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편집하기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

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1번째 줄: 1번째 줄:
{{전쟁 정보
{{전쟁 정보
|전쟁이름 = 제1차 세계 대전
|분쟁 = 제1차 세계 대전
|원어이름 =  
|전체 =  
|그림     = [[파일:유틀란트 해전.jpeg]]
|그림 = 유틀란트 해전.jpeg
|그림설명 =  
|그림크기 = 400px
|포괄사건 =  
|설명 =  
|날짜     =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날짜 =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위치    =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장소 =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결과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패망, 유럽 식민지 독립
|상태 =
|단체1    = {{깃발|세르비아|1882}} [[세르비아 왕국]]<br />{{나라|러시아 제국}}<br />{{나라|프랑스|1830}}<br />{{나라|영국}}<br />{{나라|벨기에}}<br />{{나라|그리스 왕국}}<br />{{깃발|몬테네그로|1910}} [[몬테네그로 왕국]]<br />{{나라|일본 제국}}<br />{{나라|중화민국|1912}}<br />{{나라|포르투갈}}<br />{{나라|루마니아 왕국}}<br />{{나라|라이베리아}}<br />{{나라|미국|1912}}<br />{{나라|남아프리카 연방|1912}}<br />{{나라|이탈리아 왕국}}<br />{{나라|오스트레일리아}}<br />{{나라|안도라}}<br />{{나라|브라질}}<br />{{나라|온두라스|1898}}<br />{{나라|과테말라}}<br />{{나라|니카라과}}<br />{{나라|코스타리카}}<br />{{나라|파나마}}<br />{{나라|쿠바|1902}}<br />{{나라|네팔 왕국}}<br />{{나라|태국|1917}}<br />{{나라|아이티|1859}}
|결과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패망, 유럽 식민지 독립
|지휘관1  =
|이유 = 사라예보 사건과 서양 열강들 간의 오래된 갈등
|병력1    =
|교전국1 = {{국기그림|세르비아|1882}} [[세르비아 왕국]]<br/>{{국기그림|러시아}} [[러시아 제국]]<br/>{{국기|프랑스}}<br/>{{국기|영국}}<br/>{{국기|벨기에}}<br/>{{국기그림|그리스|왕국}} [[그리스 왕국]]<br/>{{국기그림|몬테네그로|1910}} [[몬테네그로 왕국]]<br/>{{국기|일본 제국}}<br/>[[중화민국]]<br/>{{국기그림|포르투갈|1830}}[[포르투갈 왕국]]<br/>{{국기그림|루마니아|1881}}[[루마니아 왕국]]<br/>{{국기|라이베리아}}<br/>{{국기|미국}}
|피해1    =
|교전국2 = {{국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br/>{{국기|독일 제국}}<br/>{{국기|오스만 제국}}<br/>{{국기그림|불가리아}} [[불가리아 왕국]]
|단체2    = {{나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br />{{나라|독일 제국}}<br />{{나라|오스만 제국}}<br />{{나라|불가리아 왕국}}
|교전국3 =
|지휘관2 =  
|지휘관1 =
|병력2    =  
|지휘관2 =
|피해2    =  
|지휘관3 =
|단체3    =  
|군대1 =  
|지휘관3  =  
|군대2 =  
|병력3    =  
|군대3 =  
|피해3    =  
|병력1 =  
|단체4    =  
|병력2 =  
|지휘관4  =  
|병력3 =
|병력4    =  
|사상자1 =
|피해4    =  
|사상자2 =
|민간피해 =  
|사상자3 =
|비고    =  
|지도 =  
|지도설명 =  
|기타 =  
}}
}}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영어|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유럽]]을 중심으로 발발한 범세계적인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llang|en|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유럽]]을 중심으로 발발한 범세계적인 [[전쟁]]이다.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으로서, 당시에는 '1차'라는 수식 없이 월드 워(World War)나 더 그레이트 워(the Great War)로 통칭했고 후자는 지금도 유효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붙은 것이다. 워낙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초대 규모 전쟁이어서, 당대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전쟁이 일어날 리 없을 것이라 믿고 대전(Great War)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SF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20년 후]], 이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으로서, 당시에는 '1차'라는 수식 없이 월드 워(World War)나 더 그레이트 워(the Great War)로 통칭했고 후자는 지금도 유효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붙은 것이다. 워낙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초대 규모 전쟁이어서, 당대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전쟁이 일어날 리 없을 것이라 믿고 대전(Great War)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SF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20년 후]], 이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63번째 줄: 65번째 줄:
=== 사라예보 사건 ===
=== 사라예보 사건 ===
[[파일:사라예보 사건.jpg|섬네일]]
[[파일:사라예보 사건.jpg|섬네일]]
그리고 이 모든 내재된 충돌 요소들을 폭발시킨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인 결사 조직 검은손과 연계한 보스니아인 테러 조직 젊은 보스니아에 의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재된 충돌 요소들을 폭발시킨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인 결사 조직 검은손과 연계한 보스니아인 테러 조직 젊은 보스니아에 의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황태자 내외 암살이 보도된 시점에 이미 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내외가 백주대낮에 암살된 명백한 테러 행위에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1914년 6월 28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공식 후계자인 페르디난트황태자가 이틀에 걸친 군사기동훈련 사열을 마치고 공식 환영행사 및 결혼 14주년 축하행사 참석을 위해 부인 소피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한 날이였다. 그러나 공식행사가 있던 이 날은 세르비아의 국가적 애도기념일인 비도브단(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왕국의 라자르 왕이 코소보에서 발칸 반도로의 세력확장을 추진하던 오스만제국의 무라드 1세와의 전투 결과 12,000명에 다하는 세르비아군 대다수와 함께 사망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일 )이였기 때문에 황태자 부부가 방문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비록 비도브단은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전한 것을 애도하는 기념일이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새로운 지배새력으로 등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다름 없었기 때문) 그러나 황태자는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왕가의 후손이 아니란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 받아 왔던 부인을 기쁘게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하였다.


-1914년 6월 27일 토요일 황태자 부부의 방문 하루 전
문제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양국 간의 전쟁에서 그쳐야 할 것이, 위에서 언급된 유럽 국가 간의 갈등 관계에 결합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발칸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독일은 러시아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아울러,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그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과 이를 위한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준비했고, 이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던 영국까지 말려들게 했다.
헤르체고비나의 사령관인 포티오레크 장군은 세르비아계의 폭력단체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사라예보 인근에 22,000여 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노출된 무개차량에는 그저 120명의 근위대만 배치 했다고 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 아래 치안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는 것을 입장하기 위해 ) 추가로 경호 문제에 소홀했던 포티오레크 장군과는 달리 게르데 사라예보 경찰국장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여 시 군사위원회에 추가적인 경호 인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극우 세르비아 청년들을 중심으로 1911년에 조직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통합해서 독립하는 걸 발해한다고 여기는 비밀결사단체인 ‘흑수단’은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3명의 요원을 비밀리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파견하였다. 당시 흑수단 수장은 세르비아 육군본부의 정보부장으로 근무하던 디미트리예비치 대령(그는 독신으로 평생을 세르비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 온 극우성향의 민족주의자였다.)이었는데 세르비아의 정부도 흑수단의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통제나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흑수단의 원래 암살 대상의 최우선의 목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집 황제인 오제프 1세 였으나 이는 접근하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였고후계자로 확실시 되며 사라예보 방문 예정인 황태자를 목표로 바꾸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사라예보 역의 전용열차에서 내린 황태자 부부는 경호에 취약한 무개차량에 탑승하여 사라예보 시청으로 향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15분
황태자 부부를 태운 전용차량(오픈카)이 군중을 향해 웃으며 에플퀘이를 따라 라틴교에 도달했을 때, 차량 트렁크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으며 이는 행렬을 기다리던 암살단 7인 중 한 명인 차브리노비치가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황태자 부부가 탑승한 차량을 확인한 후에 미리 준비해 온 폭탄을 차량에 던진 것이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폭탄은 차량 뒷쪽에 맞아 튕겨 나가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폭탄이 튕겨나간 바람에 장교 두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 1차 암살시도 범인 카브리노비치는 현장에서 도주하다 경찰에 체포 되었다.)
 
황태자 부부는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인 시청까지 정상적으로 차량행진을 계속하도록 명령하였고 시청에서 환영행사를 무사히 마친 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암살시도를 사소하게 생각하고 기존에 숙소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변경하여 암살 시도로 인한 부상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다시 차량(오픈카)을 타고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운전기사를 비롯한 경호요원들은 전달받지 못한 상황이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황태자 부부가 병원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운전기사는 기존에 계획된 행선지로 이동하려다 사령관의 호통을 듣고 잘못 든 길을 다시 되돌리려 후진을 하다가 엔진이 꺼지는 작은 사고가 발생하였다. 운전사가 다시 시동을 건 그때 황태자에 대한 1차 암살 시도 실패 직후 현장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암살단원인 프린치프(가브릴로 프린치프, 19세)가 황태자 부부를 태운 차량과 바로 앞 1.5m 거리에서 마주쳤다. 순간 프린치프는 준비해온 폭탄을 던지려 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가깝고 주변에 인파가 많아 폭탄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여 준비한 권총으로 황태자 부부가 탑승한 차량에 총을 쏘았는데 첫번째 총알은 소피 황태자비의 복부에 명중 하였으며, 두번째 총알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목에 명중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45분
피격 직후 총독 관저로 급히 이동하는 차량에서 소피 황태자비가사망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망하였다.
 
-1914년 6월 29일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에 대한 조사는 현장에서 체포된 차브리노비치와 프란치프를 대상으로 우선 실시 되었고 사건 첫날에는 모두 자신들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임을 주장하였으나 이튿날인 6월 29일, 차브리노비치가 진술을 번복하고 자신이 프린치프와 공범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다.
 
-1914년 7월 2일
암살단 7명에 대한 신원이 모두 밝혀졌다.
 
-1914년 7월 3일
몬테네그로로 탈출한 1명을 제외한 6명 모두 체포되었다.
 
 
황태자 내외 암살이 보도된 시점에 이미 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내외가 백주대낮에 암살된 명백한 테러 행위에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양국 간의 전쟁에서 그쳐야 할 것이, 위에서 언급된 유럽 국가 간의 갈등 관계에 결합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발칸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세르비아 뒤에는 슬라브계 국가의 맏형 격인 러시아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에 함부로 전쟁을 선포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하였으나 이때 독일이 적극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백지수표’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 너희 마음대로 해라. 우리가 뒤를 봐주겠다.’ 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울러,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그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과 이를 위한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준비했고, 이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던 영국까지 말려들게 했다.


== 개략 ==
== 개략 ==
180번째 줄: 146번째 줄:
[[분류:제1차 세계 대전| ]]
[[분류:제1차 세계 대전| ]]
[[분류:1914년 분쟁]]
[[분류:1914년 분쟁]]
[[분류:명수 1]]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