://www.omniglot.com/writing/jingbu.htm 井卜文(Jingbu Script)] 등에서 일부 한글 또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문자를 개인 수준에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 한글의 오해 ==
== 한글의 오해 ==
*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록물 자체만을 등록 대상으로 한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록물 자체만을 등록 대상으로 한다.
* 실제의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한글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보다 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가 적다.
* 실제의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한글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보다 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가 적다.
**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언어학적 명제가 아니고, 창제 당시에 '모든 소리는 기본 5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한 철학적 표현이다.
**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언어학적 명제가 아니고, 창제 당시에 '모든 소리는 기본 5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한 철학적 표현이다.
** 한글 낱자는 모두 소릿값이 확정되어 있고 실제 한글 쓰임에서는 모아쓰기의 규칙도 정해져 있으므로, 한글로 표현되는 소리의 숫자는 본래 유한하며, 한글은 기본적으로 한국어에 맞추어져 있다.
** 한글 낱자는 모두 소릿값이 확정되어 있고 실제 한글 쓰임에서는 모아쓰기의 규칙도 정해져 있으므로, 한글로 표현되는 소리의 숫자는 본래 유한하며, 한글은 기본적으로 한국어에 맞추어져 있다.
** 현재 한글은 한국어 발음에만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의 훈민정음에서는 모아쓰기가 좀 더 다양하며, 아울러 동국정운에 따르면 실제의 한국어 발음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한자음도 훈민정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 현재 한글은 한국어 발음에만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의 훈민정음에서는 모아쓰기가 좀 더 다양하며, 아울러 동국정운에 따르면 실제의 한국어 발음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한자음도 훈민정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 한글은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글자]]의 이름이다.
* 한글은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글자]]의 이름이다.
** 창제 당시의 이름인 '훈민정음'과 그 약칭인 '정음'도 본래 글자의 이름이었다.
** 창제 당시의 이름인 '훈민정음'과 그 약칭인 '정음'도 본래 글자의 이름이었다.
* [[찌아찌아족]]의 [[찌아찌아어]]의 표기에는 사용되나 공식은 아니다.
* [[찌아찌아족]]의 [[찌아찌아어]]의 표기에는 사용되나 공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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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국어를 나타내는 글자는 보통 한글이고, 무언가 (의미 있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면 보통 한국어일 것인 점, 특히 아무래도 음성보다는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텍스트가 지배적인 전달 수단인 비디오 게임에서의 한국어 번역은 그 텍스트를 한글로(한글로 적힌 한국어로) 바꾸는 것이 주된 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구분을 잘 하지 않고 이래저래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다만 한국어를 나타내는 글자는 보통 한글이고, 무언가 (의미 있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면 보통 한국어일 것인 점, 특히 아무래도 음성보다는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텍스트가 지배적인 전달 수단인 비디오 게임에서의 한국어 번역은 그 텍스트를 한글로(한글로 적힌 한국어로) 바꾸는 것이 주된 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구분을 잘 하지 않고 이래저래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이 아랍 문자를 지렁이 글씨라고 하듯,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한글을 보면 뭔가 기호나 무늬의 조합체로 보기도 한다. 일례로 '[[옷]]'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스위스]]'는 산 중에 창 들고 서 있는 근위병을 묘사한 것 같다 [[카더라]].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한글 낱자]]
* [[현대 한글 11172자]]
* [[훈민정음]]
* [[훈민정음 언해본]]
* [[훈민정음 해례본]]
*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란]]
*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란]]


{{주석}}
{{주석}}
{{한글}}
{{옛한글}}
{{퍼온문서|한글||일부}}
[[분류: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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