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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현종은 완혜와 대면한지 2일만에 세상을 떠났다.<ref>대월사기전서속편엔 단순히 노령으로 인한(사망 당시 70세였다.)병사라고 하나 청사고의 월남전에는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었다고 한다.</ref> 현종의 어린 공주이자 완혜의 왕후<ref>이때는 태덕의 제후왕 신분이였다.</ref>인 여옥흔은 조카인 여유겸을 싫어했기에 즉위시키고 싶지 않았고 남편인 완혜에게 태손을 험담했다. 이에 대신들이 여옥흔을 비판하자 두려워진 여옥흔은 여유겸을 즉위하게 하였고 여유겸은 여유기로 개명한뒤 완혜의 도움을 받아 조부의 뒤를 이었다.
조부 현종은 완혜와 대면한지 2일만에 세상을 떠났다.<ref>대월사기전서속편엔 단순히 노령으로 인한(사망 당시 70세였다.)병사라고 하나 청사고의 월남전에는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었다고 한다.</ref> 현종의 어린 공주이자 완혜의 왕후<ref>이때는 태덕의 제후왕 신분이였다.</ref>인 여옥흔은 조카인 여유겸을 싫어했기에 즉위시키고 싶지 않았고 남편인 완혜에게 태손을 험담했다. 이에 대신들이 여옥흔을 비판하자 두려워진 여옥흔은 여유겸을 즉위하게 하였고 여유겸은 여유기로 개명한뒤 완혜의 도움을 받아 조부의 뒤를 이었다.


한편 완혜가 형의
한편 완혜가 독단적으로 탕롱을 공격해 실권을 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덕은 동생의 권세가 커질것을 두려워해 군사를 이끌고 탕롱으로 갔다. 태덕은 여씨 황제를 폐위시킬 생각이였는지 정주의 부처를 점령했지만 민심 문제로 인해 민제의 제위를 인정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


==== 정씨의 복벽 ====
==== 정씨의 복벽 ====

2020년 8월 8일 (토) 06:27 판

개요

대월 후여조의 28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묘호는 없고 시호는 민황제. 본명은 여유겸이며 현종의 태자였던 우종의 아들이다.

연호가 소통이라 소통제(昭統帝)라고도 부르며 민란 세력에게 위협을 느껴 도망간 후, 청의 군을 자국에 개입시킨 암군이라는 혹평이 주를 이루며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로 도망갔기 때문이 멸칭인 출제(出帝)로도 불린다.

생애

즉위 전

불우했던 유년기

여유겸은 현종의 태자인 여유의(우종)와 완씨 소생의 아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여유의는 정왕 정삼(鄭森)에게 미움을 받아 그를 모함하여 시해한다. 태자의 아들들인 여유겸과 여유유, 여유지는 황족임에도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민제는 13년동안 옥에서 자랐다.

삼형제가 옥살이를 보낸 배경은, 정삼의 아버지 정영은 태자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는데 정삼은 태자를 질투했고[1]정영이 죽자 즉위한 정삼은 태자가 정영의 첩과 사통했다고 모함해 폐서인시키고 옥에 가뒀다. 동시에 태자의 아들들도 옥에 가둬버렸고 현종에게 태자의 동생 여유근을 태자로 책봉케 했다.

당연히 태자의 지지파(신하)들은 정삼의 만행에 분노했고 진중림(陳仲林)과 완유민(阮有玟)을 비롯한 14인이 태자 구출 작전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정삼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태자를 비롯한 14인을 죽이고 현종을 협박해 태자의 생모이자 황후인 진씨(陳氏)의 시호를 폐지시켜 태자와 장손의 정통성을 없애버렸다.

정통성이 없어진 삼형제는 무려 13년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던 1782년 정삼의 장남이자 폐세자인 정종이 삼부군과 연합해 난을 일으켜 정간[2]을 죽이고 정종이 집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반란으로 집권한 삼부군은 민심 확보를 위해 옥으로 쳐들어가 삼형제를 석방시켰고 현종에게 건의해 기존의 태자였던 여유근을 폐위시킨 후 17세의 장손인 여유겸을 황사손으로 책봉했다.

황사손 시기의 정국

그를 석방시키고 민심을 확보한 삼부군은 시간이 지나자 백성들의 물품을 빼앗는걸 업으로 삼는 탐관오리로 전락하였다. 삼부군은 정종을 도와 정종이 집권하게끔 만든 지지파이기에 정종 자신도 삼부군을 어찌할수 없었다. 정종의 측근들인 완간(阮侃), 양광(楊匡), 완점(阮霑)은 삼부군의 만행을 더이상 눈뜨고 볼수 없어 그들을 축출하고자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당해 오히려 완점은 삼부군에게 처형당하고 정왕 정종이 삼부군에게 감금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3]

또한 북하(北河)[4]엔 삼부군의 난과 자연재해, 기아가 겹치자 민심이 흉흉해졌고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다. 마침내 1786년 떠이선 왕조완혜가 형의 명을 받고 순화를 공격하고 이어서 탕롱을 공격하자[5] 방비가 안되있던 정주군은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정왕 정종이 서산에게 압송당해 자살하자 정씨 정권은 붕괴하였다.

이어서 완혜는 완유정(阮有整)의 건의로 황제 현종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그를 접견한 뒤 정주왕이 황제를 보좌하는 자리에 앉았고 공주 여옥흔을 아내로 맞이하는등 정주왕의 대접을 받았다.

약 100년만의 신정(新政)

완혜의 지지로 즉위하다

조부 현종은 완혜와 대면한지 2일만에 세상을 떠났다.[6] 현종의 어린 공주이자 완혜의 왕후[7]인 여옥흔은 조카인 여유겸을 싫어했기에 즉위시키고 싶지 않았고 남편인 완혜에게 태손을 험담했다. 이에 대신들이 여옥흔을 비판하자 두려워진 여옥흔은 여유겸을 즉위하게 하였고 여유겸은 여유기로 개명한뒤 완혜의 도움을 받아 조부의 뒤를 이었다.

한편 완혜가 독단적으로 탕롱을 공격해 실권을 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덕은 동생의 권세가 커질것을 두려워해 군사를 이끌고 탕롱으로 갔다. 태덕은 여씨 황제를 폐위시킬 생각이였는지 정주의 부처를 점령했지만 민심 문제로 인해 민제의 제위를 인정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씨의 복벽

완유정의 독주

도망가는 황제

청조의 지원과 복위

다시 나라를 잃고 도망가다

망명 생활과 사망

평가

둘러보기

  1. 시기 말고도 정삼과 태자가 식사를 함께 할뻔 했는데, 정삼의 어머니가 군신과의 관계가 어긋난다고 정삼을 다그쳐 나가도록 차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정종의 동생
  3. 양광은 왕태비(정종의 모친)의 동생이라 왕태비의 부탁으로 목숨을 건졌고 완간은 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정종이 옥에 갇히자 소리소문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4. 황제가 있고 정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
  5. 탕롱 공격은 독단적인 행위였다.
  6. 대월사기전서속편엔 단순히 노령으로 인한(사망 당시 70세였다.)병사라고 하나 청사고의 월남전에는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었다고 한다.
  7. 이때는 태덕의 제후왕 신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