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20번째 줄: | 20번째 줄: | ||
252년 12월에 위나라의 제갈탄, 호준의 공격에 [[제갈각]] 휘하로 들어가 위군 진영을 급습해 [[한당]]의 아들이자 전향자인 [[한종]]의 목을 베었다. 이때 부하들에게 갑옷을 풀고 단병만 지니도록 하여 이를 본 위군들은 그 수가 적어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공으로 멸구장군, 도양후로 승격한다. | 252년 12월에 위나라의 제갈탄, 호준의 공격에 [[제갈각]] 휘하로 들어가 위군 진영을 급습해 [[한당]]의 아들이자 전향자인 [[한종]]의 목을 베었다. 이때 부하들에게 갑옷을 풀고 단병만 지니도록 하여 이를 본 위군들은 그 수가 적어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공으로 멸구장군, 도양후로 승격한다. | ||
255년 위의 장군 문흠이 투항해 오니, 정봉을 호위장군으로 삼고 | 255년 위의 장군 문흠이 투항해 오니, 정봉을 호위장군으로 삼고 손준을 따라 수춘에 가 맞이하게 하고,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이 말에 타고 긴 모을 들고 적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수백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를 노획했다. 안풍후로 올려 봉했다. | ||
윤달 정월 9일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 윤달 정월 9일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 ||
오봉 2년(255),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문흠이 부대를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 사람들과 낙가에서 싸웠다.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呂據)와 좌장군 유찬을 인솔하여 수춘을 습격했다. 그러나 마침 문흠이 패배해 항복했으므로 군대를 돌렸다. | |||
257년 [[제갈탄의 난]]에 참전하고 이후 [[손휴]]가 즉위하면서 당시 권신인 [[손침]]을 치기위해 손휴파인 [[장포]]가 정봉을 추천해 정봉도 이에 가담하여 손침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 257년 [[제갈탄의 난]]에 참전하고 이후 [[손휴]]가 즉위하면서 당시 권신인 [[손침]]을 치기위해 손휴파인 [[장포]]가 정봉을 추천해 정봉도 이에 가담하여 손침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