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편집하기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

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139번째 줄: 139번째 줄:


=== 군사 ===
=== 군사 ===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ref>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ref>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ref>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ref>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ref>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ref>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ref>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ref>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수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수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