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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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인물이름 = 아돌프 히틀러
| 이름    =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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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독일제국 제14대 총리 <br /> 독일제국 총통 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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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기간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총리) <br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총통 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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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총리, 그리고 [[나치]] 독일의 총통을 지낸 독재자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제국의 총리, 그리고 [[나치]] 독일의 총통을 지낸 독재자다.


== 개요 ==
== 개요 ==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의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타 민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너무나 당연시한 극단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이고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진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특정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겠다는 망상을 실행에 옮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자'''.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의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타 민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너무나 당연시한 극단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이고 [[아리아인]] 우월주의에 빠진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특정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겠다는 망상을 실행에 옮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자'''.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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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기 히틀러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았더라도 반유대주의, 최소한 게르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던 룸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갖고 있는 돈을 대부분 박물관 및 오페라 등에 투자했다고 하며, 특히 독일 민족신화를 오페라 작품화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몇 번이고 감상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 히틀러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았더라도 반유대주의, 최소한 게르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던 룸메이트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갖고 있는 돈을 대부분 박물관 및 오페라 등에 투자했다고 하며, 특히 독일 민족신화를 오페라 작품화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몇 번이고 감상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가 국경을 넘어 쫓아온 오스트리아 수사관들에게 무릎끓고 싹싹 빌며 몸이 허약해서 군대에 못간다고 사정하여 끝내 면제 판정을 받아냈다. 본인은 훗날 《[[나의 투쟁]]》에서 '''다민족 잡탕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대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1913년 당시 군대에 가기 싫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1년 뒤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것을 근거로 히틀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추론도 있지만 평시였던 1913년과 '''전시로 애국심의 광기에 다들 미쳐있던 1914년 8월'''을 똑같이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1913년에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가 국경을 넘어 쫓아온 오스트리아 수사관들에게 무릎끓고 싹싹 빌며 몸이 허약해서 군대에 못간다고 사정하여 끝내 면제 판정을 받아냈다. 본인은 훗날 《[[나의 투쟁]]》에서 '''다민족 잡탕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대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1913년 당시 군대에 가기 싫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1년 뒤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것을 근거로 히틀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추론도 있지만 평시였던 1913년과 '''전시로 애국심의 광기에 다들 미쳐있던 1914년 8월]'''을 똑같이 보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
===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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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 형기가 감형되어 9개월의 복역 끝에 출소했지만 당세는 많이 약해졌고 당내 반대파가 강성해지는 등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수감생활동안 히틀러는 두 가지의 성과를 얻는데 하나는 [[나의 투쟁]]을 저술하여 지명도를 전국적으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 쿠데타로 정권을 쓰러뜨릴 수 없으니 합법적 수단(선거)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전략적 방침 변화였다.
이루 형기가 감형되어 9개월의 복역 끝에 출소했지만 당세는 많이 약해졌고 당내 반대파가 강성해지는 등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수감생활동안 히틀러는 두 가지의 성과를 얻는데 하나는 [[나의 투쟁]]을 저술하여 지명도를 전국적으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 쿠데타로 정권을 쓰러뜨릴 수 없으니 합법적 수단(선거)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전략적 방침 변화였다.


이후 여라 차례 선거에서 나치는 쓴맛을 보았으나 꾸준희 의회에 의석을 내는 원내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뒤를 이어 원내 제2당까지 치고 올라왔고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여라 차례 선거에서 나치는 쓴맛을 보았으나 꾸준희 의회에 의석을 내는 원내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뒤를 이어 원내 제2당까지 치고 올라왔고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결선투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과에는 당 바깥으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최악의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기성정당에의 불신, 카톨릭중앙당이나 국가인민당 등 보수정당의 분열과 나치와의 연대 모색,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공산당의 성장과 이에 따른 공산혁명에의 공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당 내부로는 [[헤르만 괴링]]과 [[파울 요제프 괴벨스]]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성과를 내주었는데 특히 괴벨스의 천재적 선동술은 나치의 급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이러한 성과에는 당 바깥으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최악의 경제위기와 이로 인한 기성정당에의 불신, 카톨릭중앙당이나 국가인민당 등 보수정당의 분열과 나치와의 연대 모색, 사회민주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공산당의 성장과 이에 따른 공산혁명에의 공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당 내부로는 [[헤르만 괴링]]과 [[파울 요제프 괴벨스]]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성과를 내주었는데 특히 괴벨스의 천재적 선동술은 나치의 급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결국 1932년 1차 총선에서 나치는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는 아직 기존 정당의 경계심, 그리고 히틀러의 고집스러운 협상태도로 집권하지 못했지만 슐라이허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고, 같은 해 11월 2차 총선에선 의석수가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원내 1당을 유지, 리페 주의회 선거 승리와 보수계 정치인이며 전 총리이기도 한  [[프란츠 폰 파펜]]의 협력으로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정을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
결국 1932년 1차 총선에서 나치는 사회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는 아직 기존 정당의 경계심, 그리고 히틀러의 고집스러운 협상태도로 집권하지 못했지만 슐라이허 내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고, 같은 해 11월 2차 총선에선 의석수가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원내 1당을 유지, 리페 주의회 선거 승리와 보수계 정치인이며 전 총리이기도 한  [[프란츠 폰 파펜]]의 협력으로 {{날짜/출력|1933-1-30}} 마침내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정을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


{{인용문|말이 좋아 아돌프 히틀러 내각이지 사실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ref>나치와 연정한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 히틀러 내각에는 경제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본인의 무능과 실수에 히틀러를 과소평가한 대가로 얼마 안 가 실권을 잃고 당은 나치에 흡수되었다.</ref> 내각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말만 하고 행동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한다. 이 정부의 인선으로 흑막이 까발려졌다. 진작부터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국가사회주의는 실은 우익 대자본 민족주의 정당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사실은 국가자본주의였던 것이다.|[[1933년]] [[1월 30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쿠르트 슈마허<ref>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08p</ref>}}
{{인용문|말이 좋아 아돌프 히틀러 내각이지 사실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ref>나치와 연정한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 히틀러 내각에는 경제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본인의 무능과 실수에 히틀러를 과소평가한 대가로 얼마 안 가 실권을 잃고 당은 나치에 흡수되었다.</ref> 내각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말만 하고 행동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한다. 이 정부의 인선으로 흑막이 까발려졌다. 진작부터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국가사회주의는 실은 우익 대자본 민족주의 정당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사실은 국가자본주의였던 것이다.|{{날짜/출력|1933-1-30}},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쿠르트 슈마허<ref>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08p</ref>}}


{{인용문|그 사람은 우리가 고용했다.|[[1933년#1월|1933년 1월]] 말, 프란츠 폰 파펜<ref>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ref>}}
{{인용문|그 사람은 우리가 고용했다.|[[1933년#1월|1933년 1월]] 말, 프란츠 폰 파펜<ref>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541p</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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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
===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ref>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과 [[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ref>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ref>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과 [[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ref>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1938년 3월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간 국가를 통합(사실상 흡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 주테텐란드를 빼앗았다.([[뮌헨 협정]]) 그리고 1939년 3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멸망시키며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할양받았다.
1938년 3월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간 국가를 통합(사실상 흡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 주테텐란드를 빼앗았다.([[뮌헨 협정]]) 그리고 1939년 3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멸망시키며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할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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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
===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
{{인용문|1918년 11월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ref>1918년 11월이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항복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패전, 항복하는 굴욕의 역사가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del>결국 망상임이 드러난다.</del></ref>|[[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중}}
{{인용문|1918년 11월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ref>1918년 11월이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항복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패전, 항복하는 굴욕의 역사가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del>결국 망상임이 드러난다.</del></ref>|{{날짜/출력|1939-9-1}}, 아돌프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중}}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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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
== 사상 ==
{{참고|나치즘}}
{{참조|나치}}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지배자 민족(Herrenvolk)>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ㅊ|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 좋은 거다}} 자기네 아리아(Aryan, 독일어로는 Arier)인,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0~175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이다.) {{ㅊ|근데 170이 작은 건가?}} {{ㅊ|[[루저|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다만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서 난쟁이로 묘사하였으나 당시 시대에는 작지 않았다. 더구나 근육질에 군대에서 참호격투 등을 배워서 실제로 히틀러를 만난 사람들도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지배자 민족(Herrenvolk)>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ㅊ|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 좋은 거다}} 자기네 아리아(Aryan, 독일어로는 Arier)인,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3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이다.) {{ㅊ|근데 173이 작은 건가?}} {{ㅊ|[[루저|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을 광신적으로 믿어서 독일인도 T4 작전 등으로 그냥 학살했고 짐승들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처럼 인간을 개량하려고 했었다. 완벽한 독일인을 탄생시키려는 노력은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았으나 연습으로 여기고 계속 진행했다. 특히 유대인은 이에 대한 실험을 많이 당했다.


== 성격 ==
== 성격 ==
세계 최악의 악당이라는 점 때문에 성격도 개차반인것 같지만, '''의외로 성격만큼은 인격자 No.1이었다.''' 다만 나의 투쟁<ref>민중과 열등 종자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분명히 드러나는 책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책을 읽고 히틀러 암살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ref> 등을 읽어보면 연기와 기만<ref>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와 친하게 지낸 유대인들 역시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ref>일 수도 있다.
세계 최악의 악당이라는 점 때문에 성격도 개차반인것 같지만, '''의외로 성격만큼은 인격자 No.1이었다.'''


일례로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이 제정된 곳은 다름 아닌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동물을 아끼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으로 실제로 히틀러는 애완견 셰퍼드 '블론디'를 무척이나 아끼는 좋은 주인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이 블론디를 잡아먹을까봐 자살할 때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성격답게 고양이는 충성심이 없다하여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관처럼 보호해야할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자신의 취향과 소신대로 나누었다.
일례로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이 제정된 곳은 다름아닌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가 동물을 아끼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으로 실제로 히틀러는 애완견 셰퍼드 '블론디'를 무척이나 아끼는 좋은 주인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이 블론디를 잡아먹을까봐 자살할 때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성격답게 고양이는 충성심이 없다하여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종관처럼 보호해야할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자신의 취향과 소신대로 나누었다.


이 외에도 주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었으며 예술문학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도 조예가 있는 등 여러모로 지적인 신사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의외로 스캔들도 하나 없었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동정(...)이었다. 히틀러에게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있다는 사실도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 단 애바는 공식적으로 정부이고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괴벨스의 처인 마그다가 맡았었다. 에바와는 자살 직전에 결혼했다.
이 외에도 주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었으며 예술문학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도 조예가 있는 등 여러모로 지적인 신사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의외로 스캔들도 하나 없었고 실제로 죽을 때까지 동정(...)이었다. 히틀러에게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있다는 사실도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 단 애바는 공식적으로 정부이고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괴벨스의 처인 마그다가 맡았었다. 에바와는 자살 직전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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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의 종교관 ==
== 히틀러의 종교관 ==
히틀러의 종교관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개신교인들은 히틀러가 가톨릭 혹은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하며 반기독교인들은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히틀러의 종교관이 어떻건 그게 개신교/가톨릭/무신론이 틀렸다는 근거는 될 수 없지만 상대편을 공격하기에는 좋은 소재라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히틀러의 종교관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주장하고, 기독교인들은 히틀러가 비기독교인 혹은 반기독교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가 생전에 친기독교적 성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쓴 적도 있으며,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를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생전에 친기독교적 성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쓴 적도 있으며,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를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것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공산주의자로 낙인 찍던 시대였기에, 무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밝힐 경우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저런 발언을 쓴건 당시 20세기 초반 기독교 문화권에선 굳이 믿는 신앙이 없더라도 자신의 사상을 맹신의 단계에 이르게 하고자 할 때 신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합치한다고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걸 고려해고 봐야 한다.
허나 이것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공산주의자로 낙인 찍던 시대였기에, 무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밝힐 경우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저런 발언을 쓴건 당시 20세기 초반 기독교 문화권에선 굳이 믿는 신앙이 없더라도 자신의 사상을 맹신의 단계에 이르게 하고자 할때 신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합치한다고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걸 고려하면 많이 빈약하다고 할수있다.


히틀러가 반가톨릭적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말엽에 [[교황]] [[비오 12세]]를 납치하여 총살시키고 [[바티칸]]을 불태우려 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로 가톨릭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ref>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의 증언</ref> 히틀러는 또 수많은 [[신부]]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은 틀려먹은 종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ref>이때 카톨릭을 틀려먹은 종교라고 비방한 이유 중 하나가 신부들은 남색집단이며 동성애적 성향으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카톨릭이 교리상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긴다는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ref> 그리고 일본의 신토에 대해서 우호적인 발언을 보이기도 했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하드라고 무슬림에 우호적인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개신교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협조하면 자신도 협조적으로 나갔지만 자신에게 반발하면 탄압하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일관성이 없으며 철저하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더군다나 제2차 세계 대전 말엽에 [[교황]] [[비오 12세]]를 납치하여 총살시키고 [[바티칸]]을 불태우려 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로 가톨릭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ref>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의 증언</ref> 히틀러는 또 수많은 [[신부]]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은 틀려먹은 종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 능력 ==
== 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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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
=== 군사 ===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ref>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ref>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는데 동의한다. 사실 정치 지도자로서 그가 군사적 분야에 무지하다는 것은 단점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 지도자이자 국가원수인 히틀러가 지나치게 군사작전과 군 인사권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군사경험이라고는 사병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것이 전부인 히틀러는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주제를 몰랐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ref>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ref>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전쟁 초기에는 유능한 지휘관들에게 일임하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이후엔 고속진격 중인 기갑부대의 고립을 우려해 진격정지 명령을 내려 영국-프랑스 연합군 30만여 명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고, 프랑스 항복 직후엔 영국에 헛되이 휴전을 제의하다 두 달을 날려먹었다. 이로 인해 영국이 공군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면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퇴하였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독소전쟁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선지휘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으며 과정에서 '''장군들은 경제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모르오'''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키예프 공략의 경우 당위성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키예프 전투를 통해 얻은 군사적 성과도 엄청나기에 이때까진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1942년 전역부터는 '''북아프리카 군단이 이집트와 중동을 지나 터키와 함께 카프카스로 올라가고, 블라우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와 카스피해의 유전지대를 접수하는 양익 포위망'''이라는, 21세기 미군조차 실현할 없는 황당한 망상을 정식 작전으로 강요하여 채택시켰으며,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려는 오판으로 결국 6군 20만 대군을 통채로 소련군에 헌납하고 남부전선의 붕괴를 유발했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으며, 1944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역량을 훨씬 초월한 아르덴 대공세를 기획, 독일군 스스로 서부전선을 붕괴시켰다.


결론을 내리자면 히틀러의 군사적 식견은 정치인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 떠넘기가로 히틀러 때문에 모든게 망했다는 편견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낫질 작전을 생각하면 히틀러 덕분에 독일이 그정도라도 해봤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식견의 형편없음 외에도 히틀러는 과대망상증 환자답게 지나치게 신병기, 비밀병기에 집착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6호 전차의 대규모 투입을 위해 공세를 지연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이며, [[1944년]]부터 영국으로 쏘아진 [[V1]]과 [[V2]]를 비장의 역전병기로 생각했던 점, [[Me 262]]를 폭격용으로 활용하려 한 점 등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 각종 음모론 및 낭설 ==
== 각종 음모론 및 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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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여성설
;히틀러 여성설
:생존설과 달리 이쪽은 어느 정도 의심을 할 이유가 있는 것이, 히틀러의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두개골의 주인은 '''여성'''이라는 것이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9/28/0200000000AKR20090928175200009.HTML?did=1179m "히틀러 두개골 조각은 타인 것"<美연구진>], [[2009년]] [[9월 28일]] [[연합뉴스]]</ref>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이 이미 제기된 상태인데 히틀러의 두개골이라 알려진 것은 사실 [[에바 브라운]]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 통설과 반대되는 것으로, 기존에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 에바 브라운이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265970 "히틀러, 권총 아닌 음독자살"] [[2010년]] [[5월 8일]], [[연합뉴스]]</ref>  
:동독 학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가설로 생존설과 달리 이쪽은 어느 정도 의심을 할 이유가 있는 것이, 히틀러의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두개골의 주인은 '''여성'''이라는 것이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9/28/0200000000AKR20090928175200009.HTML?did=1179m "히틀러 두개골 조각은 타인 것"<美연구진>], {{날짜/출력|2009-9-28}} [[연합뉴스]]</ref>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이 이미 제기된 상태인데 히틀러의 두개골이라 알려진 것은 사실 [[에바 브라운]]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 통설과 반대되는 것으로, 기존에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 에바 브라운이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265970 "히틀러, 권총 아닌 음독자살"] {{날짜/출력|2010-5-8}}, [[연합뉴스]]</ref>  


;히틀러 혈육설
;히틀러 혈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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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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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일인]] [[분류:나치]]
[[분류:독재자]] [[분류:독일인]] [[분류:나치]] [[분류:1889년 출생]]
[[분류:194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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