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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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은 1918년 12월 1일 <마산에 신조한 석탑>을 매일신보에 기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객경 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병을 얻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하였으며,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에 유람하였다. 당시엔  [[3.1 운동]]이 한창이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장지연은 1918년 12월 1일 <마산에 신조한 석탑>을 매일신보에 기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객경 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병을 얻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하였으며,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에 유람하였다. 당시엔  [[3.1 운동]]이 한창이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일본 외무성 자료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시베리아편'에 따르면, "매일신보 기자 장지연은 [[김경천 (1888년, 북청)|김경천]]의 초대로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독립군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수원대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090415149900005 "친일파 논란 장지연 말년에 의병활동" - 연합뉴스]</ref>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일본 외무성 자료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시베리아편'에 따르면, "매일신보 기자 장지연은 [[김경천]]의 초대로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독립군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수원대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090415149900005 "친일파 논란 장지연 말년에 의병활동" - 연합뉴스]</ref>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고, 결국 1921년 10월 2일 상주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56세.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고, 결국 1921년 10월 2일 상주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56세.
== 사후 ==
== 사후 ==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지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 위치한 그의 묘지를 '위암장지연선생의묘 (偉庵張志淵先生의墓)'라 하여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장지연이 매일신보에서 친일 성향의 논설을 연이어 기고하고 친일 단체인 불교진흥회에 적극 가담하는 등의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2005년 3월 4일 경향신문에서 장지연이 일왕을 찬양하는 한시를 게재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ref>[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0503041844351 장지연 ‘일왕찬양’ 漢詩 게재 - 경향신문]</ref> 이후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8월 1일 장지연의 친일시를 대중에 공개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113566 위암 장지연 친일시 공개 - 한겨레]</ref> 이에 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친일청신시민행동연대는 장지연의 기념사업을 중단하거나 철회하라고 촉구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243 "친일 문화예술인 기념사업 중단해야" - 오마이뉴스]</ref>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지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 위치한 그의 묘지를 '위암장지연선생의묘 (偉庵張志淵先生의墓)'라 하여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장지연이 매일신보에서 친일 성향의 논설을 연이어 기고하고 친일 단체인 불교진흥회에 적극 가담하는 등의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2005년 3월 4일 경향신문에서 장지연이 일왕을 찬양하는 한시를 게재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ref>[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0503041844351 장지연 ‘일왕찬양’ 漢詩 게재 - 경향신문]</ref> 이후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8월 1일 장지연의 친일시를 대중에 공개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113566 위암 장지연 친일시 공개 - 한겨레]</ref> 이에 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친일청신시민행동연대는 장지연의 기념사업을 중단하거나 철회하라고 촉구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243 "친일 문화예술인 기념사업 중단해야" - 오마이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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