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폰

Mykim5902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월 15일 (월) 13:30 판 (→‎개요)
시티폰 기지국.jpg

개요

시티폰(City Phone)은 1997년 초에 런칭한 휴대전화 서비스의 일종이다.

기술적으로 CT-2에 기반하며, 발신만 할 수 있었다. 기지국은 공중전화를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기지국의 100m 부근에서 통화가 가능했다. 당시 외부에서 통화하는 방법은 공중전화와 휴대전화 서비스(셀룰러)가 있었지만 공중전화는 오래 기다려야 했고 셀룰러는 비쌌다, 시티폰은 그 틈을 파고들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삐삐 호출이 들어오면 시티폰으로 발신하면 되었기에 삐삐와 단짝으로 취급되었으며 삐삐 통합 단말기도 출시되었다. 삐삐 번호로 전화하면 시티폰으로 받을 수 있는 착신 서비스도 선보였다. - 정확히 말하면 쌍방 발신으로 삐삐 번호로 상대방이 발신하면 시티폰의 무선호출부가 울리고, 시티폰에서 발신하면 통화가 성립하는 구조다.

한국통신(현 KT)과 10개 지역 무선호출 사업자들이 연합해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각자 기지국을 구축하고 상호 접속할 수 있도록 했다. 초기에는 지역 사업자의 시티폰이 지역 바깥에서 터지지 않아 논란이 되었으나,[1] 사업자간 로밍을 시작하면서 불편이 종식되었다.[2] 기술적으로 가정용 무선전화와 다르지 않았으므로 가정용 기지국을 들여놓으면 집 전화처럼 쓸 수 있었다.[3] 필요하다면 음성 모뎀을 연결해 데이터 통신도 할 수 있었다.

빠른 쇠락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4] 시티폰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CT-2는 많은 사용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표준으로 폭발적인 사용자 증가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시티폰 가입자들은 항상 불통인 전화에 불만이 팽배했고, 대리점은 안 터지는 전화를 팔 수 없다며 반발하기도 했다.[5] 출력 부족으로 기지국의 범위가 제한되고, 제한적인 핸드오프 때문에 이동하면서 전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점입가경으로 PCS 서비스가 1997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PCS는 셀룰러처럼 어디서나 전화 수발신이 모두 가능했으며 제한적이나마 문자도 가능했고, 시티폰보다 비쌌지만 셀룰러보다 저렴했다. 시티폰이 절정인 시점에 사람들은 시티폰을 버리고 PCS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비스 개시가 10년 빨랐던 해외와 달리 한국에선 PCS 사업자와 시티폰 사업자가 동시기에 지정되어 서비스 개시 또한 겹칠 수 밖에 없었다.[6]

시티폰 서비스가 쇠락하고 IMF가 겹치면서 중소업체에 불과한 무선호출 사업자들이 적자를 계속 버틸 순 없었고,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잔여 가입자는 한국통신이 모두 떠안았다.[7] IMF 시대에 가장 저렴한 이동전화로 근근히 버텼지만 KT도 2000년에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해지시키거나 KTF PCS재판매 회선을 할당했다.[8]

기타

  • 씨티은행텔레뱅킹 상표인 ‘씨티폰(Citiphone)’과 유사해 상표 분쟁이 있었다.[9]
  • 응답하라 1994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극중 성동일이 대박날 줄 알고 시티폰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가 위에 나온 쇠락을 겪고 나서 넋이 나갔다는 이야기다. 성동일의 실성한 연기가 일품인데다 웃프기도 한 명장면이다. 참고로 그 장면 자체는 시기가 어긋난 고증 오류이다.[10]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