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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동일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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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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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씨 대월(쩐 왕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통천어극성무원효황제(統天御極聖武元孝皇帝). 휘는 진경(陳煚, Trần Cảnh/쩐까인)[*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름이 진일경(陳日煚, Trần Nhật Cảnh/쩐냣가인) 혹은 진광병(陳光昺, Trần Quang Bính/쩐꽝빈)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나,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진포(陳蒲, Trần Bồ/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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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로 추존된 [[쩐투어|진승]]의 아들로, 숙부인 태사 [[쩐투도|진수도]]의 지지로 황제에 오르고, 여러 정책을 펼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후 대륙을 평정하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품은 [[몽골 제국]]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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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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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안 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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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陳煚的先世是中國閩人,下又附註說「或曰桂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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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의 선조는 중국 [[민나라]][* [[오대십국시대]]에 존속했던 10국중 하나.] 출신이며, 계림인(桂林人) 이다. - 대월사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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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디 진경의 선조는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민나라]]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출신만 전해지지 자세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데, 중국의 야사에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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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는, 진경의 원래 이름은 사승경(謝昇卿)이며 복주(福州) 락읍(樂邑)에서 왔다가 현재의 [[광서]]인 옹주(邕州)를 거쳐 안남으로 들어가 안남의 한 정승에게 사위로 들어가 '''진(陳)'''씨로 성을 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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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하나는, [[천주]]의 [[진강]] 안해(安海)에서 바다를 건너 안남으로 이주했고 후에 [[리 왕조]] [[소제(리)|소황]]의 국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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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조(쩐)|목조]]의 안남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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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고조부 [[목조(쩐)|진경]][* 陳京. 한국식 발음은 같지만 한자와 베트남어 표기/읽기(쩐낀)는 다르다. 진경이 황제로 즉위하고 목조(穆祖)로 추존하였다.]은 중국에서 베트남의 묵향(墨鄕) 미록현(美祿縣)으로 이주해 대대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증조부 영조[* 진흡. 영조(寧祖).]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조부인 [[쩐리|원조]]와 관해 전해지는건 그의 대에 어업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세력을 형성한 원조는 노략질을 하기도 하였으며 묵향에서 세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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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진씨 가문이 조정과 가까워진건 [[리 왕조]]의 [[고종(리)|고종]]의 치세인 1208년 범유(范猷)가 난을 일으키자 당시 고종은 태자 [[혜종(리)|이호참]](혜종)과 도망가 원조(진리)의 집에서 잠시 몸을 숨겼다. 이때 태자 호참과 진리의 딸이 맺어졌으며 이 일을 계기로 황제의 사돈이 된 쩐리와 그 가문은 외척이 되어 조정과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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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진경의 숙부 진사경(陳嗣慶)은 혜종과 맺어진 여동생이 담태후[* 譚太后, 시호는 안전황후(安全皇后). 진씨 일족을 굉장히 싫어했고 그들의 음식에 독을 타는 등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후일 진경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씨 처형식때 같이 처형당한다.]에게 구박받는것에 불만을 품고 1213년 군사를 일으켜 담태후를 도망가게 만든 후 태위에 임명되었고 혜종이 무능해 정세에 관여하지 않자 대권은 태위 진사경에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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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의 아버지 [[쩐투어|태조]]는 1223년 진사경의 자리를 계승해 태위를 역임했고 종숙부[* 태조와는 사촌 관계이며 영조의 손자이자 홍의왕(弘義王)의 아들이다.] [[쩐투도|진수도]]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 내외 군사 전체를 통솔하였다. 진경은 이런 권신들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출생부터 든든했던 일명 [[금수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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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제의 [[국서]]가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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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은 1218년 7월 10일 아버지 진승과 여씨(黎氏) 소생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서에 따르면 진경은 제왕의 용모를 띄었으며 [[고제(전한)|한고조]]와 닮았다고 전해진다. 진경은 어릴땐 하급 관직을 지내다가 8살 때, 종숙부 진수도의 도움으로 입궁하여 [[여제]] 소황을 모셨는데 소황이 매우 좋아했고 곧 소황과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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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혼인 이야기의 다른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선 혼인을 시킨 명분도 정말 가관인데, 당시 베트남에는 여자가 남자 쪽에 빈랑 열매를 보내 그것을 남자가 받아들이면 혼인이 이뤄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소황이 자신과 친구가 된 진경과 같이 놀다가 우연히 빈랑의 열매가 담긴 수건을 던졌는데, 진수도는 그것을 빌미로 둘의 혼인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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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쨋든 일개 외척도 아닌 진경이 국서가 된건 진씨 일가의 찬탈을 위한 중요한 첫 [[바둑돌]]이 되는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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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쩐투도|숙부]]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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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쩐 왕조]](이하 진조)의 월사략(越史略)에 따르면, 이소황이 진경에게 양위한건 그녀의 아버지 혜종의 뜻이라고 전해진다. 상황 혜종은 태위 진승의 아들 진경이 어린 나이에도 풍모를 갖추고 있어 제세안민 할것이라 여겨 소황과 혼인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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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一陰而御羣陽,衆所不與,必致悔亡」,他見「太尉(陳承)仲子某(指陳煚)年雖沖幼,相貌非常,必能濟世安民,欲以為子而主神器,仍以昭王配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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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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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음(一陰)[* 건강이 좋지 않음을 말한다. 나라를 잘 못다스렸다는 뜻.]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더이상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 태위(진승)의 아들 경이 어리지만 용모가 아릅답고 제세안민에 기여할 것 같아 주신[* [[제단]]에 모신 [[신(종교)|신]] 가운데서 주체가 되는 신.]의 그릇으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소왕(이소황)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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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승은 듣고 망설여 혜종의 말을 떠볼까 주저했으나 진수도는 혜종의 말을 기회라 여기고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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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今以無嗣,欲擇賢而付之,此乃上王遠法堯舜之真讓,又何疑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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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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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사가 없어 현명한 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란 건데, 이는 [[요순]]이 행한 유서깊은 행위인데, 무슨 의심이 있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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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월사기전서엔 1225년 진경이 소황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진수도가 쿠데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소황은 자신이 여자라 역량이 부족하다는 등, 조칙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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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今朕反獨算,惟得陳煚,文質彬彬,誠賢人君子之體,威儀抑抑,有聖神文武之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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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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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짐은 사리에 어두우나, 문질빈빈(文質彬彬)[* 감정과 문식(글을 아름답게 함).]하고 성현인 군자(君子)의 몸은(진경을 말한다) 신과 같고 자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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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진경에게 양위하였다. 이렇게 리 왕조가 멸망했으며 진경이 즉위한 후, 진수도를 국상부(國尙父)에 임명했고 생존해 있던 아버지 진승을 태상황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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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후 폐위와 진류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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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폐위된 이여제 소황은 진경의 황후가 되어 소성황후(昭聖皇后)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1237년 소황의 언니 순천공주(順天公主)를 황후로 삼고 소황을 공주로 강등시키고 신하인 여보진(黎輔陳)에게 시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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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진경이 새로 맞이한 순천공주는 본래 진경의 형 진류(陳柳)의 아내였는데 진류는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자 난을 일으켰다. 진경은 그가 난을 일으키자 수도를 떠나 안자산(安子山)에 잠시 머물렀다. 이후 난이 진압되자 진수도가 진경을 호위하자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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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새한 내막은, 결국 힘에 부친 진류가 어부로 가장한 뒤 배를 타고 진경을 찾아 항복하자 형제는 서로 눈물을 흘렸고 진수도가 칼을 빼들어 진류를 죽이려 하자 진수도를 막고 진류와 화해한 다음 형에게 봉국을 주고 그를 안생왕(安生王)으로 봉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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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상에 올라 기반을 다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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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진경은 8살 아이에 불과했기에 그는 아버지 진승과 종숙부 진수도의 정치적 개입([[섭정]])이 잦았다. 대월사기전서에는 태종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모두 진수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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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적제도(帳籍制度)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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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은 리 왕조때의 장적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장적제도는 나라의 모든 문무관, 서리, 군사, 16세 이상의 남자, 노쇠한 자, 이주자 및 유랑자가 얼마나 되는지 현지의 관리들이 모두 장적([[호적]])에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적 기록에 따르면 관직은 자손이 계승할 수 있고, 부유하나 관작이 없는 자는 군 복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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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징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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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징세: 남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밭의 수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했다. 밭이1, 2면적 이면(畝) 매년 1관(1000[[냥]])씩 납부했고 밭이 3개에 4면적인 자는 3관, 토지가 없는 자는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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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지세: 개인의 밭의 곡물을 내는 걸로, 국고전(國庫田)과 척도전(拓刀田)으로 나누어 논의 등급에 따라 상중하의 등급을 매겨 징수했다. 또한 민간의 연못과 염전에도 세무를 부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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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에 생선, 새우, 채소, 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무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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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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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시험]] 및 교육기관 설립: 태학을 개설해 석차를 나누어 장원(章元), 방안(榜眼), 탐화(探花) 3등급으로 우열을 가렸고 세 개의 과목에 관한 시험이 있었다. 또한 1253년 국학원을 설립해 [[사서오경]]을 가르치게 하고 무당(武堂)을 설립해 무술을 연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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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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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조의 관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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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과는 삼공 - 삼소 - 태위 - 사마 - 사도 - 사공 - 좌우상국 - 수상 - 참지(參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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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과는 안무사 - 지부 - 통판 - 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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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관 분야에는 중앙 각 부에 상서-시랑-랑중-원외-어사-지방 안무사(安撫使) 등을 두었다. 이외에도 무관직인 중앙을 지키는 군사와 지방을 수비하는 군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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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진 제도: 진조의 관리는 10년을 채울때마다 1급씩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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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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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에 대해선, 1244년 형률을 완성했고 절도범일 경우 손, 발을 자르거나 [[코끼리]]를 이용해 [[압사]]시키는 형벌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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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진경의 치세엔 많은 장정들이 군에 입대했고 황족도 군대의 통솔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군 입대기 동안 황족인 [[쩐흥다오|진국준]]도 군에 입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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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목상의 양위, 태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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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은 1558년 3월 30일 태자 [[성종 (쩐)|진황]]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다만 정세엔 계속 관여했고 아들 성종을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양위는 진조의 역대 군주가 다 행했던 방식인데, 진중김은 진경이 통치 방법을 알려주고 태상황인 자신이 버젓이 살아있기에 형제들의 다툼을 방지하는 좋은 방법이라 평했다. 오사련 역시 이 양위 방식에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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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문|自夏禹傳子之後,父崩子繼,兄歿弟承,永為常法。陳氏家法,乃異於是,子既長,即使承正位,而父退居聖慈官,以上皇稱,同聽政,其實但傳大器,以定後事,備倉卒爾,事皆取決於上皇,嗣主無異於皇太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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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라|하조]]의 [[우 (하나라)|우]]가 계승한 이후,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물려받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물려받는 것이 상법(常法)이였다. 진씨는 비록 왕위를 계승하고 아버지가 물러났다 해도 상황이 같이 정치를 들었다. 그러나 모든 권한은 상황이 행사했고, 금상<ref>재위하고 있는 황제.</ref>은 황태자 신세와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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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외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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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치세 동안 바로 위의 중국은 [[몽골 제국]]의 황제 [[칭기즈 칸]]의 정복사업으로 운남의 [[대리국]], 대륙의 제국인 [[남송]]까지 무너트렸으며 거리가 비교적 멀던 대월까지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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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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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조는 남송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고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황제인 [[이종(송)|송이종]]이 진경을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정식 책봉했고 명목상의 관직과 식읍을 받았다. 또한 진경은 자신이 아들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남송에게 전하기도 했으며 몽골의 침입이 한창이자 송은 대월에게 충분히 방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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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이 아들 황(성종)에게 양위했을때도 바로 성종을 안남국왕으로 봉해줬고 명목상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남송과 진조의 관계는 우호적인 조공 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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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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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파인들은 [[리 왕조]]가 쇠락할 때부터 그 연안을 약탈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진경은 즉위하자 덕으로 그들을 가르치려 했으나 참파가 불복하고 이전에 뺏긴 영토를 수복하려 하자 진경은 우호적인 태도를 접고 1252년 참파왕 [[자야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의 왕비와 그 신하들을 붙잡고 회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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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 제국]]의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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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3년 몽골 제국이 운남의 대리국을 멸망시키자 이제 그 근처의 대월까지 정복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곧 1258년 몽골의 장수 올량합태(兀良合台)가 군사를 이끌고 대월을 침략했고 수도 탕롱은 손쉽게 몽골군에게 함락당했다. 진경은 배를 타고 태위 진일교(陳日皎)에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는데 일교는 그저 손가락에 물을 뭍히고 배에다 입송(入宋)이라는 글만 쓸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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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태사 [[진수도]]에게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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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臣首未至地,陛下無煩他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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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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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심할 것이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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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가 생긴 진경은 태자 황과 직접 전함에 타 몽골 수군과 싸웠고 결국 그들을 패퇴시켰다. 몽골군은 패퇴할 때도 대월의 백성들에게 공격받았기에 아예 대월땅 자체를 벗어날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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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군을 격퇴한 그는 스스로 소국(小國)을 자칭하여 사신을 파견해 제후로써의 겸손함을 나타냈다. 이름을 광병(光昺)으로 바꾸고 그 이름으로 공물을 보내자 몽골 제국도 그를 인정해 진경을 안남왕에 책봉했고 3년마다 한 번씩 공물을 보내게 하는 조공관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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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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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은 1277년 5월 5일에 만수궁(萬壽宮)에서 60세로 사망했다. 묘호는 태종 효황제로 정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그가 확립한 몽골과의 조공관계는 당분간 지켜졌지만 이후 몽골이 두 번째 침략하자 화친은 깨지고 대월은 몽골과의 대전쟁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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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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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先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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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부: [[목조(쩐)|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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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부: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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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부: [[쩐리|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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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황: [[쩐투어|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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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후: 국성황태후(國聖皇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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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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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생왕(진류) - [[쩐흥다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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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천왕 진일교 - 위의 입송 일화로 유명함. 진경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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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형제와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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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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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제(리)|이소황]](소성) - 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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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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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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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陳鄭) -태자. 조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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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국강(정국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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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종(쩐)|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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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익직(陳益稷) - 원의 배트남 원정시기 황실을 배반하고 원나라에 붙어 대월의 왕위를 노린 [[매국노]]이며 진익직의 아들이 [[진우량]]이란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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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아들과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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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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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zh.wikipedia.org/wiki/%E9%99%B3%E7%85%9A 陳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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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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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조 (쩐)]]
| |
| * [[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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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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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쩐투도]]
| |
| * [[소황 (리)|이소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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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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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종 (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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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빌라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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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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