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180.226.25.228 (토론)님의 2015년 11월 13일 (금) 22: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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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은 1960년 4월 2일 생으로 대한민국의 前 언론인이다. 본명은 리일남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이며 그녀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모델 출신 인물 김종은의 남편이다.

북한에서의 삶

1978년 그는 이모 성혜림으로부터 故 이병주의 소설인 <망향>을 받아 난생 처음 남한의 소설을 읽었다. 달콤한 애정 소설을 읽으면서 그는 며칠밤 잠을 설쳤다고 자신의 저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서 밝혔다.

남한 영화도 적지 않게 보았으며, 이정길과 김지미가 주연한 <육체의 약속>, 신상옥이 감독하여 신성일, 김지미, 오수미가 출연한 <이별>, 신성일과 윤정희의 정사 장면이 나오는 <야행>을 보았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감명 깊게 보았고,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가 주연으로 나온 미국 영화 <러브 스토리>가 눈앞에 아른거려 며칠 밤을 뒤척였다고 한다.

성혜랑, 성혜림과 누나인 리남옥은 남한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 덕에 주석궁에 앉아서 남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많이 보았다. 백일섭과 여운계가 출연한 <휘청거리는 오후>, 유지인이 나온 <약속의 땅>을 보았고, 정윤희, 이경진, 임동진, 서인석 등이 출연한 <세 자매>는 주제가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물들어 미국에 가는 꿈을 키우던 그는 1976년 5월 17일 모스크바로 유학갔다. 숙소는 레닌 대로 바빌로바 가 85번지에 북한이 소유한 아파트로 정해져, 그 곳에서 성혜랑, 성혜림과 생활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의 생활에서 탈북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지역에 파견된 북한 공관원들은 성혜림을 찾아와 뇌물을 바치곤 했다. 김정일의 지시로 독일에 파견된 중앙당 부부장 권형록, 싱가포르에서 동남아를 담당하는 백인수 등이 뇌물을 바쳤으며 이한영에게도 5천∼만달러씩 주곤 했다. 성혜림은 권형록에게서 받은 벤츠 450을 이한영에게 주었다.

한 편, 김정남이 교육 문제로 고민한 김정일은 이철의 소개로 제네바 국제학교를 선택했다. 제네바 교외 레만 호수 옆 고급 주택가의 빌라를 사서 80년 가을 김정남을 보냈다.

이 학교 입학식 날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각기 자기 나라 국기를 들고 입장한다. 그러나 김정남만 깃발을 들지 않았다. 이때 이 입학식에 우연히 참석한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 노신영이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라고 물었다. 김정남은 '피양서 왔시요'라고 대답했다. 노신영도 놀라고, 김정남을 따라온 수행원도 깜짝 놀랐다. 노대사는 정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섰다.

이 일이 있은 뒤 불안해진 성혜림은 아들의 숙소를 제네바 교외 클로 벨몽의 아파트 4층으로 옮겼다. 그러고도 불안해 82년 봄 김정남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이후 김정일은 '일남이가 제네바에 가서 어학 연수를 하고 정남이는 모스크바에 있는 프랑스대사관 학교에 다니라'고 했다. 1982년 9월 20일 이한영은 이철, 식모와 함께 스위스 클로 벨몽의 아파트에 여장을 풀었다.

이철은 이한영을 어학원에 등록시키고 개인 교수를 초빙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이한영은 동아출판사 영한사전을 갖고 영어를 공부하며 어학원에 다녔다. 1주일이 지난 9월 28일 리일남은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자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북한 외교관 여권과 공무원 여권 등 3개나 가지고 있다.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물었다. 잠시 후 한국 대사관 직원이 '북한 여권으로 미국에 가려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있는 곳을 물었다. 3일 후인 10월 1일 리일남은 프랑스, 벨기에, 서독, 필리핀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는데 길가의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리일남은 순간 '어 이주일이네, 저건 유지인이고'라고 말했다. 동승한 안내자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남조선 텔레비전을 봐서 안다'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고 한다.

안기부 조사에서 이한영은 북한의 막대한 정보를 누설하였다. 그 후 그에겐 ‘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뜻으로 한영(韓永)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주민등록번호는 그가 태어난 해와 그가 스스로 한국 대표부에 온 9월 28일을 엮어서 610928로 시작하게 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인 이한영은 특별보상금 1억원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남한에서

그러나 그에게 특별 분양되기로 한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28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늦어져 6개월간 잠원동의 18평짜리 한신아파트를 2천만원에 전세로 들었다. 차액 8천만원은 안기부가 정기예금에 넣어두고 매달 70만원 정도씩 이자만 갖다 주었다. 이 중 파출부 몫으로 15만원, 식비로 15만원, 관리비로 10만원을 떼고 나머지 30만원이 그의 용돈이었다.

한양대에 다니던 1984년 그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다. 자기 집을 담보로 잡고 3백만원을 융자받아 학과 친구들과 술 마시는 데 다 써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안기부 담당관이 그를 단단히 혼냈다. 그러나 이한영은 '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왜 참견이냐'는 반발심만 생겼다고 저서에 밝혔다. 당시 심정을 그는 '남한 사회에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돈 쓸 때뿐이었다'라고 기술했다.

그 해 가을,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한바탕 자살 소동을 벌였다. 서울 강남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 여관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이틀간 잠만 자고 여관을 나왔다. 이틀간 종적이 사라진 것 때문에 그는 안기부 지하실에 불려가 조사받았다. 안기부 사람들은 이한영의 자살 소동은 이한영의 방탕한 생활을 야단치는 자기들에게 시위하기 위한 쇼라고 보았다고 한다. 1985년 여름 방학 때 그는 안기부의 권유로 서울 명동의 한 성형외과에서 성형 수술을 했다. 그가 얼굴을 바꾸는 사이 안기부는 그의 집을 옮겼다. 그래야만 이한영이 얼굴 바꾼 것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개강하자 이한영 교통사고가 나서 얼굴을 수술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서울 생활 14년간 이한영은 안기부 담당관을 여러 명 만났다. 그러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가 워낙 말썽을 많이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서에서 '대부분의 담당관이 귀순자로부터 존경을 받지만, 귀순자를 대하는 기법부터 안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라고 적었다. 그는 존경심도 가지 않는 담당관한테 '졸때기' 대접을 받는 것이 무척 기분 나빴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존경한 담당관도 있었는데, 그는 그에 대해 '김선생은 형님처럼 내 문제를 걱정해 주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엄중하게 꾸짖기도 했다. 그는 청렴결백한 공무원으로, 그의 태도가 경박하기 짝이 없는 오렌지족인 나를 감동시켰다'라고 적었다.

대학 졸업 직전인 1987년 10월 안기부는 그를 유럽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요원의 자녀로 꾸며 KBS에 취직시켰다. KBS 수습 15기와 동기가 된 그는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그는 러시아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해 12월 이씨는 모델 출신인 김종은과 결혼했다. 결혼 전 그가 신부에게 자기 신분을 솔직히 털어놓았고 안기부 시절 만난 황 아무개씨 부부를 부모로 해 결혼식을 치렀다. 1990년 둘은 딸을 낳았다. 해외 여행이 자유화된 1989년 그는 부인과 미국 여행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1983년 주민등록증을 받은 이래 출국정지자였다. 이에 대해 이씨는 '한국에 데려올 때는 자유롭게 미국에 갈 수 있다 해놓고 이렇게 발을 묶어 놓는가'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1989년 그는 KBS 직장 조합주택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이 일로 사업에 눈 뜬 그는 사표를 냈다. '인터커넥션'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광고 이벤트업과 주택건설업자로 등록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는 아내와 장인, 처형 그리고 한양대 직원인 김장현씨 등을 임원으로 하고 직원을 4명 고용했다. 첫 사업으로 서울 성수동의 가구공장 터에다 조합주택을 짓기로 하고 매입에 나섰다.

이한영은 그랜저를 사고 서울 반포동에 대지 백평짜리 주택도 구입했다. 그러나 곧 횡령 시비가 일면서 수인으로 전락했다. 2심에서 풀려나와 1994년 1년간 그는 안기부가 주는 월 80만원으로 살았다. 그러나 1995년 이것마저 중단되자 그는 정보를 팔아보려고 나섰다. 그러다 <월간 조선> 기자를 만나 모스크바에 있는 어머니 성혜랑씨와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그는 신문·잡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부터 무선호출기와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 동시에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 초콜릿 가게를 내고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인과는 별거 상태였고, 안기부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겨져 보호받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죽음

1997년 2월 25일,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북조선에서 보낸 공작원에 의해 자택에서 저격당하여 10일 뒤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