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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공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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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럽 연도 = 1956-1974<br/>1974-1977
| 클럽 연도 = 1956-1974<br/>1975-1977
| 클럽 소속 = [[산투스 FC]]<br/>뉴욕 코스모스
| 클럽 소속 = [[산투스 FC]]<br/>뉴욕 코스모스
| 클럽 경기 (득점) = 638 (619)<br/>56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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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의 나이로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ref>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ref> 1957년에 펠레는 16살의 나이로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의 나이로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ref>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ref> 1957년에 펠레는 16살의 나이로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팀의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의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다.<ref>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ref>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ref>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의 우승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ref>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ref>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ref>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팀의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의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다.<ref>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ref>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ref>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의 우승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ref>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ref>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ref>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ref>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ref>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의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 CP 2연패의 [[CA 페냐롤|페냐롤]], 유러피언컵 2연패의 [[SL 벤피카|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s>[[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s>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ref>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ref>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의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 CP 2연패의 [[CA 페냐롤|페냐롤]], 유러피언컵 2연패의 [[SL 벤피카|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s>[[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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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s>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s>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s>당연히</s> 전부 우승했다.<ref>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ref>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ref>RSPS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와 공동우승.</ref> <s>당연히</s> 득점왕도 2개 챙겼다. <s>참 쉽죠?</s>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의 혈투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ref>이후 브라질 축구협회의 참가거부, 산투스의 자체적인 포기 등으로 인해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ref>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s>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s>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s>당연히</s> 전부 우승했다.<ref>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ref>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ref>RSPS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와 공동우승.</ref> <s>당연히</s> 득점왕도 2개 챙겼다. <s>참 쉽죠?</s>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의 혈투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ref>이후 브라질 축구협회의 참가거부, 산투스의 자체적인 포기 등으로 인해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ref>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s>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s>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s>진짜 끝난 거 맞아?</s>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의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은퇴를 선언한 뒤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s>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s>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s>진짜 끝난 거 맞아?</s>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의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 뉴욕 코스모스(1974-1977) ===
=== 뉴욕 코스모스(1975-1977) ===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의 존재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의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 경력 ==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ref>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ref>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ref>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s>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s></ref>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ref>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ref>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 위상 ==
== 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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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콘티넨털컵]]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컵]]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 슈퍼컵 : 1968-69
* 인터콘티넨털 슈퍼컵 : 1968-69
'''뉴욕 코스모스'''
* 북미축구리그(NASL)<ref>현재의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ref> : 1977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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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경력 ==
== 수상 경력 ==
* 남미 올해의 선수 : 1973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ref>타사 브라질</ref> 득점왕 :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 득점왕 : 196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 1965
* [[FIFA 월드컵|월드컵]] 골든볼<ref>골든볼의 공식적인 시상은 198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은 소급적용해서 FIFA에서 인정해주고 있다.</ref> : 1970; 실버볼 : 1958
* [[FIFA 월드컵|월드컵]] 실버부트 : 1958
* [[FIFA 월드컵|월드컵]] 최우수 신인상 : 1958
* [[FIFA 월드컵|월드컵]] 올스타팀<ref>1994년에 있었던 역대 올스타팀, 2002년에 있었던 드림팀에도 선정되었다.</ref> : 1958, 1970
*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선수 : 1959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 1959
* [[FIFA 100]]
* FIFA 세기의 선수<ref>기자단 투표와 FIFA매거진 독자 투표에서 1위를 했으며 인터넷 투표 1위 마라도나와 공동으로 선정되었다.</ref>
* 명예 발롱도르


== 펠레의 저주 ==
== 펠레의 저주 ==

2015년 6월 22일 (월) 16:49 판

틀:축구선수 정보

축구의 대명사,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축구의 神
저주의 달인

클럽 경력

산투스(1956-1974)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의 나이로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1] 1957년에 펠레는 16살의 나이로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팀의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의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다.[2]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3]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4]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5]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의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CP 2연패의 페냐롤, 유러피언컵 2연패의 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부 우승했다.[6]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7] 당연히 득점왕도 2개 챙겼다. 참 쉽죠?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의 혈투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8]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진짜 끝난 거 맞아?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의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뉴욕 코스모스(1975-1977)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의 존재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의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국가대표 경력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9]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10]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11]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위상

우승 경력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12] : 1961, 1962, 1963, 1964, 1965, 1968; 준우승 : 1959, 1966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준우승 : 1957, 1959
  •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 : 1959, 1963, 1964[13],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컵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 슈퍼컵 : 1968-69

뉴욕 코스모스

  • 북미축구리그(NASL)[14] : 1977

브라질

  • 월드컵 : 1958, 1962, 1970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 1959
  • 타사 다스 시모이스; 준우승 : 1964
  • 타사 두 아틀란치쿠 : 1960

수상 경력


펠레의 저주

통산 기록

시즌 클럽 SPS RSPS[19] 전국[20] 대륙 총계 비고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1957 산투스 FC 29 36 9 5 - - - - 38 41
1958 산투스 FC 38 58 8 8 - - - - 46 66
1959 산투스 FC 32 45 7 6 4 2 - - 43 53
1960 산투스 FC 30 33 3 0 - - - - 33 33
1961 산투스 FC 26 47 7 8 5 7 - - 38 62
1962 산투스 FC 26 37 0 0 5 2 6[21] 9[22] 37 48
1963 산투스 FC 19 22 8 14 4 8 5[23] 7[24] 36 51
1964 산투스 FC 21 34 4 3 6 7 0 0 31 44
1965 산투스 FC 30 49 7 5 4 2 7 8 48 64
1966 산투스 FC 14 13 0 0 5 2 - - 19 15
1967 산투스 FC 18 17 - - 14 9 - - 32 26
1968 산투스 FC 21 17 - - 17 11 - - 38 28
1969 산투스 FC 25 26 - - 12 12 - - 37 38
1970 산투스 FC 15 7 - - 13 4 - - 28 11
1971 산투스 FC 19 8 - - 21 1 - - 40 9
1972 산투스 FC 20 9 - - 16 5 - - 36 14
1973 산투스 FC 19 11 - - 30 19 - - 49 30
1974 산투스 FC 10 1 - - 17 9 - - 27 10
종합 브라질 412 470 53 49 173 100 18[25] 24[26] 656 643

각주

  1. 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
  2. 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
  3. 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의 우승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
  4. 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
  5. 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
  6. 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
  7. RSPS는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8. 이후 브라질 축구협회의 참가거부, 산투스의 자체적인 포기 등으로 인해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
  9.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
  10. 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
  11. 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
  12. 브라질 챔피언을 의미하는데 본문에도 나오지만 1959년부터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질이라는 주리그 챔피언들의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정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라는 리그가 존재했다. 대회가 두 개였던 67년과 68년에는 챔피언이 두 팀 존재했으며 지금과 같은 전국 각지의 클럽들이 참여하는 리그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13.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14. 현재의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
  15. 타사 브라질
  16. 골든볼의 공식적인 시상은 198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은 소급적용해서 FIFA에서 인정해주고 있다.
  17. 1994년에 있었던 역대 올스타팀, 2002년에 있었던 드림팀에도 선정되었다.
  18. 기자단 투표와 FIFA매거진 독자 투표에서 1위를 했으며 인터넷 투표 1위 마라도나와 공동으로 선정되었다.
  19. 1966년을 끝으로 폐지.
  20. 타사 브라질 +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 포함
  21.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22.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23.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24.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25.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26. 인터콘티넨털컵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