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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9월, 이승훈은 평북 선천에서 열린 제7회 장로교총회에서 상해교민 대표 [[여운형]]과 만나 국제동향을 전해듣고 파리 강화 회의를 계기로 궐기하는 일을 논의했다. 또한 11월에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12월에는 도쿄 유학생 [[서춘]]이 오산학교에 들러 이승훈, [[조만식 (1882년)|조만식]], 박현환 등에게 국제정세와 동경유학생들의 움직임에 관하여 설명하고 국내운동의 방법을 의논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여운형과의 계획을 밝히고, 국내, 상하이, 도쿄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 1918년 9월, 이승훈은 평북 선천에서 열린 제7회 장로교총회에서 상해교민 대표 [[여운형]]과 만나 국제동향을 전해듣고 파리 강화 회의를 계기로 궐기하는 일을 논의했다. 또한 11월에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12월에는 도쿄 유학생 [[서춘]]이 오산학교에 들러 이승훈, [[조만식 (1882년)|조만식]], 박현환 등에게 국제정세와 동경유학생들의 움직임에 관하여 설명하고 국내운동의 방법을 의논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여운형과의 계획을 밝히고, 국내, 상하이, 도쿄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 ||
1919년 2월 6일 상하이 신한청년당에 소속된 [[선우혁]]이 평안도로 잠입하여 종교계 및 사회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선우혁은 선천에서 [[양전백]] 목사를 만났고, 정주에서 이승훈 장로를 만났으며,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를 만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선우혁을 만난 뒤 "그냥 누워 있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죽을 자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고 한다.<ref>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p.125. | 1919년 2월 6일 상하이 신한청년당에 소속된 [[선우혁]]이 평안도로 잠입하여 종교계 및 사회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선우혁은 선천에서 [[양전백]] 목사를 만났고, 정주에서 이승훈 장로를 만났으며,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를 만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선우혁을 만난 뒤 "그냥 누워 있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죽을 자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고 한다.<ref>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p.125.>/ref> | ||
이후 평양에서는 선우혁의 권유를 기초로 하여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 교계에서 운영하는 숭실전문학교, 숭실학교, 숭덕고등보통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교 및 보통학교의 교사, 학생들과 기독교도, 시민들을 동원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를 강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이후 평양에서는 선우혁의 권유를 기초로 하여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 교계에서 운영하는 숭실전문학교, 숭실학교, 숭덕고등보통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교 및 보통학교의 교사, 학생들과 기독교도, 시민들을 동원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를 강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