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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 25일 강원도 횡성현(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법부 주사(主事)를 지낸 최재건(崔在建)과 [[진주 강씨]] 강석원(姜錫元)의 딸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반집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5살 때인 1908년에 안씨와 결혼하여 화전리를 떠나 원주 소초면 둔둔리로 이사했다. | 1893년 12월 25일 강원도 횡성현(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법부 주사(主事)를 지낸 최재건(崔在建)과 [[진주 강씨]] 강석원(姜錫元)의 딸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반집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5살 때인 1908년에 안씨와 결혼하여 화전리를 떠나 원주 소초면 둔둔리로 이사했다. | ||
최양옥은 20세 되던 1913년 4월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서울 입정정(笠井町)에 위치한 부친의 친구 신병선(申炳善)의 집에 거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돌아온 신병선의 아들 [[ | 최양옥은 20세 되던 1913년 4월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서울 입정정(笠井町)에 위치한 부친의 친구 신병선(申炳善)의 집에 거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돌아온 신병선의 아들 [[신덕영]]을 만났고 그로부터 독립 운동에 가담하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수락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 ||
최양옥은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왔고 동지를 규합한 뒤 1919년 4월 1일 천도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감행했다. 1,300명에 달하는 군중은 장터에 몰려있다가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장터에 있던 광고판은 물론 군청과 면사무소에 있던 광고판을 부수면서 군청 쪽으로 몰려갔다. 상점과 술집은 대개 문을 닫았지만,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과 술집을 파괴했다. 이때 횡성에 유일하게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가쿠다'도 만세 군중에 의해 불타고 헌병보조원 감독으로 있던 이규화는 군중에게 매를 맞고 도망쳤다. | 최양옥은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왔고 동지를 규합한 뒤 1919년 4월 1일 천도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감행했다. 1,300명에 달하는 군중은 장터에 몰려있다가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장터에 있던 광고판은 물론 군청과 면사무소에 있던 광고판을 부수면서 군청 쪽으로 몰려갔다. 상점과 술집은 대개 문을 닫았지만,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과 술집을 파괴했다. 이때 횡성에 유일하게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가쿠다'도 만세 군중에 의해 불타고 헌병보조원 감독으로 있던 이규화는 군중에게 매를 맞고 도망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