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5.06.07 (사망 공표 06.11)

영원한 공포 영화의 아이콘.
영화에서는 악역이었으나, 삶에서는 선역을 맡은 인물.
2013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크리스토퍼 프랭크 카란디니 리 경(Sir Christopher Frank Carandini Lee) 1922년 5월 27일2015년 6월 7일.

영국의 前 배우, 前 작가, 前 가수. 악역 연기로 유명하며, 특히 해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드라큘라 시리즈로 유명해졌다. 이후에도 꾸준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들과 무게감있는 선역들을 소화해 내며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가 되었다. 장수, 다작한 배우로 유명하다. IMDB의 바이오그래피에는 "그는 그 세대의 배우 가운데에서 그토록 많은 수의 영화에 출연한 유일할 배우일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다. [1]유명한 역할로는 1957년 해머 스튜디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1960년대 해머 스튜디오 드라큘라 시리즈에서 드라큘라 백작,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윌리 웡카의 아버지, 스타 워즈 프리퀄 트릴로지에서 두쿠 백작, 반지의 제왕호빗 삼부작에서 사루만 등이 있다. 인격적으로도, 연기자로서의 역량으로도 존경받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

배우가 되기까지

1922년 런던에서 군인 아버지 조프리 트롤로프 리와 유명한 미인이었던 어머니 콘테사 에스텔 마리[2] 슬하에서 태어났다. 형제재매로는 누나 잔드라(Xandra Lee)가 있다. 1926년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린 크리스토퍼 리는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연기라는 것을 접해보게 된다. 학교 연극에서 룸펠슈틸츠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필 악역

이후 가족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된다. 재혼의 상대는 나중에 007 소설 시리즈의 작가가 될 이안 플레밍의 삼촌이었다. 인맥보소 한편 크리스토퍼 리는 서머 필즈 학교에서 계속해서 학교 연극에서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학교에 후에 대배우가 될 패트릭 맥니가 있어서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서머 필즈 학교는 대부분의 학생을 이튼으로 보내는 프렙 스쿨이었다. 크리스토퍼 리도 이튼을 가려고 하였으나 그놈의 수학 성적이 떨어져 학비를 더 내야 이튼에 갈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의 양아버지는 비싸진 학비를 견딜 여유가 없었기에 그는 웰링턴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웰링턴 대학에서 그는 라틴, 그리스어 공부 등 고전 공부로 장학금을 받고 생활한다. 그러나 1939년 그의 양아버지가 파산하면서 그는 웰링턴을 떠나게 된다.

그의 누나는 이미 취직을 한 상태였으나,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누나가 여름휴가로 유럽으로 놀러가면서 그도 유럽으로 건너간다. 여기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쫓겨냔 왕공 가문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다. 인맥보소 2 그는 누나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유럽에 머물렀으나, 유럽 전역에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영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하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비행 장교 크리스토퍼 리. 로마 해방 직후.

크리스토퍼 리는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핀란드 전장으로 향한다. 그는 자원봉사자의 지위였기에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곧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원래의 일자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제약회사의 직원으로 이직을 한 후 그 제약회사가 런던 밖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방위군(Home Guard)에 지원한다. 1941년 폐렴으로 쓰러진 후, 그는 아버지처럼 육군에서 복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 공군에 지원한다.

크리스토퍼 리는 조종사가 되기 위하여 의욕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최종 훈련 중 시야 흐릿해지며 두통을 느낀다. 시신경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이로서 리는 조종사로는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게 된다. 리는 비행장을 전전하였으나, 조종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동료 조종사의 죽음은 그의 실의를 더욱 깊게 했다.

그래도 뭔가 전쟁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크리스토퍼 리는 영국 왕실 공군 정보 기관(RAF Intelligence)에 지원한다. 조종 장교(Pilot Officer)로 승진된 그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비행장 간에 정보를 전달해주고, 폭격 시간을 조율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이탈리아로 재배치된 이후에는 비행 장교(Flying Officer)로 승진한다. 이후 그는 승진을 거듭했으며, SAS의 전신이 되는 Special Operations Executive, Long Range Desert Patrol에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는 때때로 SAS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저희는 지금까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냥 제가 특수 부대(Special Forces)에 있었다고만 말하도록 하죠. 원한다면 더 의미를 부여하세요.[3]

연기자로서

초기

종전 후 크리스토퍼 리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원래 직장에서 봉급을 올려주었으나,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국은 참전용사들을 대학으로 돌려보내 고전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는 라틴어를 너무 많이 잊었고, 통금을 지키기 싫다며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백수가 되어 할 일이 없던 크리스토퍼 리에게 사촌 니콜로 카란디니는 "배우가 돼보지 그러니, 크리스토퍼?"라며 배우가 될 것을 제안한다.

배우가 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리는 이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배우되면 굶어죽기 딱 좋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리는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에서 배우로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많다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특히 어머니쪽의 증조할머니였던 마리 카란디니는 오페라 가수로서 유명세를 떨쳤었다.

이후 그는 7년 계약으로 Company of Youths, 혹은 '매력학교(Charm School)'에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된다. 매력학교는 Rank organisation에서 운영하는 스타 양성소였다. 이곳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10년 동안 단역과 엑스트라를 전전하며 연기 훈련을 받는다. 초보 배우였던 그에게 가장 방해가 된 것은 195cm에 달하는 그의 키였다고 한다.

저는 거기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 거의 십 년을 보냈네요. 처음에는 저를 보고 배우를 하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고 하더군요. 참 어리석은 말이죠.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키가 작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고 봐라..."라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의 기술을 전혀 몰랐지만, 그 10년 동안 저는 매일 정말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했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때가 왔을 때 저는, 참 이상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캐릭터(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를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4]

리는 1952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무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지인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British National Studios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역할을 많이 맡게 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1952년 한 해 동안 페어뱅크스의 영화 중 16개에 등장했다. 물랑 루즈에 그가 출연한 것도 이 해였다. 이후 50년대 동안 크리스토퍼 리는 액션 배우로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1957~1976: 스타로 부상하다

해머 스튜디오와 만나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괴물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

1957년은 공포 영화 팬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으로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기 때문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탄생이었다. 이로서 해머 스튜디오가 이끄는 공포 영화의 동의 시대(Bronze Age)가 시작되었다.청동을 떠올리면 안된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괴물 역을, 피터 쿠싱은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을 맡았다. 이 둘은 이후 20편 이상의 영화에 공동 출연했으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후 리는 원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던 보리스 칼로프1958년작 "피의 복도"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Dracula 1958 c.jpg
드라큘라(1958)에서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

1958년, 크리스토퍼 리는 그의 인생 배역(?)이라고 할 만한 드라큘라 배역을 처음으로 맡았다. 드라큘라 (1958년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드라큘라 연기와 피터 쿠싱이 보여준 반 헬싱 연기는 벨라 루고시보리스 칼로프의 뒤를 잇는 새로운 공포 아이콘들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1965년,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에서 그는 다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드라큘라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고 고양이 하악질 하는 소리(...)를 낸다크리스토퍼 리는 원래에는 대사가 있었으나 자신이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사 처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만 작가였던 지미 생스터는 애초에 드라큘라에게는 대사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영화의 중심은 드라큘라를 부활시키는 과정이며, 드라큘라가 출연하는 시간 자체가 짧았기에 대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사 없이도 크리스토퍼 리는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드라큘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시작으로 후속 드라큘라 영화들에서 드라큘라 백작 본인 대신 백작을 부활시키는 과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백작은 점점 평면적이고 의미없는 캐릭터로 변해갔다.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 역할에 대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리의 말에 따르면, 해머 스튜디오는 반 애원, 반 협박으로 그를 계속해서 출연시켰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리의 출연료는 계속 올라가는데, 대규모 스튜디오가 아니었던 해머는 제대로 출연료를 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리 스스로도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여 연기 도전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해머 스튜디오는 "당신이 드라큘라 역할을 안 맡아주면 저 사람들은 모두 실업자 신세라고!"를 외치며 그를 억지로 출연시켰다.(...)

대충 이런 과정이었죠. 전화가 울리고 제 에이전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지미 카레라스(해머 스튜디오의 회장)가 전화 했습니다. 또 드라큘라 영화에요." 그리고 제가 말하죠. "집어치워! 드라큘라 영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지미 카레라스가 발작적인 상태로 저한테 전화를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짐, 하고 싶지 않아, 해야 할 의무도 없고." "아니, 자네는 이 역할을 맡을 의무가 있어!" 그리고 제가 말했죠. "왜?" 그가 대답하더군요. "이미 자네가 이 역할을 맡는다고 하면서 미국 배급업자한테 영화를 넘겼단 말일세. 이 역할을 맡지 않으면 자네도 잘 아는 사람들이 실직자가 될 것일세!" 심리적 협박이었죠. 그게 제가 그 영화들을 찍은 유일한 이유였습니다.[5]
— 크리스토퍼 리,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그는 드라큘라가 무덤에서 부활했다(Dracula has Risen From the Grave, 1968), 드라큘라의 환생 (1970), 드라큘라의 흉터 (Scars of Dracula, 1970), 드라큘라 A.D. 1972 (1972),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뱀파이어 신부 (1974) 등 총 일곱 편의 드라큘라 영화에 출연했다. 원래 소설 드라큘라의 팬이었던 크리스토퍼 리였지만, 드라큘라 역할이 그의 배우 경력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1973년 이후에는 드라큘라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말년까지도 그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지인들이 "드라큘라 영화들을 언급하지 마세요!"라는 경고를 할 정도로 드라큘라 배역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미이라 (1959)에서의 크리스토퍼 리

그는 드라큘라 이외에도 해머 스튜디오가 제작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미이라"에서 미라 캐리스 역할을 맡았으며, "지킬 박사의 두 얼굴"(The Two Faces of Dr. Jekyll, 1960)에서는 지킬의 아내와 바람을 피는 지킬의 친구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는 "라스푸틴:미친 수도승"(Rasputin:The Mad Monk, 1966)에서 라스푸틴 역할을, "배스커빌 가문의 개" (1959)에서는 셜록 홈즈(피터 쿠싱 분)의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 역을 맡았다. 1976년, "악마에게 딸을"(To the Devil a Daughter, 1976)을 끝으로 해머 스튜디오가 공포 영화 제작을 중단할 때까지 크리스토퍼 리와 해머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다른 배역들

크리스토퍼 리가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 계속 출연하던 시기에도 그는 더욱 흥미로운 배역을 찾아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배스커빌 가문의 개"로 시작된 홈즈와 리의 인연은 그 후로도 이어졌는데, 해머 스튜디오 영화는 아니었지만 1960년 "셜록 홈즈와 죽음의 목걸이"(Sherlock Holmes and the Deadly Necklace, 1960)에서 직접 셜록 홈즈 역할을 맡았다. 그는 영화 자체는 "가만히 내버려두는게 좋은(A movie well worth leaving alone)" 영화가 되어버렸다고 평했으나, 자신의 셜록 홈즈 연기에는 만족감을 표했다.

참 아쉬운 영화였지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영국 감독과 영국 미술 감독을 데리고 독일에서, 독일 배우들로 영화를 찍는게 아니었습니다. 독일 제작자들이 이런 저런 스토리들을 뒤죽박죽으로 합쳐 놓은 것이 영화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 홈즈 연기는, 제 생각이지만, 제가 연기한 최고의 역할 중 하나였어요. 홈즈가 쓰인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했거든요, 참을성 없고, 시비를 잘 걸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분장을 하고 나니 저는 놀랄 정도로 그와 닮았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해석에서나 외모에서나, 저의 홈즈 연기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비교해도 홈즈와 정말 유사하다고 말해요.[6]

— 크리스토퍼 리

미국으로의 이주

2000년대: 두쿠와 사루만

죽음

주요 작품

성우 활동

가수 활동

  1. http://www.imdb.com/name/nm0000489/bio
  2. 당시 그의 어머니는 여러 화가들이 그릴 정도로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각상도 제작되었다!
  3.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I’m softer than people think'
  4. The Total Film Interview - Christopher Lee
  5. Landis, John (2011). Monsters in the Movies: 100 Years of Cinematic Nightmares. Dorling Kindersley. p. 45. ISBN 978-1-4053-6697-7.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6. Davies, David Stuart. Holmes of the Movies: The Screen Career of Sherlock Holmes. Bramhall House,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