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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년 아글라브 조의 창시자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 현재의 [[튀니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프리키야의 [[에미르]]<ref>이슬람계의 제후의 명칭 중 하나</ref>가 되었다. 805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총독과 10년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 8년 뒤에 그의 후계자 압달라 1세에 의해 갱신된다. 이 시기에 아글라브 조는 모로코 지방의 아드리사 왕조와 경쟁하고 있었고,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신에 아글라브 조는 시칠리아 섬에 상인을 보내 교역하는 등 평화적인 관계를 이어 갔다.
799년 아글라브 조의 창시자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 현재의 [[튀니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프리키야의 [[에미르]]<ref>이슬람계의 제후의 명칭 중 하나</ref>가 되었다. 805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총독과 10년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 8년 뒤에 그의 후계자 압달라 1세에 의해 갱신된다. 이 시기에 아글라브 조는 모로코 지방의 아드리사 왕조와 경쟁하고 있었고,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신에 아글라브 조는 시칠리아 섬에 상인을 보내 교역하는 등 평화적인 관계를 이어 갔다.
==유페미우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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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5일 (월) 16:26 판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827년 6월부터 902년까지
결과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 정복 완료
남이탈리아가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노출됨.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발라타
아그넬루스 유스티냐누스 파트리샤우스
테오도투스†
알렉시오스 모실레
콘스탄티노스 오 코우초미티스
유페미우스†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
무함마드 이븐 아불 자와리
아스바그 이븐 와킬
이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아달라
알 파들 이븐 야쿱
아불 아글라브 이븐 이브라힘
아불 아글라브 알 압바스 이븐 알 파들
카파야 이븐 수퍈
수와다 이븐 카파야
아불 압바스 이븐 압달라 2세
이브라힘 2세

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은 827년 7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 섬을 본격적으로 침공했을 때부터 902년 시칠리아 섬 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타우로메니온(현 타우로미나)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진행되었다. 몇몇 요새들은 계속 비잔티움 제국의 손에 있었지만 시칠리아 섬은 사실상 이슬람 세력의 손 안에 놓이게 된다. 이후 11세기 노르만 족들이 시칠리아 섬을 침공해 올 때 까지 이슬람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7세기 중반부터 시칠리아 섬은 이슬람으로부터의 공격에 시달렸지만, 이러한 공격은 해적질에 그쳐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지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후 827년 이슬람 세력에게 기회가 온다. 시칠리아 섬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페미우스가 패배하고 섬에서 탈출한 뒤 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조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아글라브 조는 이를 자기네 세력을 확장하고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지하드에 대한 조건을 완화시킬 좋은 기회로 보아 군대를 지원해 준다. 이슬람 군대가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이후 제일 처음으로 공격한 도시는 시라쿠사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후 다가온 비잔티움 제국의 역공을 막아내고 다른 요새들을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하였고, 4년 뒤에는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의 지원을 받아 팔레르모를 정복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시칠리아에 지원을 보내기는 하나, 큰 지원을 보내줄 처지는 못되었다. 소아시아 지방과 에게 해에서 아바스 왕조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시라쿠사 섬 중앙에 있는 엔나 요새는 이슬람의 확장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요새였지만 859년에 함락되고 만다. 엔나 요새의 함락 이후 이슬람 세력은 시칠리아 섬 동쪽을 향해 더 수월한 공격이 가능해졌다. 878년에는 긴 공성전 끝에 시라쿠사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비잔티움 제국은 시칠리아 섬에서 쫓겨난 처지로 전락한다. 이후 시칠리아 섬 동북쪽의 몇몇 요새들의 회복하는 등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수복을 위한 공격이 11세기까지 수차례 진행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902년에 타우로메니온 요새가 함락되면서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 정복이 완료된다.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시칠리아는 번영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이프리키야[1]의 토후국으로부터 때어내어 반(半)독립국인 시칠리아 에미르국을 성립한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1060년대 노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침공해 올때까지 존속되며, 심지어 노르만 치하에서도 번창해 노르만-아랍-비잔티움 문화 양식을 창조해 내기도 하였다.

배경

고대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크게 번영했던 시칠리아는 5세기 부터 시작된 반달 족들의 침공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535년 비잔티움 제국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였고, 고트 전쟁(535–554) 때 동고트족에 의해 침공을 받지만 이후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된다. 바다로 둘러 쌓인 덕에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의 롬바르드 족의 침공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부유한 영토로 남아 있었지만, 이는 사라센 해적들의 침공이 시칠리아 섬으로 집중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아일랜드 출신인 존 바그넬 부리는 이에 대해서

풍요로운 땅이자 가치있는 재산 그 자체로 시칠리아는 지중해를 양분하는 위치에 있기에 동방의 상업적 혹은 정치적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이슬람 세력에게는 막대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아프리카에서 야망으로 가득찬 지도자가 이탈리아로 혹은 아드리아해로 다가 올려면 꼭 거쳐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라고 할 정도로 이슬람 세력에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다.

지속적으로 시칠리아 섬은 북아프리카 해적들의 침공 목표가 되었다. 최초의 침략은 652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이슬람 세력이 해적을 기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였을 정도로 시칠리아 섬은 해적질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해 오자 시칠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아졌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는 5여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시라쿠사에서 거주한 적도 있었다. 8세기 초반에는 이슬람 해적들의 공격이 집중되기는 하나 아직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지방으로 확장하고 있던 시기라 극심하지는 않았다. 이프리키야의 총독인 압드 알 라만 알 피리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52년에 샤르데냐 섬과 함께 실제로 공격하였으나 베르베르 족들의 반란으로 무산되었다.

799년 아글라브 조의 창시자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 현재의 튀니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프리키야의 에미르[2]가 되었다. 805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총독과 10년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 8년 뒤에 그의 후계자 압달라 1세에 의해 갱신된다. 이 시기에 아글라브 조는 모로코 지방의 아드리사 왕조와 경쟁하고 있었고,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신에 아글라브 조는 시칠리아 섬에 상인을 보내 교역하는 등 평화적인 관계를 이어 갔다.

유페미우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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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북아프리카
  2. 이슬람계의 제후의 명칭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