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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종교가로서의 남강 선생>, p.74.}} | - 함석헌,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종교가로서의 남강 선생>, p.74.}} | ||
다음날인 5월 4일 주일, 그는 오산성경연구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 다음날인 5월 4일 주일, 그는 오산성경연구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아무 것도 할 만한 힘이 없었지만, 자기가 진리를 찾고 의(義) 사모하고 그 의를 위하여 자기를 이기고 일하여 나가고자 하는 힘은 성경을 보는 가운데 생겨났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 가장 영광이며 물질적 동상보다도 정신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을 내 일생 중에 가장 더 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정신적으로 영생할 수 없는 인간은 저러한 동상을 몇 백개 세우더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ref>김해연, <한국기도교회사: 한국 기독교 문화사 및 사상사>, p.170.</ref> | ||
1930년 5월 8일 밤, 이승훈은 용동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자면회(自勉會) 사람들과 자택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파한 후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튿날인 5월 9일 새벽 4시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의 27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10] 평양을 비롯해 서울 등 지방에서도 지역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5월 10일자 사회면에 그의 사진을 싣고 '위대신산(偉大辛酸)한 그 일생'라는 부제를 달아 부음 기사를 실었다. | 1930년 5월 8일 밤, 이승훈은 용동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자면회(自勉會) 사람들과 자택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파한 후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튿날인 5월 9일 새벽 4시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의 27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10] 평양을 비롯해 서울 등 지방에서도 지역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5월 10일자 사회면에 그의 사진을 싣고 '위대신산(偉大辛酸)한 그 일생'라는 부제를 달아 부음 기사를 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