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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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건적]]의 난 이후 서주를 얻기까지 ===
=== [[황건적]]의 난 이후 서주를 얻기까지 ===
황건적의 난 당시 기주 중산국의 대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은 재산이 수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유비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유비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독우(감찰관)이 자신을 내쫒으려고 여겨 독우를 두들겨패고 관직을 버림으로서 금방 잃어 버렸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보내 단양으로 가서 모병하게 하니 유비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서주 하비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가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황건적의 난 당시 기주 중산국의 대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은 재산이 수천금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유비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후 유비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독우(감찰관)이 자신을 내쫒으려고 여겨 독우를 두들겨패고 관직을 버림으로서 금방 잃어 버렸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보내 단양으로 가서 모병하게 하니 유비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서주 하비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가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유비는 [[조조]]를 만나게 되고 조조와 함께 조조의 고향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영제 사후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유비 역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이후 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유비는 지인인 공손찬에게로 가서 별부사마, 평원국의 국상(태수급)을 겸했다. 이때 유평이란 자가 유비를 불만스럽게 여겨 휘하 사람에게 유비를 몰래 암살하게 하려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사람을 매우 후대하였고 그 사람은 죄책감에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 시절에 사람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는데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아랫사람이라도 거리낌 없이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이 당시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된 공융이 태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비는 병력을 따로 보내 구원했다.
이후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유비는 [[조조]]를 만나게 되고 조조와 함께 조조의 고향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영제 사후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유비 역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이후 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유비는 지인인 공손찬에게로 가서 별부사마, 평원국의 국상(태수급)을 겸했다. 이때 유평이란 자가 유비를 불만스럽게 여겨 휘하 사람에게 유비를 몰래 암살하게 하려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사람을 매우 후대하였고 그 사람은 죄책감에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 시절에 사람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는데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아랫사람이라도 거리낌 없이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이 당시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된 공융이 태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비는 병력을 따로 보내 구원했다.


이때 조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서주를 침공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유비와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유비는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에서 이민족 오환의 기병을 가지고 서주를 구원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주고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의 명칭 가운데 하나인 '유예주'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때 조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서주를 침공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유비와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유비는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에서 이민족 오환의 기병을 가지고 서주를 구원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유비에게 주고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의 명칭 가운데 하나인 '유예주'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미축에게 일러 유비에게 서주를 맡겼고 유비는 사양했으나 진등과 공융이 계속 권하니 유비는 서주목에 올랐다. 이때가 194년이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미축에게 일러 유비에게 서주를 맡겼고 유비는 사양했으나 진등과 공융이 계속 권하니 유비는 서주목에 올랐다. 이때가 19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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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건안 5년(200년), 조조는 본인이 나서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결국 건안 5년(200년), 조조는 본인이 나서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유비는 청주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옛날에 무재로 천거했기에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맞이했다.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 여기에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유비의 군사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유비는 청주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옛날에 무재로 천거했기에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맞이했다.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 여기에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유비의 군사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한편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의 황건잔당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을 참하는 공을 세우고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유비는 한편으로는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조가 채양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편 조조가 원소와 [[관도대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의 황건잔당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을 참하는 공을 세우고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유비는 한편으로는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조가 채양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결국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한 후 또 다시 친히 남쪽으로가서 유비를 공격했다. 이에 유비는 미축, 손건을 유표에게 보내 소식을 전했고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손님으로서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유비에게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호응하자 많아지자 유표는 유비를 경계하게 된다. 유비는 이후 몇년간 평안한 생활을 하면서 유표더러 허창을 기습하라는 계책을 냈지만 유표가 망설여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나중에서야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 유비는 이때쯤 양자 유봉을 들엿고 적벽대전 직전 후계자인 유선이 태어났다. 그리고 [[제갈량]]을 삼고초려를 통해 참모로 맞이한다.
결국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한 후 또 다시 친히 남쪽으로가서 유비를 공격했다. 이에 유비는 미축, 손건을 유표에게 보내 소식을 전했고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손님으로서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유비에게 형주의 호걸들이 날로 호응하자 많아지자 유표는 유비를 경계하게 된다. 유비는 이후 몇년간 평안한 생활을 하면서 유표더러 허창을 기습하라는 계책을 냈지만 유표가 망설여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나중에서야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 유비는 이때쯤 양자 유봉을 들엿고 적벽대전 직전 후계자인 유선이 태어났다. 그리고 [[제갈량]]을 삼고초려를 통해 참모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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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을 평정한 이후 조조는 본격적으로 유표가 죽은 형주를 공격하게 된다, 우선 하후돈, 우금, 이전 등으로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박망에서 복병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에 조조는 다시 친청했는데 유비는 조조의 군대가 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유종이 항복을 청하고 감히 이 일을 유비에게 알리지 않았다. 얼마 뒤 유비는 친한 이를 보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은 송충을 보내 유비에게 자기 뜻을 알렸으니 유비는 크게 놀라 이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격노하고 유종과 송충을 크게 꾸짖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유비는 차마 그럴수 없다고 거절하고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유종의 측근들과 형주인들 다수가 유비에게 갔다.
하북을 평정한 이후 조조는 본격적으로 유표가 죽은 형주를 공격하게 된다, 우선 하후돈, 우금, 이전 등으로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박망에서 복병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에 조조는 다시 친청했는데 유비는 조조의 군대가 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유종이 항복을 청하고 감히 이 일을 유비에게 알리지 않았다. 얼마 뒤 유비는 친한 이를 보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은 송충을 보내 유비에게 자기 뜻을 알렸으니 유비는 크게 놀라 이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격노하고 유종과 송충을 크게 꾸짖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유비는 차마 그럴수 없다고 거절하고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유종의 측근들과 형주인들 다수가 유비에게 갔다.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만에 이르고 짐수레가 수천 대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사람들에게 배 수백 척을 타고 가게 해서서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때 주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유비에게 사람들을 버리고 가라고 하자 유비는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라고 일갈하고 계속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에 조조가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짐같은 것은 다 내버려두고 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급히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조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만에 이르고 짐수레가 수천 대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사람들에게 배 수백 척을 타고 가게 해서서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때 주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유비에게 사람들을 버리고 가라고 하자 유비는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라고 일갈하고 계속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에 조조가 유비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짐같은 것은 다 내버려두고 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조는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급히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조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유비는 한진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가 1만 군사로 배를 타고 구원해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남인 강하태수 유기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때 [[노숙]]을 만나 [[손권]]의 뜻을 들었고 이후 유비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했다.
유비는 한진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가 1만 군사로 배를 타고 구원해 면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남인 강하태수 유기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때 [[노숙]]을 만나 [[손권]]의 뜻을 들었고 이후 유비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동맹했다.


=== [[적벽대전]] ===
=== [[적벽대전]] ===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과 병사 3만을 보냈고 유비는 2만의 군사로 힘을 합해, 조조과 적벽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병선을 불태웠다. 유비는 오군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조의 군대를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역병이 돌아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조가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후 유비와 주유는 남군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관우와 장비 역시 이 싸움에 투입시켰다. 주유가 조인을 상대로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는 등 격렬하게 사웠고 유비는 이 사이 형남 4군을 평정하고 유기가 죽은 이후 그 뒤를 이어 형주목의 자리에 오른다.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과 병사 3만을 보냈고 유비는 2만의 군사로 힘을 합해, 조조과 적벽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병선을 불태웠다. 유비는 오군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조의 군대를 추격해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역병이 돌아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조가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후 유비와 주유는 남군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관우와 장비 역시 이 싸움에 투입시켰다. 주유가 조인을 상대로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는 등 격렬하게 사웠고 유비는 이 사이 형남 4군을 평정하고 유기가 죽은 이후 그 뒤를 이어 형주목의 자리에 오른다.  


이에 손권은 유비를 내심두려워 하여 자신의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냈고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 남군땅 남부인 공안을 주어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유비가 주둔하고 있던 하구를 차지한다. 이후 남군 태수인 주유가 죽자 노숙은 남군 전체를 유비에게 빌려 주는 것을 제안했고 이에 유비는 남군을 차지해 명실상부한 형주의 주인이 된다. 이후 유비는 손권이 촉 땅을 치려는걸 유장이 같은 종실의 후예라면서 반대했는데 본시 그 마음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통해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는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반대한 것이다.
이에 손권은 유비를 내심두려워 하여 자신의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냈고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 남군땅 남부인 공안을 주어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유비가 주둔하고 있던 하구를 차지한다. 이후 남군 태수인 주유가 죽자 노숙은 남군 전체를 유비에게 빌려 주는 것을 제안했고 이에 유비는 남군을 차지해 명실상부한 형주의 주인이 된다. 이후 유비는 손권이 촉 땅을 치려는걸 유장이 같은 종실의 후예라면서 반대했는데 본시 그 마음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통해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는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반대한 것이다.


=== 익주평정 ===
=== 익주평정 ===
한편 북으로 돌아간 조조는 관중과 한중땅을 점령할 마음을 품었고 이는 마초와 유장의 두려움을 사게 만들었다. 마초는 관중의 군벌을 규합해 조조를 공격했고 이에 조조가 한중땅을 공격하는 것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유장은 늘 장로를 싫어했고 조조가 한중을 접수하면 익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비는 익주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했음으로 이 제의를 들어 익주로 들어가 장로와 싸우는 듯 하면서 병사와 물자를 풍부하게 지원받고 형주와 오나라의 위험을 들어 추가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후 인심을 후하게 베푸는 정치로 익주의 민심을 장악하였다.
한편 북으로 돌아간 조조는 관중과 한중땅을 점령할 마음을 품었고 이는 마초와 유장의 두려움을 사게 만들었다. 마초는 관중의 군벌을 규합해 조조를 공격했고 이에 조조가 한중땅을 공격하는 것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유장은 늘 장로를 싫어했고 조조가 한중을 접수하면 익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비는 익주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했음으로 이 제의를 들어 익주로 들어가 장로와 싸우는 듯 하면서 병사와 물자를 풍부하게 지원받고 형주와 오나라의 위험을 들어 추가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후 인심을 후하게 베푸는 정치로 익주의 민심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장송이 유비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 유비는 유장과 싸우게 되고 방통이 죽자 제갈량, [[황충]], 조운, [[장비]]를 익주로 불러 들인다. 결국 낙성이 함락되고 조조에게 패하고 장로 휘하에 있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니 유장은 견디지 못하고 성도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장송이 유비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 유비는 유장과 싸우게 되고 방통이 죽자 제갈량, [[황충]], 조운, [[장비]]를 익주로 불러 들인다. 결국 낙성이 함락되고 조조에게 패하고 장로 휘하에 있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니 유장은 견디지 못하고 성도에서 항복하였다.  


이로서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비는 익주의 금고를 열어 제장들에게 금은을 나누어 주었고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또 조운의 조언을 들어 과수원 뽕밭등 논밭과 집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수백채의 역사를 짓게 하고 인프라를 정비하였으며 새로 화폐를 발행하고 반란을 제압해 익주를 안정화 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로서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비는 익주의 금고를 열어 제장들에게 금은을 나누어 주었고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또 조운의 조언을 들어 과수원 뽕밭등 논밭과 집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수백채의 역사를 짓게 하고 인프라를 정비하였으며 새로 화폐를 발행하고 반란을 제압해 익주를 안정화 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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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유비는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였는데 결국 맹달은 두려움에 위나라로 투항하고 유봉은 상용까지 빼앗겨 유비는 유봉을 크게 질책하고 유봉을 남겨두면 유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것이라는 제갈량의 조언을 들어 유봉을 죽였으며 유비는 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후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가 헌제의 황제위를 선양받아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나라가 세워지자 유비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촉한이라고 한다.
이에 유비는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였는데 결국 맹달은 두려움에 위나라로 투항하고 유봉은 상용까지 빼앗겨 유비는 유봉을 크게 질책하고 유봉을 남겨두면 유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것이라는 제갈량의 조언을 들어 유봉을 죽였으며 유비는 이에 눈물을 흘렸다. 이후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가 헌제의 황제위를 선양받아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나라가 세워지자 유비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촉한이라고 한다.


이후 유비는 빼앗긴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오를 친다. 제갈량, 조운등이 이를 말렸으나<ref>이때 이미 법정이 죽어 제갈량은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폐하를 막을수 있었을것이며 적어도 크게 패하시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으며 조운은 우리의 국적은 위나라지 오가 아니라고 간언하였다</ref> 유비는 이를 듣지 않았고 221년 가을 7월, 마침내 제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분노하여 거절하였다. 유비는 진격하여 남군 상당수 땅을 점령하고 마량을 보내 무릉만을 호응하게 했다. 육손은 이미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강릉 근방까지 밀렸고 손환을 대장으로 하는 원군도 이도현에서 가로막혀 포위되었다.
이후 유비는 빼앗긴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오를 친다. 제갈량, 조운등이 이를 말렸으나<ref>이때 이미 법정이 죽어 제갈량은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폐하를 막을수 있었을것이며 적어도 크게 패하시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으며 조운은 우리의 국적은 위나라지 오가 아니라고 간언하였다</ref> 유비는 이를 듣지 않았고 221년 가을 7월, 마침내 제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분노하여 거절하였다. 유비는 진격하여 남군 상당수 땅을 점령하고 마량을 보내 무릉만을 호응하게 했다. 육손은 이미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강릉 근방까지 밀렸고 손환을 대장으로 하는 원군도 이도현에서 가로막혀 포위되었다.  


강릉 바로 앞인 이릉현까지 밀린 육손은 지연전을 펼쳐 유비의 진채와 수군이 길게 늘어서게 만들고 겨울의 메마른 기후를 이용해 화공을 시행했는데 육손의 첫 화공은 불리했으나 육손이 이후 내놓은 기책인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에 유비도 장강 지류를 건너 마안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전면에 세운 군영이 불타는 것을 보고 자귀현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유비는 배를 버리고 육로로 회군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수군 궤멸과 연관되어 있을것이다. 이후 유비는 군을 수습해 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손권은 마침 위나라가 처들어오고 있었고 유비가 아직 백제(白帝)성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이로서 촉한과 손오의 국경은 이 근방으로 확정되었다.
강릉 바로 앞인 이릉현까지 밀린 육손은 지연전을 펼쳐 유비의 진채와 수군이 길게 늘어서게 만들고 겨울의 메마른 기후를 이용해 화공을 시행했는데 육손의 첫 화공은 불리했으나 육손이 이후 내놓은 기책인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에 유비도 장강 지류를 건너 마안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전면에 세운 군영이 불타는 것을 보고 자귀현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유비는 배를 버리고 육로로 회군하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수군 궤멸과 연관되어 있을것이다. 이후 유비는 군을 수습해 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손권은 마침 위나라가 처들어오고 있었고 유비가 아직 백제(白帝)성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이로서 촉한과 손오의 국경은 이 근방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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