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제

역대 완가 황제
2대 성조 명명제 완복교 3대 헌조 소치제 완복선 4대 익종 사덕제 완복시

소치제(紹治帝, 1807년 6월 16일~1847년 11월 4일, 재위 기간 1841년~1847년)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3대 황제이다. 명명제의 맏아들로 황후 호씨(胡氏) 소생이다. 즉위 전 작위는 장경공(長慶公)이며 묘호는 헌조(憲祖)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즉위와 캄보디아 봉기[편집 | 원본 편집]

아버지 명명제가 1841년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이때 이름을 완복융(阮福曧)에서 완복선으로 바꿨다. 아버지 명명의 유언을 받은 신하들이 초기에는 소치의 조정을 보조하였다.

소치제가 즉위했을 당시엔 캄보디아 여왕 앙 메이[1]가 가정[2]에 구금되자 크메르족이 완조의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으며 시암군을 이끌던 보딘데차[3]의 도움으로 시암에 망명한 캄보디아 왕자 안동(安東)도 베트남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했고 임삼(林森)이란 승려가 짜빈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단 임삼이 직격으로 난을 일으키자 완진림(阮進林)과 완공저(阮公著) 등이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임삼 세력을 공격했지만 임삼군은 크메르족과 시암 연합군의 지원으로 평정에 실패한다.

결국 소치제는 사광거(謝光巨)의 건으로 캄보디아 땅을 포기하고 캄보디아 총독 장명강(張明講)[4]을 귀국시켰으며 군대도 철수하였다. 완조 세력들이 물러나자 캄보디아 왕자 안동은 오동(烏東)을 점령하고 다시 캄보디아 왕조를 복고시켰다. 그리고 임삼과 싸우던 완진림과 완공저가 임삼에게 밀리자 이번에는 여문덕(黎文德)을 출병시켰으며 여문덕과 함께 출병한 완진림 등이 시암 원군 격파에 성공하고 시암군들은 캄보디아로 도망가버렸다.

캄보디아를 속국으로 만들다[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오동을 점령하고 캄보디아 왕조를 복고시킨 국왕 안동은 시암의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고 베트남에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 요청이였으나 소치제는 이때를 노려 무문해(武文解) 등을 파견해 시암군을 격파한 다음 오동성을 점령했고 캄보디아의 국정에 관여하던 시암장군 보딘데차의 합의 하에 안동의 왕위를 인정하고 서로 캄보디아를 속국화하여 소치제는 캄보디아에게서 조공 관계를 확립한다.

쇄국정책과 프랑스의 침략[편집 | 원본 편집]

소치제는 아버지 명명제의 유지를 받들어 서방 세력에게 적대적이고 자국 내에선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다만 완전히 적대적이진 않았으며 서방의 선교사들을 감금하는 동시에 서양에서 출판된 서적을 번역시키도록 했다. 또한 1845년 프랑스가 순화에 같힌 선교사 5명의 석방을 요구하자 아무말 없이 풀어주는 등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자세는 1847년 프랑스와의 노골적인 요구로 깨지게 된다. 프랑스는 더이상 감금된 선교사가 없자 리고 드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를 다낭(沱㶞)에 파견시킨 후 노골적으로 베트남의 천주교 금지 정책을 폐지하라고 요청했다.

프랑스군은 처음에 요구만 할 생각이였으나 완조의 군함들이 줄지어 몰려있자 기슭에 포대를 설치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베트남이 자신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지 의심하여 완조의 전함들을 공격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러한 프랑스의 무례한 태도에 격노한 소치제는 군사적인 열세로 반격할수 없었다. 결국 금교령을 강화했으며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던 초기와 달리 적대적 성향으로 변하였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동년 11월 4일 소치제는 사망하였다. 제위는 차남 완복시가 이었으며 능호는 창릉(昌陵)이다. 소치제는 죽을때까지 프랑스의 적대적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고 마지막에 죽기 직전 아들 완복시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

보수 정책은 명명-소치-사덕대까지 유지된다.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安眉, 1815 ~ 1874(재위 1834 ~ 1840).
  2. 호찌민.
  3. Chao Phraya Bodindecha.
  4. 국왕의 섭정 격으로 꼭두각시 왕을 세우고 국정을 좌지우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