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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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인물 정보
|인물이름 = 아돌프 히틀러
| 이름    = 아돌프 히틀러
|원어이름 = Adolf Hitler
| 원어이름   = Adolf Hitler
|배경색  =
| 그림    = Bundesarchiv Bild 183-H1216-0500-002, Adolf Hitl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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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파일:Bundesarchiv Bild 183-H1216-0500-002, Adolf Hitler.jpg]]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br /> 브라우나우 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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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일  = 1945년 4월 30일 (5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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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지  = [[독일]] [[베를린]]
|다른이름 =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독일]]
|출생일  = {{출생일|1889|4|20}}
| 칭호     = 독일제국 제14대 총리 <br /> 독일제국 총통 겸 총리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br /> 브라우나우 암 인
| 칭호기간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총리) <br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총통 겸 총리)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45|4|30|1889|4|20}}
| 정당       = 1920 ~ 1921: 독일 노동자당 <br /> 1921 ~ 1945: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사망지  = [[독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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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1920~1921: 독일 노동자당 <br /> 1921~1945: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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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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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의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타 민족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너무나 당연시한 극단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이고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진 사상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특정 민족 전체를 멸절시키겠다는 망상을 실행에 옮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자'''.
우생학과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다. 타민족은 물론 독일 민족에게도 반인륜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많은 실험을 했다. 반공산주의, 반민주적인 인물이었으며 나의 투쟁<ref>가끔 괴벨스의 명언으로 둔갑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오히려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열렬한 추종자였다.</ref>에는 '민중들에게 거짓말을 하려면 굉장한 거짓말을 해라', '민중들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주어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민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등의 대중관을 기록했다. 그는 하층민들의 세계에 대해 어둡고 가난하며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을 원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본토의 유대인도 완전히 말살하지 않았고 유럽의 유대인 역시 대략 절반 정도밖에 학살하지 않아서 과장된 소문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있다. 사실 그는 하류층들<ref>물론 이것은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판단된 기준이라 기존 기득권이나 민중들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ref>을 주로 학살했으며 일종의 하류층 청소가 목표치에 근접하면 학살이 잠시 중단되거나 느려지기도 했다. 그는 독일 민족 역시 최종적으로 하위 80%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히틀러는 우생학과 사회 진화론을 위하여 주로 유대인이나 열등 민족들을 대상으로 여러 연구와 실험을 지시<ref>이들은 인류를 마치 개처럼 다루었고 연합국의 엘리트들조차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런 소문들을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ref>했으며 어느 정도 연습이 끝나자 이를 독일인들에게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최종적으로 모든 인류를 가장 우월한 인간들<ref>당연히 독일 태생이다.</ref>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의 우월주의적 사상은 현실적인 장벽을 인정하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단순한 선전선동용 구호도 아니었다.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역사]]의 전개에 있어 특정 개인 한 명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A라는 인물이 큰 업적을 이뤘어도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이며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를 대신할 다른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요소로 자리잡는 매우 드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한 대체불가능적 요소가 매우 극단적으로, 그것도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인류 전체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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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
===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ref>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과 [[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ref>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ref>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과 [[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ref>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민중들이 자신의 독재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도록 각계각층을 철저히 하향식으로 조직했다. 어린이와 학생들도 히틀러 유겐트, 나치 독일 학생연맹 등으로 조직되었으며 나치 자동차 운전사단, 나치 여성단, 의사동맹, 교사동맹, 공무원동맹 등 민중 사회<ref>친위대와 같은 나치 엘리트는 물론 귀족이나 그와 비슷한 자본가 태생은 예외였다. 사실 히틀러의 나치당이나 그에 협력한 귀족, 자본가들은 민중 출신이 의사든 공무원이든 관계없이 상당히 평등하게 대해 하류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ref><ref>사실 히틀러는 가난과 같은 하류 생활을 한다고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등하고 비열하며 게르만의 생활과 문화를 더럽히기에 격리하거나 없애 버려야 하는 일종의 태생적 천민들을 혐오했다. 히틀러는 그런 인간이 탄생하는 책임이 그 사람 개인에게만 있지는 않고 환경에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히틀러는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여 오염된 사람들은 이미 늦었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적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대략 쓰레기 부모로부터 쓰레기 자식이 나오며 일반적으론 그게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히틀러는 그런 쓰레기 인간이 성공한다고 해도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f>의 모든 사람들이 나치당과 그 보조 조직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모든 단체들은 나치당과 친위대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따라서 결혼 역시 강제 혹은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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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
== 사상 ==
{{참고|나치즘}}
{{참조|나치즘}}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지배자 민족(Herrenvolk)>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ㅊ|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 좋은 거다}} 자기네 아리아(Aryan, 독일어로는 Arier)인,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0~175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이다.) {{ㅊ|근데 170이 작은 건가?}} {{ㅊ|[[루저|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다만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서 난쟁이로 묘사하였으나 당시 시대에는 작지 않았다. 더구나 근육질에 군대에서 참호격투 등을 배워서 실제로 히틀러를 만난 사람들도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끝이 나지 않을 정도이지만, 이것들 중에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시하고 가장 1순위였던 사상은 <지배자 민족(Herrenvolk)>사상이었다. 매우 극심한 정도의 국가주의로서 {{ㅊ|애국심이든 뭐든지 너무 심하면 안 좋은 거다}} 자기네 아리아(Aryan, 독일어로는 Arier)인, 즉 백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주장이다. 근데 사실 이 인종은 일부 사람들만이 주장하는, 말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인종인데 이에 대해서 히틀러는 백인이며, 키가 크고, 노란색 머리에 파란 눈인 인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진짜 웃긴건 이중에서 백인이라는 거 뺴면 히틀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추정 키가 170~175cm로 작은 편이고, 머리색도 검정/갈색에다가 눈도 갈색. (여기서 키는 히틀러가 체격 검사시 복장 벗는 것을 거부해서 추정된 키이다.) {{ㅊ|근데 170이 작은 건가?}} {{ㅊ|[[루저|180 미만이면 다 키 작은 거 아닌가요?]]}} 다만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서 난쟁이로 묘사하였으나 당시 시대에는 작지 않았다. 더구나 근육질에 군대에서 참호격투 등을 배워서 실제로 히틀러를 만난 사람들도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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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
=== 군사 ===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ref>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ref>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예스맨이자 아첨꾼에 불과한 [[빌헬름 카이텔]]을 제외하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을 모두 형편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히틀러는 군인이 아닌 정치인이고 당연히 직업군인에 비해서는 그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으로 보일 정도로 형편없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어지간한 나라는 패망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만드는 등 정치인들의 군사적 식견은 딱히 좋은 편이 아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는 예외적인 경우고 드 골의 경우 군인이 정치인을 겸한 경우니 논외로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망친 군사적 사례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장성들의 제안 중 하나를 골랐다가 망하거나 독단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책임전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기에<ref>전후 국방군 장성들이 주도하여 전사를 기록하거나 이들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잘한것은 자신들의 공으로 잘못된 것은 히틀러의 탓으로 돌렸고 히틀러는 이미 죽었기에 반론같은건 당연히 불가능했다.</ref> 그렇게 여겨질 뿐이며 이후 소련측 자료가 공개되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현 시점에는 이러한 신화들도 벗겨지고 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ref>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ref>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전쟁 초기 프랑스 전역의 경우 다른 지휘부가 말도 안된다고 무시했던 에리히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과감하게 채택하고 프랑스를 6주만에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다만 이때 연합군의 역습을 우려한 룬트슈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영국이 도망쳤다는게 옥의 티로 남았다. 이후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공군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을 격퇴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독일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 지휘부의 역량 부족과 영국의 효율적인 대응으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의 탓을 하는 것이 런던 공습인데 애초에 주간공습을 담당하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시작부터 런던공습을 요구하고 있었고 휴고 슈페를레 장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ref>가령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에쇼넥 장군은 런던을 공격하면 영국 공군을 런던으로 끌어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런던공습을 주장했었다.</ref> 런던공습을 지지하고 있었고 이를 헤르만 괴링 원수가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것이 작전은 안풀리고 그 와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공습하면서 괴링도 런던 공습을 받아들여서 런던 공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다 런던공습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어었다는 주장도 현재 들어서는 반박되는 추세다. 결국 히틀러가 패배에 기여한것은 딱히 없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수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또 거론되는 것은 모스크바 공략의 타이밍을 놓치고 [[키예프]]를 공략하였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방군 장성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키예프에 주둔한 소련군의 규모는 60만명이 넘었고 이정도 전력을 등 뒤에 두고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했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결말만이 나올 뿐이다.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서라도 그 주공을 맡는 중부집단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담당해야할 남부집단군이 혼자서 키예프를 공략할 수 없었기에 기갑부대를 차출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 전투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게 아니라 키예프의 대승 덕분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이 정확한 결론이다.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포위되자 후퇴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고 공중보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케 하지만 공중보급도 실패하고 30만명에 달하는 6군이 그대로 사라졌다. 문제는 6군이 그렇게 버텨준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던 A집단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을 바로 뺐다면 A집단군이 포위섬멸에 당하는 결과가 나올 뿐이다. 공중보급 자체는 에쇼넥 공군참모총장과 헤르만 괴링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에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긴것도 아니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1943년에는 신형 [[6호 전차]] 판터에 집착하여 충분한 신형 전차가 준비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려 소련군에게 철저히 방어전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세가 지연된것은 라스푸티챠로 인해서 공세에 나설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당장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게 현재의 일반적인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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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일인]] [[분류:나치]]
[[분류:독재자]] [[분류:독일인]] [[분류:나치]] [[분류:1889년 출생]]
[[분류:1945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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