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110.70.53.14 (토론)님의 2015년 10월 31일 (토) 18:36 판 (→‎기타)

틀:문화재

개요

서애 류성룡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상황부터 이후의 처리과정에 대해 적은 책으로 국보 제132호이다.
징비록의 '징비'는 징계할 징(懲), 삼갈 비(毖)로 "予其懲而毖後患(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1]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류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치

난중일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임진왜란 관련 문헌이다.
사실 징비록은 실록같은 정식사료도 아니며 개인이 쓴 1차사료인 데다 유일한 기록도 아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참조하는 이유에는 저자인 류성룡의 직책에 있다. 류성룡은 당시에 올라온 전쟁 상황과 공적을 알 수 있는 장계들을 봐왔으며 임금 선조를 호송하며 당시 조정 상황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체험한 인물이다. 또한 도체찰사가 되어 조정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어서 징비록은 그가 얻고 체험한 정보들로 적힌 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전쟁 이전 상황과 이후 대처 상황까지 묘사함으로 단순히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후대에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판

개인이 쓴 1차사료이기 때문에 객관성에서 비판을 받는다.
징비록의 중요 목적 중 하나가 북인이 자신을 공격할 때 사용한 근거인 '주화오국(主和誤國)'[2]의 반박과 왜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호였기 때문에 이 점을 유의해서 봐야한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시대를 객관적으로 알아볼 때는 징비록이나 난중일기같은 개인들이 쓴 1차 사료만 참고할 것이 아니라 실록같은 2차사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기타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정의 대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숙종 38년(1712)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3]
틀:날짜/출력부터 KBS에서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하는 동명대하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각주

  1. [ 시경 ] <<송(頌)>> <주송(周頌)> 소비(小毖)편
  2. 일본과 화친을 주도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뜻
  3. 징비록이 인조 21년(1643) 독립된 서책으로 편찬된 이후 역관이나 상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숙종 21년(1695)에는 교토의 야마토야(大和屋)에서 중간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실을 조선 조정이 알면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외교 마찰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