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항 문학: 두 판 사이의 차이

28번째 줄: 28번째 줄:
* '''『호산외사(壺山外史)』''' : 1844년(헌종10) 직하시사의 조희룡에 의해 간행. '호산외기(壺山外記)’라고도 한다.
* '''『호산외사(壺山外史)』''' : 1844년(헌종10) 직하시사의 조희룡에 의해 간행. '호산외기(壺山外記)’라고도 한다.
* '''『규사(葵史)』''' :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達西精舍)에서 간행. 달서정사는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모임이었다. 『규사』는 조선 개국 때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서얼들에 대한 차별이 제도화되어 온 역사와 서얼 차별 철폐 노력의 역사, 서얼 출신 주요 인물의 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2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사' 항목]</ref>
* '''『규사(葵史)』''' :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達西精舍)에서 간행. 달서정사는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모임이었다. 『규사』는 조선 개국 때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서얼들에 대한 차별이 제도화되어 온 역사와 서얼 차별 철폐 노력의 역사, 서얼 출신 주요 인물의 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26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사' 항목]</ref>
*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 : 1862년 직하시사의 유재건에 의해 간행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1862년 직하시사의 유재건에 의해 간행
* '''『희조일사 熙朝軼事』''' : 1866년(고종3) 직하시사의 이경민에 의해 간행
* '''『희조일사(熙朝軼事)』''' : 1866년(고종3) 직하시사의 이경민에 의해 간행
* '''『일사유사 逸士遺事』''' : 1922년 장지연에 의해 간행. 『호산외사』 · 『이항견문록』 · 『희조일사』를 합쳐서 다시 엮은 것.
* '''『일사유사(逸士遺事)』''' : 1922년 장지연에 의해 간행. 『호산외사』 · 『이항견문록』 · 『희조일사』를 합쳐서 다시 엮은 것.


{{각주}}
{{각주}}
[[분류:문학]][[분류:한국사]]
[[분류:문학]][[분류:한국사]]

2018년 9월 3일 (월) 13:40 판

위항 문학(委巷文學)이란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漢文學) 활동을 말한다.[1]

설명

위항 문학은 여항 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한다. '위항'과 '여항'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 위항인(委巷人)이라는 말은 양반 사대부를 제외한 피지배 계층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위항 문학'이라고 할 때에는 서민 문학과는 구별되는, 중인들이 주로 주도하여 서민 문학과 양반 문학의 중간적 성격을 띤 문학을 지칭한다. 위항 문학은 기본적으로 한시를 매개로 전개된 한문학(漢文學)이었으며, 마치 양반들처럼 시사(詩社 : 시 창작 공동체)를 결성하고 시집을 발간하는 등 양반 지향적인 성격을 띠었다.[2] 그러나 동시에 신분 제도의 굴레에 얽매여 뜻을 펼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독특한 개성과 지향을 드러냄으로써 양반 문학과도 구별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위항 시인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반이나, 18세기 들어서 중인 이하 계층의 문학 참여가 활발해짐에 따라 위항 문학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18세기 들어 위항 문학 활동은 신분 상승 운동의 성격을 띠었고, 19세기 말에는 개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발전하여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문화 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위항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구별되는 문학 운동 자체는 동력을 잃고 사그라들게 되는데, 이미 신분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중인들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져 '위항인'이라는 정체성이 이전과 같은 구심점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출신 배경이 낮은 신분임을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항 문학 활동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첫째 시사의 조직, 둘째 공동 시집의 발간, 셋째 공동 전기 발간을 통한 중인들의 자기역사 편찬으로 정리할 수 있다.[3]

주요 시사

  • 낙사시사(洛社詩社) : 17세기 말 숙종 대 임준원 주도로 결성. 위항인 시사의 효시.
  • 옥계시사(玉溪詩社) : 18세기 말 정조 대 천수경 주도로 결성.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주로 모여 창작 활동을 펼쳤다 하여 '송석원시사'라고도 함. 19세기 전반 들어 옥계시사로부터 다양한 시사들이 파생되어 나옴.
  • 서원시사(西園詩社)
  • 비연시사(斐然詩社)
  • 직하시사(稷下詩社) : 위항인들의 공동전기를 활발히 간행함
  • 육교시사(六橋詩社) : 1870년대 말 개항 직후 결성. 당시 청계천의 6번째 다리인 수표교 주변에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데서 이름을 따옴.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개화파로 부상.

주요 공동시집

  • 『육가잡영(六家雜詠)』 : 1668년(현종9) 간행. 위항시인 6인의 작품을 모은 시집.
  • 『해동유주(海東遺珠)』 : 1712년(숙종38) 홍세태에 의해 간행. 10여 년간 48가 230여 수의 시를 수집한 시집으로 본격적 위항시집의 효시
  • 『소대풍요(昭代風謠)』 : 1737년(영조13) 고시언에 의해 간행. 이 시집을 시작으로 하여 60년마다 공동시집을 간행하는 전통이 자리잡음.
  • 『풍요속선(風謠續選)』 : 1797년(정조21) 옥계시사에서 간행
  • 『풍요삼선(風謠三選)』 : 1857년(철종8) 직하시사에서 간행
  • 『소대풍요』로부터 180년째인 1917년에 네 번째 시집 '풍요사선(風謠四選)'의 간행이 추진되었으나 무산되었다.
  • 『대동시선(大東詩選)』 : 간행이 무산된 '풍요사선'을 대신하여 1918년 장지연에 의해 간행. 이 시집 자체는 위항 시인들의 작품만을 모은 위항 시집은 아니고 고조선 때부터 당시까지의 한국 한문시를 망라한 방대한 시선집인데, 제5책의 9권과 10권에 『풍요삼선』 이후 위항 시인들의 작품을 싣고 있다.

주요 공동전기

  • 『연조귀감 㙉曹龜鑑』 : 1777년(정조1) 이진흥에 의해 간행. 집안 대대로 향리직에 종사해 온 월성 이씨 집안의 역사(家史)를 서술.
  • 『호산외사(壺山外史)』 : 1844년(헌종10) 직하시사의 조희룡에 의해 간행. '호산외기(壺山外記)’라고도 한다.
  • 『규사(葵史)』 :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達西精舍)에서 간행. 달서정사는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모임이었다. 『규사』는 조선 개국 때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서얼들에 대한 차별이 제도화되어 온 역사와 서얼 차별 철폐 노력의 역사, 서얼 출신 주요 인물의 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4]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1862년 직하시사의 유재건에 의해 간행
  • 『희조일사(熙朝軼事)』 : 1866년(고종3) 직하시사의 이경민에 의해 간행
  • 『일사유사(逸士遺事)』 : 1922년 장지연에 의해 간행. 『호산외사』 · 『이항견문록』 · 『희조일사』를 합쳐서 다시 엮은 것.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