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갑오개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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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
==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청일 양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당초 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1894년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다. 일본은 더 이상 조선 조정 내의 개혁 추진에 대한 개입을 소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초 방관 정책을 펴던 오오토리 게이스케 주한 일본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임명한다.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청일 양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당초 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1894년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다. 일본은 더 이상 조선 조정 내의 개혁 추진에 대한 개입을 소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초 방관 정책을 펴던 오오토리 게이스케 주한 일본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임명한다.


한편 당초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한편 당초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다.
{{주석}}
[[분류:한국사]]

2018년 11월 7일 (수) 15:14 판

제2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4년 12월 17일부터, 박영효가 왕궁 침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실각한 1895년 7월 6일까지의 기간에 조선에서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청일 양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당초 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1894년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다. 일본은 더 이상 조선 조정 내의 개혁 추진에 대한 개입을 소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초 방관 정책을 펴던 오오토리 게이스케 주한 일본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임명한다.

한편 당초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