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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원주민 부족들은 처음에는 이주 명령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내 미국 정부는 그들의 보호구역 이주를 강제하였고, 원주민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인 유랑생활을 금지하기 위해 [[미군]]을 투입하여 이들의 정주생활을 강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많은 충돌이 일었으며, 심지어는 전쟁이나 학살도 벌어졌다. 이중 가장 잘 알려진 분쟁은 1876년과 1881년 사이에 북부 평야에서 벌어진 [[수 전쟁]]으로, [[리틀빅혼 전투]] 등의 전투가 벌어졌다. | 대부분의 원주민 부족들은 처음에는 이주 명령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내 미국 정부는 그들의 보호구역 이주를 강제하였고, 원주민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인 유랑생활을 금지하기 위해 [[미군]]을 투입하여 이들의 정주생활을 강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많은 충돌이 일었으며, 심지어는 전쟁이나 학살도 벌어졌다. 이중 가장 잘 알려진 분쟁은 1876년과 1881년 사이에 북부 평야에서 벌어진 [[수 전쟁]]으로, [[리틀빅혼 전투]] 등의 전투가 벌어졌다. | ||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 그랜트 대통령의 정책은 원주민과의 피튀기는 전쟁으로 희생자만 낳은 실패한 정책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1877년,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는 그랜트 대통령의 정책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1882년까지 모든 종교 |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 그랜트 대통령의 정책은 원주민과의 피튀기는 전쟁으로 희생자만 낳은 실패한 정책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1877년,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는 그랜트 대통령의 정책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1882년까지 모든 종교 단체들은 원주민 보호구역에서의 권리들을 모두 연방 인디언 사무국에 양도했다. | ||
==== 보호구역의 개인화 (1887–1934) ==== | ==== 보호구역의 개인화 (1887–193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