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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는 별명이 있다.
토마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오트볼타]]에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부르키나파소로 바꾸었다.<ref>부르키나파소의 뜻은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한다</ref>
그는 [[오트볼타]]에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부르키나파소로 바꾸었다.<ref>부르키나파소의 뜻은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한다</ref>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먼저 식량 자급률을 올리기 위해 공물 강요, 강제노역 동원 따위는 철저히 금지하고 농촌 지역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해온 부족장이 소유한 토지는 징발해 농민들에게 고루 분배하고 관개수로 정비와 비료 지원 사업을 했다. 그러더니 상카라 집권 4년 만에 식량자급을 이뤘다. 1984년 8월에는 토지와 광물자원을 국유화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먼저 식량 자급률을 올리고 여성 할례/강제결혼/일부 다처제를 금지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증가하고 소아마비·뇌수막염·황열병 등 각종 전염병을 박멸하기 위해 포괄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여성 할례/강제결혼/일부 다처제를 금지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증가하고 소아마비·뇌수막염·황열병 등 각종 전염병을 박멸하기 위해 포괄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황폐해진 산림 복원을 위해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간선도로가 전국을 이었고, 수백km의 철로가 마련됐다.  
황폐해진 산림 복원을 위해 줄잡아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간선도로가 전국을 이었고, 수백km의 철로가 마련됐다.  
그러나 1987년 10월 15일 자신의
그러나 1987년 10월 15일 자신의
친구인 [[블레즈 콩파오레]]에 의해 살해당했다.<ref>[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40560.html 꿈같았던 4년, 혁명가가 죽자 그 땅은 다시 가난해졌지], 한겨례, 2015. 10. 27.</ref>
친구인 [[블레즈 콩파오레]]에 의해 살해당했다.<ref>[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40560.html 꿈같았던 4년, 혁명가가 죽자 그 땅은 다시 가난해졌지], 한겨례, 2015. 10. 27.</ref>

2018년 11월 19일 (월) 05:08 판

토마 이지도르 노엘 상카라(Thomas Isidore Noël Sankara)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토마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오트볼타에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부르키나파소로 바꾸었다.[1]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먼저 식량 자급률을 올리고 여성 할례/강제결혼/일부 다처제를 금지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증가하고 소아마비·뇌수막염·황열병 등 각종 전염병을 박멸하기 위해 포괄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황폐해진 산림 복원을 위해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간선도로가 전국을 이었고, 수백km의 철로가 마련됐다. 그러나 1987년 10월 15일 자신의 친구인 블레즈 콩파오레에 의해 살해당했다.[2]

각주

  1. 부르키나파소의 뜻은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한다
  2. 꿈같았던 4년, 혁명가가 죽자 그 땅은 다시 가난해졌지, 한겨례, 2015.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