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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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잡지 <개벽>에 '이해합시다. 용서합시다. 그리하야 다가티 삽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며 서로 비방하지 말며,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천량의 본심'을 신조로 삼고,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강조했으며, 사악하고 시기하는 것을 배척했다. 임규는 1928년 2월 1일 잡지 <별건곤>에 '수상감상, 요새 요때에 새로히 생각키워지는 일들-먼저 조선을 잘 알어야'를 기고하여 조선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의 자아는 자기정신의 발현을 통해서 가능하며, 조선 사람이 조선 것을 가장 잘 알고 익힐 때 비로소 외래의 문화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2년 잡지 <개벽>에 '이해합시다. 용서합시다. 그리하야 다가티 삽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며 서로 비방하지 말며,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천량의 본심'을 신조로 삼고,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강조했으며, 사악하고 시기하는 것을 배척했다. 임규는 1928년 2월 1일 잡지 <별건곤>에 '수상감상, 요새 요때에 새로히 생각키워지는 일들-먼저 조선을 잘 알어야'를 기고하여 조선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의 자아는 자기정신의 발현을 통해서 가능하며, 조선 사람이 조선 것을 가장 잘 알고 익힐 때 비로소 외래의 문화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27년 5월, 임규는 조선문화의 증진을 추구한 계명구락부의 편집부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최남선, [[정인보]]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최남선은 전체 책임을 맡았으며, 정인보는 감독을 맡았고, [[한징]]은 서무 업무를 담당했으며, 임규는 동사와 형용사를 맡았다. 그는 조선어편찬에 관한 글을 게재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으며, 10만여 개에 달하는 어휘를 수집했다. 6년간 이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던 중 1932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지원하던 <계명>이 발간을 중지당하자, 곧바로 조선어학연구회 잡지 <정언>을 통해 한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주시경]]이 이끌었던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글맞춤법안은 편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안이 [[조선 세종|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정신에 위배되며, 우리 고유 언어형태는 ‘정음’이며,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훈민정음’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7년 5월, 임규는 조선문화의 증진을 추구한 계명구락부의 편집부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최남선, [[정인보]]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최남선은 전체 책임을 맡았으며, 정인보는 감독을 맡았고, [[한징]]은 서무 업무를 담당했으며, 임규는 동사와 형용사를 맡았다. 그는 조선어편찬에 관한 글을 게재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으며, 10만여 개에 달하는 어휘를 수집했다. 6년간 이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던 중 1932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지원하던 <계명>이 발간을 중지당하자, 곧바로 조선어학연구회 잡지 <정언>을 통해 한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주시경]]이 이끌었던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글맞춤법안은 편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안이 [[세종 (조선)|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정신에 위배되며, 우리 고유 언어형태는 ‘정음’이며,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훈민정음’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규는 7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잡지 정음에 '조선어학회의 공개장 검토', '박승빈 선생의 조선어학을 읽고'를 게재하며 한글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잡지에 한글 및 일본어 문법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실었다. [[8.15 광복]] 후 1946년 3.1 운동 기념추진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고령의 나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호라동하지 못했다. 이후 고향 익산으로 낙향한 뒤 여생을 보내다 1948년 3월 7일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향제에서 병사했다. 향년 82세. [[동아일보]]는 1948년 3월 9일자 '임규씨 서거'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임규는 7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잡지 정음에 '조선어학회의 공개장 검토', '박승빈 선생의 조선어학을 읽고'를 게재하며 한글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잡지에 한글 및 일본어 문법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실었다. [[8.15 광복]] 후 1946년 3.1 운동 기념추진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고령의 나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호라동하지 못했다. 이후 고향 익산으로 낙향한 뒤 여생을 보내다 1948년 3월 7일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 향제에서 병사했다. 향년 82세. [[동아일보]]는 1948년 3월 9일자 '임규씨 서거'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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