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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의 샨 주에서 활동한 후로 군 선배인 싸릳 타나랏을 따랐다. 타나랏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육군 핵심인사로 떠오름에 따라 그도 출세길이 훤히 열렸다. 롭부리 주 군부의 우두머리가 되고, 제11 보병사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1951년에는 타이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2년 뒤 1953년에는 한국 전쟁 종식 기념으로 타이를 대표하여 제1지역 사령관의 자격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의 샨 주에서 활동한 후로 군 선배인 싸릳 타나랏을 따랐다. 타나랏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육군 핵심인사로 떠오름에 따라 그도 출세길이 훤히 열렸다. 롭부리 주 군부의 우두머리가 되고, 제11 보병사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1951년에는 타이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2년 뒤 1953년에는 한국 전쟁 종식 기념으로 타이를 대표하여 제1지역 사령관의 자격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1958년 9월 18일, 그는 육군 중장의 신분으로 타나랏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당시 쁠랙 피불쏭크람 육군 원수가 이끌던 군사 독재 내각은 전복됐고, 덕분에 그는 새 타이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막후에서는 여전히 타나랏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 허수아비 수상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부정선거를 구실로 수상직을 사퇴하고 타나랏에게 넘겨주었다. 4년후 싸릳이 죽은 다음 날에 그는 다시 수상직에 오를 수 있었다.
1958년 9월 18일, 그는 육군 중장의 신분으로 타나랏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당시 쁠랙 피불쏭크람 육군 원수가 이끌던 군사 독재 내각은 전복됐고, 덕분에 그는 새 타이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막후에서는 여전히 타나랏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 허수아비 수상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부정선거를 구실로 수상직을 사퇴하고 타나랏에게 넘겨주었다. 4년후 타나랏이 죽은 다음 날에 그는 다시 수상직에 오를 수 있었다.


== 타이 수상 ==
== 타이 수상 ==

2017년 4월 15일 (토) 00: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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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넘 끼띠카쩐 (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1911년 8월 11일 ~ 2004년 6월 16일)은 타이의 군인이자 정치인, 교육인으로, 제10대 타이 수상직에 취임하며 10년간 군사 독재 정치를 펼쳐왔다. 수상 재임 기간 동안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타이 경제를 침체시켰으며, 일가와 측근들을 대동하여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끝내 10.14 사태에서 대량 학살을 저지르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종용으로 실각했다.

생애

1911년 8월 11일 딱 주의 타이 현지인과 중국인 핏줄이 섞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왕립육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치앙마이 주에 있는 제7 보병연대에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육군 보병 학교를 다니고 1학년 때 국방 대학교를 졸업한 적도 있다.

출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의 샨 주에서 활동한 후로 군 선배인 싸릳 타나랏을 따랐다. 타나랏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육군 핵심인사로 떠오름에 따라 그도 출세길이 훤히 열렸다. 롭부리 주 군부의 우두머리가 되고, 제11 보병사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심지어 1951년에는 타이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2년 뒤 1953년에는 한국 전쟁 종식 기념으로 타이를 대표하여 제1지역 사령관의 자격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1958년 9월 18일, 그는 육군 중장의 신분으로 타나랏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당시 쁠랙 피불쏭크람 육군 원수가 이끌던 군사 독재 내각은 전복됐고, 덕분에 그는 새 타이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막후에서는 여전히 타나랏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 허수아비 수상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부정선거를 구실로 수상직을 사퇴하고 타나랏에게 넘겨주었다. 4년후 타나랏이 죽은 다음 날에 그는 다시 수상직에 오를 수 있었다.

타이 수상

1963년 12월 9일에 다시 수상직에 오르고, 1968년 6월에 새 헌법을 개정시켰다. 타넘 본인은 수상의 지위로 국방장관, 공군 원수 등의 군 주요직을 독식했고, 통일 타이 인민당을 창당했다. 통일 타이 인민당원들 대다수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렇게 내외적으로 힘을 키워나간 그는 반공 모토를 내세웠으며,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보내서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이끄는 월남 공화국을 지원했다. 이 당시 그와 일가, 측근들은 타이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설수록 그는 매카시즘과 권력욕에 휩싸여, 반공을 핑계로 반대파들을 탄압했다. 1971년 11월 17일에는 의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정당 활동과 5인 이상 집회를 금지시켰다. 국회의 기능은 그가 직접 창설한 국가행정자문회의가 대신했다. 행정은 주춤하고 정책은 뒤로 밀려났으며, 인도차이나 자본주의 국가들이 차례로 멸망하며 난민들이 유입하고, 타이 각지에서 테러가 발생함에 따라 치안도 시궁창으로 변했다. 경제 또한 심각하게 침체되었다. 인플레이션으로 파업이 횡행하고, 타이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경작지의 부족으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더욱 증가했다. 그래서 1970년대 타이 농민의 인당 평균 수입은 49달러에 불과했다. 대조적으로 평균 국민 소득은 미화 125달러였고 도시 주민의 평균 국민 소득은 428달러였다.

농민 봉기

물론 타넘 본인은 이러한 국민들의 집단 항의를 공산주의자들의 전복 음모로 매도했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항의하는 반대파들을 무차별로 잡아들여 수감했고, 1974년 3월부터 1979년까지 21명의 치앙마이 주 시위 지도자들을 암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결국 1973년과 1974년간 농부들은 거리에 나와 지방 당국의 공무원들과 다른 관리들에게 항의했다. 사회적인 불만과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종속된 억압 계층의 긴급한 필요가 최전선에 몰리고, 쟁점들이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북쪽과 중앙 평야 지방의 세입자 농민들을 필두로 불만이 터져나왔고, 활동가들은 토지 저당과 불공정한 토지 임대, 토지 소유자, 토지 관리인에 대한 이러한 불만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수천명의 농민들이 집주인, 중개인 및 채권자로부터 토지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 방콕 의 수상 관저로 행진했다. 이 시위는 농민들의 의지와 태이 당국에 의한 수년간의 방치 이후 농업 분야의 경관을 변화시키는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결의를 시사했다.

1974 년 3월, NSCT 의 지원을받는 농민들은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열었으며, 쌀가격 인상 요구에 대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974년 8 월에서 11월 사이에 토지 분쟁이 널리 퍼졌고 불만이 방송되었다. 신문 보고서는 8개 지역에서 약 7,000명의 농부들이 정부가 요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분증을 버리고 자신들만의 독립 지역을 세우겠다는 위협을 보도했다.

1974년 11월 19일, 방콕에 모인 농민 대표들은 타이 농민 연맹의 설립을 선언했다. 타이 농민 연맹은 정부에 요구 목록을 전달했다. 정부는 점진적으로 FFT의 요구 중 일부에 동의했다. 종자법, 토지 임대법 및 온건 토지 개혁법을 포함하여 몇가지 농촌 개혁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1974년 3월부터 1975년 8월까지, 약 21명의 타이 농민 연맹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학생 봉기

1972년 11월, 각지 명문대학의 학생들이 창설한 NSCT는 일본 상품을 보이콧하기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것은 타넘 내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전략적으로 추진되었지만, 학생들의 의도를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NSCT는 쇼핑 센터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 "반일 식량 주간"을 선포했다. 그에게 새로운 경제 계획을 내세우고 항의 행진을 조직했다. NSCT가 국가주의 감정을 자극하면서 정당에 대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NSCT를 단속하는 것은 어려웠다.

일제 불매 캠페인의 성공으로 NSCT는 1972년 12월 정부의 집행 이사회령 제299호에 대응함으로써 더 명백한 입장을 취했다.이 법안은 의회가 사법부를 직접 관료적 통제하에 배치 할 수있게했다. 이것은 사법부에 대한 권한을 증가시켰다. NSCT는 타마쌋 대학 에서 밤새도록 앉아서 쭐랄롱꼰 대학으로 행진했다. 치앙마이 대학에서도 항의 집회가 열렸다. NSCT는 태국 변호사 협회와 언론인들에 의해 지원을 받았고, 3일 후, 정부는 법령을 철회했다.

1973년에, 람캄행 대학은 집권 정부에 대한 풍자를 게시했다. 이 풍자는 1973년 4월에 고위 군장교, 사업가, 영화 배우가 실종되어 추락한 퉁야이 사냥 스캔들과 관련이있다. 저명한 사업가뿐만와 인기 높은 영화 배우의 죽음은 은폐되기 어려웠다. 풍자는 공개적으로 일부 내용을 공개하여 전국적으로 진상규명이 요구됐다. 이 활동은 정부가 끼띠까쩐과 그의 측근인 쁘라팟 짜루싸티엔 국가행정자문회의 의장의 임기 를 1년 더 연장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NSCT는 잡혀간 학생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집회를 조직함으로서 대응했다. 그 후 정부는 시위대를 일으킨 5만의 대학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반발이 더 거세지자, 정부는 결국 학생들을 복직시켜줬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NSCT는 국민의 편에 서서 군사 정부에 대한 중산층의 의견을 수립하는데 도움이되었다는 평판을 얻었다. NSCT는 또한 효율적인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1973 년 10월까지 그들은 정치적 목소리를 얻었으며, 이전의 성공에 힘입어 단호한 행동을 취했다.

10.14 사태

1973년 10월 14일부터 1976년 10월 6일까지의 3년은 타이의 정치적 가능성과 변화로 가득찬 시기였다. 군대 통치하에 정치 활동이 제한된 단체들은 전례없는 숫자로 조직되고 항의했다. 모든 게층들은 불의에 도전하기 위해 계급과 사회적 신분을 초월했다. 그러나 1975년과 1976년 동안 학생, 언론인, 사회주의자, 종업원 및 농민들은 성희롱, 협박, 위협, 그리고 결국 암살의 대상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