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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전말([[예비검속]]자 학살사건)=== | ===사건 전말([[예비검속]]자 학살사건)=== | ||
[[ | [[File:섯알오름 추모비.JPG|섬네일|섯알오름 추모비. 추모비 뒷편에 학살터가 위치해 있다.]] | ||
[[ | [[File:섯알오름 학살터.JPG|섬네일|섯알오름 학살터의 모습. 왼쪽 구덩이에서 수습된 시신은 [[만벵디 묘역]]에, 우측 구덩이에서 수습된 시신은 [[백조일손지묘]]에 묻혔다.]] | ||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지서에는 6월부터 7월 사이에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 유지, 부녀자, 학생 등 344명을 [[예비검속]] 명목으로 구인하여 모슬포와 한림에 분산하여 수용하였으며 경찰의 감시 아래 가족과의 면회를 실시하는 유화적 분위기를 조성시키면서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구인자를 4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지병자의 병보석을 허가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까지 밀려나는 와중에 모슬포에 주둔중이던 국군은 210명의 인원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섯알오름 남쪽 기슭에서 집단 학살한 뒤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를 은폐하고 시신 수습을 막기 위하여 이 일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군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하였다. |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지서에는 6월부터 7월 사이에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 유지, 부녀자, 학생 등 344명을 [[예비검속]] 명목으로 구인하여 모슬포와 한림에 분산하여 수용하였으며 경찰의 감시 아래 가족과의 면회를 실시하는 유화적 분위기를 조성시키면서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구인자를 4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지병자의 병보석을 허가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까지 밀려나는 와중에 모슬포에 주둔중이던 국군은 210명의 인원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섯알오름 남쪽 기슭에서 집단 학살한 뒤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를 은폐하고 시신 수습을 막기 위하여 이 일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군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