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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안흥성 항공.PNG|카카오 항공뷰로 본 안흥성|섬네일]] | ||
==개요== | ==개요== | ||
충청남도 태안반도 서남쪽 끝자락인 안흥항 뒷산에 자리한 둘레 약 1,560여m, 높이 약 3. | 충청남도 태안반도 서남쪽 끝자락인 안흥항 뒷산에 자리한 둘레 약 1,560여m, 높이 약 3.5m내외 의 성으로 형태상으로는 포곡식 산성에 해당하며, 기능상으로는 수군 첨절제사가 주둔하던 [[진성]]에 해당하는 성이다. 본래 안흥진성으로 불렀으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진이 탈락하고 안흥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이름이 현재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 ||
이 성은 우리나라 성들 중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라 할 수 있는 [[ | 이 성은 우리나라 성들 중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라 할 수 있는 조선 [[효종]]대에 축성된 성으로 경기도의 선비 김석견의 상소를 받아들여 인근 19개 군현의 주민을 동원하여 축성한 해안요새이다. | ||
성문은 동서남북 각 4개의 성문을 두고 있었으며 동문은 수성루, 남문은 복파루, 서문은 수홍루, 북문은 감성루라 하였는데 현재는 [[안흥항]] 쪽 출입구인 서문(수홍루) 쪽만 문루와 석축이 복원되어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복구계획만 잡혀있는 상황이다. | 성문은 동서남북 각 4개의 성문을 두고 있었으며 동문은 수성루, 남문은 복파루, 서문은 수홍루, 북문은 감성루라 하였는데 현재는 [[안흥항]]쪽 출입구인 서문(수홍루)쪽만 문루와 석축이 복원되어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복구계획만 잡혀있는 상황이다. | ||
안흥성은 수군 기지로 꽤 오랜 기능을 하였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아와 사찰 등 주요 시설물이 불타서 소실되고 현재의 시설은 후대에 복구한 것이다. 현재는 일부 구간의 경우 무너져서 토성처럼 보이는 구간이 꽤 있으나 이는 축성 당시 겉면은 석축으로 쌓고 안쪽은 토사를 다져넣은 외축내탁 공법을 쓴 흔적으로 봐야 하며 성 전체가 돌로 외축을 두른 석성에 해당한다. | 안흥성은 수군 기지로 꽤 오랜 기능을 하였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아와 사찰 등 주요 시설물이 불타서 소실되고 현재의 시설은 후대에 복구한 것이다. 현재는 일부 구간의 경우 무너져서 토성처럼 보이는 구간이 꽤 있으나 이는 축성 당시 겉면은 석축으로 쌓고 안쪽은 토사를 다져넣은 외축내탁 공법을 쓴 흔적으로 봐야 하며 성 전체가 돌로 외축을 두른 석성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