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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링하니까 sabremantis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전에 몇 명 있었는데<br>
구글링하니까 sabremantis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전에 몇 명 있었는데<br>
제 닉네임의 유래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짓다가 우연히 걸린 거에요
제 닉네임의 유래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짓다가 우연히 걸린 거에요
= 세상은 비관적인 아포칼립스야 =
*Seventh Wonder - Exhale
= 주시 문서 =
*질소과자
*언론
*:[[조중동]]
*:[[한겨레]]
*:[[경향신문]]
*이념
*:[[내부고발]]
*:[[포퓰리즘]]
*단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주노총]])
*멸망
*:[[지구멸망]]
=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궁예식 관심법을 쓰는 건 위험하고 허무하다 (부제: 뇌 기능의 이상 문제) =
사회성의 기준은 객관적으로 보면 상대적이면서도,<br>
주관적으로 보면 절대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br>
사회인은 절대적인 하나의 사회성을 찍어 맞춰야 한다.<br>
사회성이라는 상대적 개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인간의 고용, 해고, 자본은 획일성을 띤다.<br>
사회성에서 어긋난 존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돈을 덜 버는 방향을 향한다.
사회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br>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라고.<br>
맞는 말이다.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br>
인터넷에선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일이 많다.<br>
의외로 인터넷에서 그렇게 진심으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br>
네티즌들은 사람을 대할 줄 몰라서 진짜로 저렇게 확신한다.<br>
세상에는 생각보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투른 사람이 많다.<br>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비주류라 주목받으려면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해야 한다.<br>
노이즈 마케팅을 좋아하는 사회인이 누가 있겠는가.<br>
하지만 사회의 비주류가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br>
힘도 자본도 용인술도 리더십도 부족한데 공론화 따윌 어떻게 하겠냐는 냉정하고 정확한 자아비판과 자괴감으로 판단한 것이라<br>
억지로 공론화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br>
비주류가 공론화한 사회 문제는 사회생활의 이해관계에 의해 쉽게 묻힌다.<br>
법 조항의 해석의 모호함이라는 법의 영원하며 선천적인 문제 때문에<br>
거대한 판결을 내리기 부담스러워하는 검사, 변호사, 판사들이 많다.<br>
문제는 일반적인 공론화가 이해관계와 법의 선천적 문제 때문에 묻히는데<br>
극단적으로 본의 아니게 일어난 공론화조차 법의 선천적 문제 때문에 묻힌다.<br>
법조계에서 욕을 먹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각이 있다면 언젠가 인터넷에서 얼굴도 안 봤는데<br>
왜 사람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느냐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br>
하지만 늦게 벗어나면 그 폐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오고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된다.
문제는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라는 질문에<br>
자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br>
판단력이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부족한 상태기 때문에<br>
정말 심각하면 의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만<br>
여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찰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br>
사람들이 고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br>
단지 현대의학으로 뇌 손상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어도 모든 사례에서 완치의 영역까지 도달하진 못한 상태다.<br>
뇌가 선천적으로 손상되어 정상인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장애인<br>
혹은 뇌 기능이 선천적으로 나쁜 상태라 정상인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이상자.<br>
정신적으로 약한 약자를 돌보기엔 아직도 인류의 기술과 체계가 부족하다.<br>
정신적 약자를 돌보는 걸 사명감이 강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맡기는 상태다.<br>
이 상태가 고착되지 않게 하려고 과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것이다.
우린 인터넷에서 무의미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br>
악플러와 다툼을 뇌 기능의 이상이라는 관점에서 처음부터 바라봤어야 했다.<br>
과학자들에게 뇌 기능의 이상이 오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br>
이걸 뒤늦게 생각한 건 인류에게 있어 가혹한 실수였다.<br>
언제 뇌 기능의 이상이 인간관계의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할 날이 올까.
==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대인기피증에 고통받는 비주류 노동자: 일부 룸펜, 프리터, 히키코모리 등 ==
룸펜과 프리터와 히키코모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의 목차가 아니다. (X)<br>
룸펜과 프리터와 히키코모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의 목차다. (O)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br>
사회 속 배신이 무섭기 때문이다.<br>
비뚤어졌다는 자각이 있는 일부 비주류 노동자는<br>
가해자와 방관자가 섞인 사회 속 배신에서<br>
회피하거나 공론화를 택한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다르게 말하면<br>
'내가 수많은 사람과 원만히 소통할 수 없는데 소통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기혐오, 죄책감과 같다.<br>
회피하면 세속의 풍파에서 벗어날 수 있다.<br>
하지만 한 번 공론화를 택하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br>
특히 노동환경이나 법적으로 불려갈 일이 발생할 때<br>
히키코모리 기질을 일으키는 트라우마가 사람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br>
원래부터 괴로운 일을 겪으려고 열심히 달려온 것이 아닌데<br>
결과가 법적 대응이라는 괴로운 일이라면 대인기피증이 오기 쉽다.
대인기피증이라도 사회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br>
하지만 사회에서 원만히 적응하지 못한 대인기피증은 오프라인의 공론화를 거부한다.<br>
오프라인 쪽은 공론화의 정당성 문제라기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잘 이끌 수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토론이나 논쟁을 이끌게 된다.<br>
인터넷 방구석 여포 혹은 방구석 폐인 문제와 연관이 있다.<br>
인터넷 쪽에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가난한 환경과 부적응으로 인한 한을 토로하지만<br>
정치적 분쟁이 일어 법적대응이 일어나 갑자기 수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생기면<br>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와 비슷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고역이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br>
그조차도 안타깝게 못하는 중증의 대인기피증을 앓는 일부 약자는 예술계를 고민한다.<br>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인문계(특히 순수문학이나 에세이)나 서브컬처, 일본 오타쿠의 영향을 받은 곳(남성향 아닌 순정만화풍)밖에 없었다.<br>
소비자가 되는 건 꺼려지지만 좋은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초심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br>
그리고 막상 그곳으로 가면 대인기피증을 위한 낙원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br>
진보와 좌파의 정치인들과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br>
아직 정치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치적 영향에 입문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문화계의 소비층이 대인기피증에 고통받는 일부 약자와<br>
사회인으로서 잠깐 쉬다 갈 곳으로 여기는 일부 상식적인 네티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br>
생산층으로서의 낙원이 없다는 사실에도 좌절했는데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는 낙원도 없다.
결국 일부 대인기피증은 인권 운동과 친환경 사상의 힘을 빌렸겠지만<br>
바깥에서의 평가와 상관없이 내적으로만 살펴보면 대인기피증을 극복하려고 절박하게 달려왔지만<br>
이전부터 공론화가 서투른 나머지 오해를 사기 쉬웠고<br>
배신감 때문에 분노와 증오에 매몰되기 쉬울 만큼 정신건강이 악화되어<br>
더욱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각보다 옛날은 잘 모르겠지만 대인기피증이 왕정 체제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사실인 것 같고<br>
적어도 현대에서 대인기피증을 심하게 앓는 사람을 위한 길게 쉬어갈 낙원을 만드는 진보좌파와 문화계에서의 운동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들이 위선적이라 비판받아도 대인기피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약자를 건강한 사회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만은 진심이었다. 취지만은 진심이었지만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가. 일이라는 것은 시작할 땐 큰 포부를 품다 막상 진행하고 끝날 즈음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br>
대인기피증. 대인기피증을 심하게 앓는 사람을 위한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br>
진보좌파와 문화계와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은 그런 낙원을 세우는 데에 성공할 것인가.<br>
공론화가 서투른 사람들에게 공론화의 부담을 덜어줄 낙원은 언제 성공할 것인가.
= 배신하고 싶지 않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지만 배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약자란 =
약자는 강자를 부러워한다.<br>
'어떻게 믿었던 혹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마저 배신당할 수 있는 상황을 잘 피했지?'라고.<br>
강자는 특별히 비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br>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함부로 판단하기 싫다고 일관적으로 대했을 뿐이다.<br>
말로 들으면 쉬울 것 같지만 사회적응이 느린 자들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어렵다.<br>
서로의 처지를 겪지 않으면 정말로 모르는 일이다. 심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립한다.
약자는 배신하고 싶지 않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편이다.<br>
광신도나 빠나 호구는 비판 받을 만하지만 그들의 행동원리 중 하나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br>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만<br>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기꾼의 목표물이 되기 쉽다.<br>
사회에선 진짜 사기꾼과 방관자가 모호하기 때문에 약자 입장에서 방관자마저 사기꾼이라 의심하기 쉽다.<br>
억울함이 심해지면 공론화를 한다. 그리고 증거가 부족하면 무고죄가 되어 악의적인 관심법이라는 역풍을 맞는다.<br>
배신이 싫어서 사랑을 하고 공론화를 하고<br>
주변이 극단적이라 말리다 하나둘씩 떠나가고<br>
고립되고 절망하고 속죄하다<br>
속세에서 다소 멀어질 수 있는 무난한 삶을 바라거나<br>
아직 속세 속 배신의 굴레에서 고통받는다.
약자에게 아무도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br>
세상을 원망하기만 해야 할까? 원망하면서 파괴하는 삶은 비참하다.<br>
속세에서 멀어지되 관심법이 없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다.<br>
그렇게 되고 싶겠지만 문제는 돈. 돈이 없으면 자급자족이다.<br>
속세에서 멀어지고 싶은 약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br>
법적대응을 마주한다고 해도 약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br>
법적대응의 당사자가 될 즈음이면,<br>
돈을 받아도 물질적인 가치가 있을 뿐 마음에 한 번 난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약자의 마음에 메워지지 않는 구멍.<br>
의로웠지만 의롭다고 평가받지 못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 증명하기 위해<br>
약자는 세속화가 나쁘다고 비판한다.<br>
하지만 세속화에 적응한 강자 입장에선 공감하기 어렵다.<br>
강자는 세속화가 문제가 아니라 관심법이 문제라고 한다.
배신은 관심법에서 오는구나.
= 속세에서 벗어나서, 혹은 죄를 지어 속세에서 추방당해 자유가 되었다 =
자유가 되었다.<br>
속세에서 초심을 잃고 남을 내 편견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자유가 되었다.<br>
하지만 그것은 심적인 자유고 금전적인 자유가 아니었다.<br>
죄인이 죄를 짓고 나서 자유가 되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비판한다.<br>
하지만 반 정도는 진실이다.<br>
금전적으로는 양심적으로도 비참해도<br>
심적으로는 나 자신의 오지랖도 타인의 오지랖도 멈췄기 때문이다.
속세로부터의 자유는 늦게 오는 것이 현명해보인다.<br>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속세에서 오기를 부렸다간 후회하겠지.<br>
그러한 오기는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데 오지랖을 부리면 참작되지 못하지만,<br>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데 오지랖을 부려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참작할 수 있다.<br>
외부로부터의 싸늘한 시선은 감수해야겠지만.
= 수사관, 법조계, 교도관의 무게와 PTSD =
수사관, 법조계, 교도관을 사람들이 욕하는 일이 많다.<br>
정말 욕먹을 만해서 욕먹을 일일지도 모른다.<br>
하지만 혐의가 모호해보일 때, 무죄, 무혐의, 유죄, 기소유예로 확정짓는다는 것.<br>
한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법조계에서조차 괴로워하는 것이다.<br>
수사관과 교도관의 PTSD는 재조명될락 말락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조계의 PTSD, 트라우마에 대해 조명되는 일은 없다.<br>
법조계인들에게 사회의 정점에 올랐으니 트라우마야 아무렇지 않게 극복할 것이란 분위기가 있는 것일까.<br>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조차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는데.
== 법의 모호함은 사실관계의 명확성을 훼손한다 ==
법은 모호하다.<br>
흔히 법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다고 인식되지만 막상 당사자에겐 모호하다.<br>
조항은 명확해도 인간의 해석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낸다.<br>
법조계에선 고뇌할 것이다.<br>
법적 분쟁을 겪은 당사자들도 고뇌할 것이다.<br>
자신들이 과연 상대방의 선악을 재단해서 확정지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br>
법이 인간의 이해관계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주관적인 판단에서<br>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고뇌할 것이다.
형사조정제도와 법원 출두(약식기소가 아니라면)도 마찬가지다.<br>
혐의가 명확해 보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br>
하지만 혐의가 불명확하다면, 자신이 믿는 것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br>
의뢰인이 바라는 대로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법이라면 공명정대한 심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br>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br>
법의 단점은 상대방의 인격을 과거와 현재로 제한하는 것이다.<br>
네티즌들은 엄벌주의를 외치지만 그 엄벌이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br>
미래에 자신이, 사람이 바뀔 가능성이 법적으로 어느 정도 차단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br>
중범죄라면 몰라도 경범죄에까지 엄벌주의를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
법적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br>
하지만 법의 모호함을 노려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데도<br>
사실이 이렇다고 단정짓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br>
== 사람에게 사람을 법으로, 혹은 사적제재로 심판할 권리와 기준이 있는가. 적어도 법은 고민하지만 사적제재는 안 한다. ==
물리적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br>
스파이의 경우 심판할 권리가 명백하다.
하지만 정신적 상해는, 증명하기 어렵다.<br>
인터넷에 뉴스, 아고라, 퍼뜨려주세요, 저격, 국민청원, 공론화, 렉카, 내부고발이라는 말이 무수히 묻어도<br>
거기서 소개된 정신적 상해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이젠 모르겠다.<br>
나에게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기준 자체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br>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나는 예수보다 못한 인간이다.<br>
예수는 사람에게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br>
그 말 뜻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br>
수천 년이 지나 나는 예수의 말을 진솔하게 만난 것이다.
나는 소크라테스보다 못한 인간이다.<br>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안다'라고 했다.<br>
그 말대로다.
수많은 사람이 인터넷에서 사람을 심판할 권리를 원하지만<br>
그 기준은 막상 법정으로 들어가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br>
법 조항의 해석이 모호해서<br>
심판해야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심판할 수도 있다.
그나마 법에는 인간의 고뇌가 담겨 있다.<br>
하지만 사적제재는, 고뇌가 없다.<br>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사적제재는 행해진다.<br>
법에 대해 알수록 데스노트의 라이토는 괴물이 되었다고 느껴진다.<br>
상대의 사상을 사실관계 검증 없이 부정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공격적 아나키즘이 남발된다.<br>
방어적인 아나키즘이나 비폭력주의를 위한 동력은 본래 순수한 의도대로라면 바람직하지만 인간에겐 어중간하다.<br>
그렇기에 나는 특정 사상이 옳은지 그른지 진실과 거짓을 전할 수 없다.<br>
다른 사람도 전할 수 없다.<br>
인간의 비판이 계속될수록 정의도 악도 아닌 거짓일지도 모르는 공론화만 가득할 뿐이다.<br>
= 기록된 역사는 사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언젠가 소실될 역사는 진실인가. 약자가 믿는 것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빠도 까도 무의미하다. =
68운동 이전에도 문제가 되었고 68운동 이후에도 문제가 되는 큰 문제다.<br>
법의 모호함은 인간의 주관적인 기록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증인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가.<br>
사람들은 회피한다. 불리할 땐 인정하지 않아 법의 모호성을 강화시키며.<br>
유리할 때 인정하지만 그것이 거짓인지 신경쓰지 않아 역시 법의 모호성을 강화시킨다.<br>
약자든 강자든 절박하기 때문에 편을 모은다.<br>
하지만 편을 모아서 증인을 많이 만들고 사실이라고만 말하면 사실인 것인가.<br>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사람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br>
사람은 자기가 믿는 사실이 거짓일 때,<br>
혹은 자기가 안 믿는 거짓이 사실일 때,<br>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 문제로 양쪽의 입장이 확정되지 않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br>
혹은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에,<br>
정신을 차린다.<br>
호의적으로 여긴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호의적이었다고,<br>
부정적으로 여긴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부정적이었다고,<br>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br>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사실이라 확정짓지 말고<br>,
거짓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거짓이라 확정짓지 말자고 여기게 된다.<br>
직접 미래의 끝까지 보지 않고 과거와 현재만 생각해선 모르기 때문이다.<br>
그리고 그 생각조차 증인이 많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지는 명확해지기 어렵다.
생각보다 사람은 편이 많으면 증인이 많으니 무조건 사실이라는 함정에 빠진다.<br>
물론 정말로 증인이 많을 정도로 억울한 경우도 있다.<br>
하지만 억울한 경우도 있으면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기록한 사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인식하려면<br>
어떻게 기록 문화를 만들어야 할까.<br>
법조계와 정치권과 사회학과 인문학도 못하는 일인데<br>
네티즌도 못하고 일반인도 못하는 일인데<br>
이건 절망이다. 꼭 알아야 하는 절망이자 사실이다.
= 능숙하게 일하지 못하는 자를 해고하는 능력주의, 온건하게 사회화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본능 =
사회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분기점이다.<br>
능숙하게 일하지 못하는 자(주로 약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능력주의.<br>
온건하게 사회화해야 한다는 계몽주의.
진솔하게 말하건대<br>
진보좌파와 페미PC는 약자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면 될 수가 없다.<br>
죽어도 약자를 못 버릴 거고 온건하게 사회화시키기보다 능력이 없다고 징계를 내리는 것이 더 나쁘다고 판단한다.<br>
징계를 내리는 순간 자신이 남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br>
능력주의적 관점에선 이해할 수 없지만 인권운동은 그렇게 컸다.
어느 쪽이 옳은 걸까.<br>
철저한 능력주의로 관심법 같은 감성을 배척하는 사회적응을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br>
관심법이라는 조롱을 들어도 약자를 버리느니 차라리 내가 내부고발자급으로 욕을 먹고 나 혼자 잊혀지는 사람?<br>
예전의 나는 어중간했다.<br>
약자한테는 사회인의 철저한 능력주의에 대해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고<br>
강자한테는 약자의 존중받지 못하는 비참함에 대해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어중간하다.<br>
약자가 약자를 구하기 위해 이론이 아닌 구원의 본능으로 뛰어갔더니 어느새 진실과 거짓을 모르게 되었고<br>
강자가 일에 치여 약자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br>
IMF부터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되어 미국 서브모기지 대공황부터 가속화되었는데<br>
인터넷은 약자와 강자의 진솔한 토론이라기보다 능력주의의 본능과 구원의 본능으로 나뉘어<br>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간혹 약자와 강자가 하는 공통적인 증언은<br>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믿는 진영의 좋은 면만을 보고 있었다'라는 거였다.<br>
세계 각지의 이름난 진영들은 이런 아픔을 수없이 겪어왔던 것일까.<br>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반인한테 '너는 남의 얼굴도 모르는데 멋대로 이렇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라는 비판을 듣기 전까지<br>
정치적으로 나름 포부를 품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br>
누군들 그런 조언을 안 하고 싶었겠나.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br>
단지 인터넷에서 그런 조언을 하겠다는 발상을 이름난 사람들도 네티즌들도 못했을 뿐이다.<br>
인터넷에서 중요한 조언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상한 것이긴 하지만<br>
악성 이용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 포부를 품은 이용자도 있는데<br>
자신이 믿는 거창한 것이 아닌 소박한 일반인에게 이러한 조언을 듣는 경우가 오프라인에 많다.<br>
그때쯤이면 법적 문제가 생겨 일반인한테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이 일반인과 대화를 하게 되고<br>
일반인 입장에선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절대 관심법이 아니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다.
확실한 건 나는 자본주의자도 인권운동가도 될 수 없었다.<br>
사회인의 능력을 동경하면서 되고 싶으면서, 약자를 구하고 싶다?<br>
양쪽 진영을 다 이해하려 하다가 나는 양쪽 진영의 치부가 보이면 용서하지 못했다.<br>
양쪽 진영의 좋은 면만을 보고 나쁜 면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br>
정작 그렇게 말하는 나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br>
남을 궁예식 관심법으로 보기만 했지.
적어도 약자도 강자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노동하고 싶어한다.<br>
세상에 노동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br>
고통 받으면서 노동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br>
현대의 노동은 고통을 견디는 강자만이 살아남는다.<br>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 약자, 언어와 소통의 걸음마, 소통의 창구의 개방과 폐쇄 =
약자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조차 걸음마를 떼야 한다.<br>
옛날에도 지금에도 능력주의로 인해 약자가 후천적으로 악영향을 받아도 선천적인 책임이 있다고 했고,<br>
약자에 대한 구원의지로 인해 악영향을 일으키거나 방관한 사람이 있다면 책임이 있다고 했다.
현실의 능력주의는 질문을 닫는다.<br>
질문에 개방적인 서양에서도 능력주의의 질문을 닫는 특성 때문에 소외자가 많이 나왔다.<br>
인터넷 위키가 토론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현실의 능력주의에 시달린 반작용이기도 하다.<br>
일에 집중해라. 하나에 집중해라. 스펙과 눈치에만 집중해라. 관심법은 쓰지 말라.<br>
관심법을 쓰면 일에 불이익을 받는다.<br>
실수를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머릿속이 하얘지지 않고<br>
실수하지 않고 일처리를 확실하게 해야 신용을 잃지 않는다.
전부 인싸와 아싸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계기가 없으면 의외로 모르는 일이다.<br>
인싸는 말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선전활동을 해도<br>
직접 온건하게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고 먼저 평가를 내리는 건<br>
그 사람에게 무례한 일이라고, 그것이 과열된 인터넷이 아닌 현실 속 진실이라고 한다.
걸음마를 떼야 하는 히키코모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는 괴롭다.<br>
괴롭지만 히키코모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은 없다.<br>
히키코모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br>
이상적으로는 약자가 존중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br>
현실에서는 뒤쳐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절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아내야 한다.<br>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증오하기 쉽다.<br>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범죄를 받아들인 비정상인을 제외한 정상인의 참회욕구와 성장배경을 거부하게 된다.<br>
설령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못난 자신이 후견인에게 부흥해야 한다고 몰아붙인다.<br>
애정을 나누고 싶은 욕구는 충만한데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멈추는 데에 서툴다.<br>
애정이 분노와 증오로 바뀔 때 어떻게 멈출지 모르는 사람은 한 번 말해놓고 자괴감을 느낀다.<br>
한 번 말실수 하면, 잘못하면 바깥에서 능력주의를 믿는 인싸들은 믿어주지 않을 거야.<br>
그런 심리가 기원전부터 자리잡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br>
인터넷이 생기면서 인싸와 아싸가 소통할 창구가 단절되고 둘로 나뉘어져서? 이원화돼서?<br>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는 혼자 절망하고 따라잡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겨우 사회를 따라가는 처지.<br>
인터넷 커뮤니티의 도움은 못 받지만 지식을 다루는 칼럼과 네이버 지식백과나 위키를 통해 겨우 사회를 따라가는 처지.<br>
이마저도 실제 현실과 괴리감이 있어 인권운동계 중 시민단체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br>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거기에 보답할 능력을 단기간에 기를 수 있을지 절망하는 처지.<br>
못 기르면 인권운동에서마저도 버림 받을 것이라는 공포심.<br>
도망칠 대로 도망치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스스로의 빈약한 힘으로만 증명해야 하는 처지.<br>
사회에서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는 약자 입장에서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를 느끼게 한다.
== 왕정부터의 약자만을 위한 소통 창구 ==
현실적으로 전세계에서 약자만을 위한 소통 창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br>
왕정 시대까지는 왕과 기사가 농민을 가혹하게 대하면 식량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br>
어지간한 막장 암군이 아닌 이상 소통 창구가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뭔가 잘못됐다.<br>
농민과 육체노동자의 가치가 과소평가되고 기업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br>
이를 뒤집어 엎을려고 공산주의가 생겼지만 공산주의는 독재정치로 망했다.<br>
농민과 육체노동자를 대변한 대표적 사상이 독재를 대변했다는 것은 진보좌파에게 치명적이다.<br>
진보좌파가 평판을 어떻게든 되돌리려면 러시아와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br>
아무튼 프랑스 혁명은 농민이 분노해서 시작한 일인데<br>
정작 농민이 소작농이 되고 땅 주인(지주)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br>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가지 태동이 필연적이었다 해도 이것만은 납득을 못하겠다.<br>
농민을 위한 길이 왜 둘 다 실패한 건지 납득을 못하겠다.<br>
냉정하게 생각하면 왕과 귀족이 망했으니 대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 지주들이 생긴 것이다.<br>
그런데 지주들은 농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무감이 왕정 때보다 부족하니까 막말로 농민을 막 다뤘다.<br>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차라리 왕정 때가 나았다고 복고 운동을 벌이고 싶어도<br>
프랑스 혁명의 수혜를 업은 지주와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은 근현대인은 반대한다.<br>
지주의 경우 욕을 박아도 할 말이 없는 적폐들이 현대까지 가격을 부풀리는 중간유통업자나 건물주까지 되기를 바라고,<br>
근현대인은 왕정 때로 돌아가면 개방적으로 사는 사람이 통제당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납득이 간다.
시대는 발전할수록 인간이 육체노동부터 피와 땀을 흘리며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는 세상으로 변질되고 있다.<br>
과학의 발전은 고무할 만한 일이지만 육체노동을 과소평가하는 세태가 계속될수록<br>
인간은 원시시대부터의 본받을 만한 가치마저 구시대적이라고 경멸하는 이상한 동물이 되어버릴 것이다.<br>
그렇게 되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칭은 사라지는 거지.
근현대에선 자본주의, 공산주의, 흑인 인권, 여성운동으로 한때 약자를 위하거나 현재까지 약자를 위한 소통 창구가 나뉘었다.<br>
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해 혁명적이다 보수적으로 변했기 때문에<br>
적응이 잘 된 사회인(자본) 혹은 폭력독재(공산)를 서민의 대표로 대변하면서 질문의 여지를 스스로 봉쇄했다.<br>
결국 히키코모리계 약자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사회를 향한 질문의 여지를 봉쇄하지 않은 것은<br>
흑인 인권과 여성운동, 성 소수자 인권, 장애인 인권, 동물권, 채식주의, 생태주의, 환경단체, 정치적 올바름뿐인데<br>
약자를 위한다는 마음은 농민 인권을 연상시키는데 농민 인권을 대변하는 세력 중<br>
원래는 독재 숙청과 학살로 붕괴되었어야 마땅할 공산주의의 잔재가 러시아에 푸틴 파벌로 남아 있다는 것이<br>
진보좌파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br>
약자의 인권을 위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보수에게서 살 수 있는 실정이다.<br>
== 공산주의의 문제로 인한 아킬레스건, 공산주의의 낙인으로 인한 모든 정치계의 강경파화와 고통, 질려버린 국민의 특히 진보좌파 관련 주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법조계의 냉전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
하지만 공산주의의 삽질이 컸으니 진보좌파 측에선 타개책을 세우기 어려운 실정이다.<br>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은 농민을 위한 문제 있는 기존 사상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상을 세워야 하는 것인데<br>
새로운 사상이 제2의 공산주의 독재가 되면 어떻게 될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br>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독재정권은 공장노동자를 지들 멋대로 대변해놓고 입맛에 안 맞으면 숙청했다.<br>
심지어 서양의 대안우파 중 일부는 푸틴을 숭배하기까지 하여 시진핑은 안 되고 푸틴은 되는 이중잣대를 왜 보이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br>
진보좌파 측에선 러시아를 막아야만 공산주의의 변질을 막을 정도로 어려운 실정이라<br>
우선적으로 쉬운 목표이자 현재까지 남은 약자를 위한 소통 창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br>
결과적으로 이는 육체노동자의 원천이자 중심인 농민을 위한 소통 창구가 되지 못하여<br>
정신노동만을 추구하는 원인이 된다. 공장노동자를 위한 소통 창구는 될 수 있었지만<br>
결국 법이라는 것이 체계가 잘 잡혀 있어도 문구의 모호성 때문에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라<br>
법을 모르는 공장노동자가 변호사가 있는 기업에 비해 상당히 불리하다.<br>
아마 진보좌파 측에서 보수우파 측에 대응하려고 변호사를 쓸 때<br>
공장노동자의 고통을 떠올리며 트라우마에 빠진 적이 많았을 것이다.<br>
진보좌파가 보수우파에 저항하려고 변호사를 쓰는 것은 필연적이지만,<br>
검사와 변호사 입장에서도 공평한 심판을 원하지만 이념 분쟁에 휘말렸다가 이력에 흠집이 나서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받는 것이 싫고,<br>
한 번 변호사를 쓰면 대기업과 재벌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로 악명 높은 소련, 러시아, 중국이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 인권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br>
다른 인권운동이 공산주의의 낙인에 괴로워하고 있다.<br>
소련 붕괴를 계기로 국가간 이념, 이데올로기 분쟁은 끝났다.<br>
하지만 상흔은 개개인에게 남았다.<br>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br>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br>
의외로 이러한 점을 조명하는 사람은 없다.<br>
한 번 조명하게 되면 이념 분쟁이 재발할까봐 보수우파 측에서도 진보좌파 측에서도 부담이 크다.<br>
국가간의 이념 분쟁을 재발시키면 피로감이 있는데<br>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온건파나 중도파가 목소리를 내다가 마녀사냥으로 낙인 찍힐 수 있는 상황이다.<br>
좋든 싫든 강경파가 되거나 강경파를 연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br>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한 열정으로만 강경파가 되다 실상을 깨달으면 그 배신감은 털어놓을 수 없다.<br>
주요 정치 진영이 전부 다 공산주의의 낙인에 의해 국력을 이념 분쟁에 소모하기만 하여 무력하다는 약점을 한 번 얘기하면<br>
지지도가 초토화되기 때문이다. 죽어도 믿겠다면 일반인들에게 경멸을 받아 후세대에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라고 여겨질 가능성을 높이는 거고.<br>
그러다 보니 정치판을 국민들이 싫어하게 되었다.<br>
자세히 고찰한다고 해도 결국 공산주의의 삽질 때문에<br>
보수우파와 진보좌파가 평생 이념 분쟁의 낙인과 굴레에 시달리게 생겼으니<br>
건설적인 토론이 나올 리가 없다.<br>
이는 보수우파식 반공이 본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기지만,<br>
역시 이를 조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br>
정치인들을 정상적인 국민들이 싫어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br>
결국 정치인들이 얘기만 나오면 반공이냐 아니냐로 싸울 게 뻔하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br>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농민을 위한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출발했는데<br>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 운동과 공장노동자 인권 운동을 대숙청에 악용하는 바람에<br>
관련 주제를 온건하게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태가 벌어지다니.<br>
이게 평생 갈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br>
화해가 이루어지진 않겠지.
== 국민은 정치계의 사정을 모른다. 정치에 관심을 오래 가져야 겨우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지면 취업이 피곤해지는 태생적 문제가 있다. 제발 정치계에서 국민을 오만하게 보지 말라. 국민은 이념 분쟁에 무력하다. 반공 분쟁에 장기적인 피로감과 공포심을 가져 끝나길 바라고 있다. 후세대에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 받을 만한 일이다.==
정치계에서는 국민을 오만하게 보는 버릇이 있다.<br>
국민이 공산주의의 낙인에 대해 몰라서 냉전발 이념 분쟁이 재발하지 않아야 안 피곤하기도 하고<br>
모른다는 것에 왜 알아주지 않는 것이 답답한 마음이 있어서기도 하다.<br>
하지만 정치계의 표현 방식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br>
내부 사정이 있어가지고 사적 입장과 공적 입장이 다르다는 건 알 수 있다.<br>
그런데 국민이 정치에 깊게 관심을 가져야 내부사정을 알 수 있다는 건 문제가 많지 않나?<br>
깊게 관심을 가지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위험해서 정치적 무관심이 생기고,<br>
그렇다고 관심을 안 가지면 국민 혹은 국민 중 일부분이 미개해서라고 말만 돌리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br>
내부사정을 알면 국민들이 등을 돌릴까봐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적어도 할 수 있는데까지 자기 편을 지키자는 건<br>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언제까지 누군가를 공산주의자라고 몰거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외치는 싸움이 계속돼야 하는가?<br>
1987년 한국이 민주화되었어도 약 35년간 싸움이 지속되었다. 한 세기의 3분의 1이다.<br>
형태만 성별갈등으로 달라졌을 뿐이지 결국 속내는 오프라인 정치권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부터 부추겨온 반공 분쟁이다.<br>
공산주의자가 독재화돼서 타도해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br>
관련 분쟁을 직접 말하기 그렇다고 국민들한테 성별갈등으로까지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인가?<br>
언제까지 이건 공적 입장이지 사적 입장이 아니라고 국민들에게 납득하지 못할 입장만 전하는 것인가?
이념 분쟁에 너무 지쳤다.<br>
정치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반공이냐 아니냐만을 논쟁하기 바쁘고,<br>
다른 논쟁을 다른 주제의 탈을 쓴 반공이냐 아니냐의 분쟁의 연장선상으로 만들 뿐이라 무능의 상징이 되었다.<br>
네티즌들 중 이에 대해 조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br>
현실에서 이에 대해 조명하려면 양쪽에서 반대하겠지.<br>
이걸 버틸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아무도 없다.<br>
그러니 아무도 안 나서지. 약한 중립은 중립적인 입장도 못 내고 이념분쟁의 폐해와 후유증에 매몰된 사람들에 의해 져버린다.
== 정치계와 정치병의 입버릇: 본의가 아니었다 ==
공산주의의 낙인이 모든 정치계를 강경파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괴롭게 했다.<br>
정치계는 입버릇으로 '본의가 아니었다'를 달고 살고 있다.<br>
이유는 본의가 아니라는 진심이 담긴 것이기도 하고,<br>
본의가 맞다고 단정짓기도 그렇고,<br>
자기 혼자 본의가 맞다고 말해버리면 다른 고통받는 정치계에게 실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의가 아니었다'라는 정치계의 말버릇은 국민에 대한 기만으로 비칠 수 있다.<br>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조명한 것까진 좋은데 건설적인 토론이 안 나오고<br>
결국 반공이냐 아니냐의 감정싸움으로 끝나버리기 십상이니<br>
국민에게 무능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br>
이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한 모든 정치계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br>
서민, 농민, 공장노동자를 대변했으면 말에 무게가 있어야 한다.<br>
하지만 결국 말에 무게가 없다.<br>
보수우파는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를 방패로 삼아 대숙청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학살)을 벌였으니 그 영향을 받은 사상에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고<br>
진보좌파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빌미로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의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고 하고<br>
실질적인 타협이 아닌 상호간의 절규만 남았다.
이젠 이게 의미 있는 싸움인지 무의미한 싸움인지 구별조차 안 갈 지경이다.<br>
한 번 인권운동이 학살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실패하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br>
만회하려고 얼마나 많은 절규와 분노와 증오를 반복해야 이 일이 끝나는 거지?
== 인간은 과거와 현재의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다 일이 끝까지 가고 나서야 미래와 죽을 때의 본심을 아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소통에 무능한 불쌍한 동물이다. 그래서 분노, 증오, 파괴적인 행위는 무의미했다. ==
나루토의 작가 키시모토 마사시는 등장인물 이타치의 대사 중 하나를 썼다.<br>
대략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과거와 현재의 기준으로만 남을 판단하고 끝까지 가서야 남의 본심을 안다'라고.
인간은 소통이 무능한 불쌍한 동물이다.<br>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br>
그나마 양심과 깨달음이 있다면 처음부터 자신이 이해받을 수 없었다는 걸 안다.<br>
분노, 증오, 파괴적인 행위가 무의미한 이유다.<br>
당장의 감정은 풀 수 있어도<br>
그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사람이 그렇다고 주관적으로 맹신하고 믿는다.<br>
수명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끝까지 가봐야 아는 일인데<br>
과거와 현재가 그렇다고 마음을 쉽게 닫는다.<br>
그렇다고 마음을 열자니 양자간 소통이 무능했다는 걸 한쪽에서 인증하지 않으면 여전히 닫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자리잡는다.
누가 공산주의의 삽질이 전세계 정치의 극단화와 일반인의 끝없는 외면과 정치판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는 스노우볼이 될 거라고 예상했겠나.<br>
네티즌들이 끝없는 토론, 비판, 비난을 거치고 나서 다 정리한 결론이 겨우 이거다. 겨우 이념 분쟁에 의한 공포와 증오의 부추김. 성별갈등 등의 다른 주제로 끝없이 이름을 바꾸는 냉전 분쟁의 재림. 부추기는 자들은 자신들이 부추긴다는 것도 모르고, 뒤늦게 후회해도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의 영향권에 부정적으로 있냐 없냐로 논쟁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잘못은 공산주의의 잘못일 뿐이지만,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 운동과 공장노동자 인권 운동을 명분으로 독재화되어 무고한 사람을 숙청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전세계의-특히 21세기의 기성세대의-인권 운동에 대한 공포 혹은 지지간 대립으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br>
적나라하게 말해서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끝없는 대립으로 사실상 망했다.<br>
못 되돌리고 영원히 회생불가능이다. 좌파든 우파든 다 끝장났다.<br>
일반인들은 성별갈등을 기점으로 더욱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관심을 끊을 것이다.
인간은 끝까지 보고 알자는 생각을 하거나, 도중에 이 사람을 이렇다고 경솔하게 판단한다.<br>
그리고 어떤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면 끝까지 보고 알기 무서워서 아예 자리를 피해버린다.<br>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기도 하고 거절당한 사람에게 불행한 판단이기도 하다.
=== 약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무지에서 극단적이 되기 쉬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진로의 길로 결론을 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진로의 길로 결론을 낼 평생교육기관을 원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어 돌려말한다. 하지만 복지는, 특히 정신건강과 취업에 관한 복지는 쉽게 제공되지 못한다. ===
약할수록 세상을 알고 싶어한다.<br>
세상을 알아서 자신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행복한 지 알고 싶어한다.<br>
순수한 구원과 자립을 향한 욕구에 절박하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끝까지 믿고 싶지만,<br>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못하고 배신한 자기 자신에게 절망과 죄책감을 느낀다.<br>
그래서 섬세한 성격의 몇몇 약자들은 자신에게 끝없는 형벌을 내리고 싶어한다.<br>
인터넷에서는 본인 의사 혹은 다른 사정으로 말할 수 없기에 티가 나지 않을 뿐이다.<br>
직접 말하기 무서워 돌려서 말하기 바쁘다.<br>
사람과 마주친다는 건 그 사람을 책임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br>
그리고 그 사람과 한 번 반목하면 그 사람을 책임지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br>
사회의 어둠을 거치면서 비틀렸을지 모르지만<br>
적어도 약자들이 사회에서 책임감이 없어진 상태일 때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초심을 갖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끝없이 자신만의 잘하는 진로를 찾아서 좋은 사회인이 되고 싶었고,<br>
자신이 잘못했을 때 자신에게 끝없는 형벌을 내리는 수많은 약자들.<br>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는 수많은 약자들.<br>
인터넷에서 수많은 약자들의 진짜 한탄은 티가 나지 않는다.<br>
시민단체로 들어가도, 인권운동가의 도움을 받아도, 기성사회의 집단의 도움을 받아도,<br>
자신의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의 처지는<br>
인터넷에서조차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br>
겉으로 공산주의의 독재화로 인한 보수의 인권운동에 대한 공포와 진보의 인권운동에 대한 공포를 멈춰달라는 호소가 극단화되어<br>
성별갈등 등의 다른 주제에까지 몸을 숨기면서 멈추지 못할 때조차<br>
'''그저 남들과 싸우지 않고 취업을 해서 효도하고 싶었는데 그런 소박한 소원조차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과 절망감은 직접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br>
트라우마를 털어놓지 못하고 거짓된 가면을 쓴다.
결론이 날 때까지 약자들은 다른 주제로 돌릴 수밖에 없다.<br>
왜일까? 몸을 고의적으로 숨기려 한 것도 아닌데 고의적으로 다른 사상에 맹신하는 듯한 모양새로 남들에게 비춰진다.<br>
순수함에도 구원을 향한 광기가 동반된다.<br>
약자들은 인터넷과 SNS에 취업에 지장을 겪는 약자들의 평생직장교육을 위한 기관을 만들고 싶다는 무의식을 자각하지 못한다.<br>
다른 사상은 약자에게 가면에 불과하다. 싸우지 않고, 취업을 해서, 효도하고 싶은데 그마저도 못했다는 어둠을 숨기려고<br>
사상과 집단에 약자를 위한 교육의 낙원을 만들길 투영한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부추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며, 인싸 측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취업에 지장이 있는 히키코모리 약자들의 트라우마를<br>
극복하는 것을 사회에서 도와주길 바랬을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 자신의 삶은 없는데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br>
쌓은 인맥도 스펙도 사회성도 충분하지 않아 불안한데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약자들은 각자 다른 가면을 쓴다.<br>
다른 가면 속에서 약자만을 위한 평생직장교육을 위한 기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진다.<br>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좌절하기 쉽다.<br>
세금을 이용한 방식은 풍전등화다. 공산주의 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적 영역이다.<br>
그렇다고 사비로 입금할 수도 없다. 정치와 상관없거나 정치에 혐오감과 무관심을 갖는 일반인도 아는 집단에 몸을 숨길 수도 없다.<br>
세금과 대기업과 재벌의 자본이 필요하지만 대기업과 자본은 보수적이 된 자본주의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인권운동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br>
인터넷에서는 보수적이 된 자본주의에 근거한 인권운동에 대한 공포심을 가진 네티즌이 주류지만 원래 보수는 아니었고 보수라 동일시하는 것도 싫어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집단이 맞다. 일반 사회인들은 보수우파와 엮이는 걸 혐오하며 실제로 동일한 집단이 아니다.<br>
인권운동은 한 번 실책을 저지르면 물러날 길이 없다. 조금만 잘못하면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낙인이 찍히기 쉽다.<br>
아직까진 네티즌들이 인권운동의 실책을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판단하는 시기다.<br>
하지만 근본 원인이 공산주의의 농민 인권 운동과 공장노동자 인권 운동을 가장한 독재화로 인한,<br>
오프라인 보수우파의 공포와 오프라인 진보좌파의 인권운동에 대한 연좌제 방지 호소라는 걸 인지하게 되면 이제는 인터넷 폐인간 분쟁에서 끝나지 않게 된다.<br>
기성 오프라인 정치 진영이 냉전 이데올로기 분쟁을 젊은 네티즌들에게 주입해버린 것이다.<br>
후세대에게 보수우파도 진보좌파도 뒤떨어진다고 평가받을지 모르는 중요한 점이다.<br>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br>
약자는 사회인 네티즌에게 평생직장교육을 위한 기관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투영한다.<br>
하지만 사회인은 공산주의 분쟁부터 시작된 정치의 무능화에 환멸감을 느껴 정치적 소지가 될 얘기를 친목질 위험이 있다고 간주하고<br>
남을 궁금해하는 것이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것이며 약자가 알기 어려운 사회성이라 약자의 본의 아닌 오지랖을 이해하지 못한다.<br>
약자는 꿈을 직접 말하면 무례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돌려서 말한 꿈을 거절당하면 사회인에게 약자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오를 품는다.<br>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심리며,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과연 사회인의 이해를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공통적인 심리다.<br>
사실 이는 사회인 네티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br>
정신과와 복지의 관점에서 담당하는, 대기업의 협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영역이다.<br>
의사도 아닌 일반인한테 정신 건강이 악화된 자신을 돌봐달라고 말할 순 없다.<br>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br>
정신과에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br>
정신과로 가서 치료를 받을 순 있다. 실제로 효과가 있어 충분히 권장할 수 있다.<br>
하지만 국가에서 정신과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다.<br>
정신건강이 악화된 일부 약자에게 치료와 사회화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br>
이상적으로 멋진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br>
의사들의 노동에 필요한 금전적 보상을 얼마로 잡을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br>
의료윤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의사들에게 박봉과 과한 노동을 강요할 순 없지 않은가.<br>
또 약자들은 병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의사들의 헌신적인 진료에 감사한다.<br>
약자들은 의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만약 협업 프로젝트가 일어난다고 가정했을 때,<br>
자신이 병원으로 가면 사회와 단절되었다는 불안함에 빠질까봐 두려워할 것이다.<br>
병원이라는 온통 하얀 노이즈와 먼지가 낀 것 같은 공간은<br>
삭막한 현실의 건물색보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안정을 찾기 마련인 약자들에게 공포를 안기기 쉽다.<br>
시설을 알록달록하게 짓는다 해도 특정 건설사에게 과도한 혜택이 가면 특혜라고 반대하는 단체가 있을 거고,<br>
비리가 생기면 레임덕 때문에 야당 혹은 상대 진영에 의해 프로젝트가 아예 엎어질 수 있다.<br>
그렇게 되면 약자들은 갑작스러운 시설 폐쇄에 절망할지도 모른다.<br>
또한 상담가와 강의자의 비용과 컨텐츠 검증에도 힘써야 한다.<br>
상담가와 강의자가 극단적인 커뮤니티 회원인지 아닌지 검증해야 한다.<br>
만약 상담가나 강의자가 극단적인 커뮤니티 상징을 넣을 경우<br>
레임덕까지 갈지 안 갈진 모르겠지만 프로젝트에 지장이 갈 순 있겠다.<br>
의료계 내부에 똥군기나 태움 논란이 생길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약자들에겐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개인 비영리 단체를 세워서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없다.<br>
생계가 바쁜 사회인들이 자기 업종이 아닌 개인 비영리 단체에게 후원할 가능성은 없다.<br>
있다고 해도 고아 혹은 전쟁고아 등을 돌보는 의식주를 제공하는 복지단체 위주로 후원한다.<br>
아직 정신과를 위주로 한 복지는 사회인들에게 낯선 추세다.
요즘도 이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과를 혐오 시설로 반대하는 단체가 있을 수 있다.<br>
치안, 체면, 교육 문제가 뒤섞인 복잡한 사안이다.<br>
정신건강이 주로 안 좋은 약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교육에 악영향을 주는 존재로 취급하는 게 주 이유...<br>
치안과 교육의 경우 슬프지만 납득이 가는데 여전히 슬프다.<br>
체면의 경우면 말도 안 되지만.
결국 복지란 주로 야당이나 집권 정치인들의 레임덕과 복잡한 검증 과정을 거치기 쉽기 때문에<br>
약자들에게 쉽게 제공되지 않는 점이 크다.<br>
약자에게 조금이라도 지장을 주는 복지는 하지 않는다.<br>
하지만 그렇기에 약자에게 복지를 할 수 없다.<br>
본의 아니게 약자의 분노를 살 수 있어 서로에게 안타까운 사안이다.
결국 정신건강이 약한 편인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br>
감당하는 것은 개개인의 영역에서 한정되고 있다.<br>
누구도 냉혹하게 약자를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br>
약자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겠지만<br>
복지의 순기능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도 아니지만<br>
복지를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진 복지를 지지하는 진보좌파도 모른다.<br>
진보좌파라면 알 거라는 편견이 있겠지만<br>
복잡한 이해관계가 해소되지 않아 약자가 만족하는 복지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정치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이 어려워하는 일이다.
= 인권운동과 복지센터의 인식과 실제에 대한 고찰 =
인권운동이 점점 과격해진다는 이미지라<br>
직접 들어가기 무서워 일반인들의 외면을 받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실제 돌아가는 방식은 다소 다를 것이다.<br>
일자리를 제대로 구하고 싶어도 구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에게 복지 관점에서 조치를 취한다.<br>
복지센터에는 인생이 망가진 약자가 찾아오기 때문에 진상손놈이 오기도 한다.<br>
진상손놈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 경우도 있다만...
그나마 인권운동 쪽 약자는 진상손놈을 싫어해서 정중하게 되려고 한다.<br>
하지만 약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자신을 제어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br>
다른 사람을 온건하게 지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br>
운동가의 지원을 받아도 부모가 못해준 역할을 운동가에게 기대한다.<br>
삭막한 현실 속에서 처음 받은 사랑에 대한 순수한 기대.<br>
힘들게 살아온 사람 중 극복할 능력이 있다면 과도한 기대가 부풀지 않지만<br>
능력이 없는 아싸나 히키코모리의 경우 건전한 사회인이 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br>
바깥에서 보면 빠나 씹덕이나 폐녀자나 정치병자라고 욕먹는 행동 속에는 그런 심리가 어느 정도 있다.
운동가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할 것이다.<br>
누구는 카르텔이나 커넥션이라고 트집을 잡고 운이 나쁘면 걸리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br>
세금을 인권운동에 운용하는 데에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것이다.<br>
진보좌파 쪽 정치인과 유명인과 접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게 카르텔까지 무조건 가는 거라면 너무 나간 것이다.
어쨌든 운동가들은 정치인과 접촉을 하면서 현실감각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을 것이다.<br>
강자의 입장과는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강자와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가들이 약자를 사회화하려고 받아들일 경우.<br>
정치인과의 접촉이 아직은 낯선 약자 입장에선<br>
인권운동이 생각보다 삭막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다.<br>
사람과 접촉을 아직까진 잘 못해서 덜하고 싶어서 인권운동의 지원을 받았는데<br>
막상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하는 경우.<br>
인권운동 속에서도 능력주의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엄한 규칙이 있어<br>
정해진 서류제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퇴거 절차를 밟게 되는 경우<br>
법에 대해서 모르는 약자가 잘 알아보이는 운동가에게 분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br>
운동가들은 강제퇴거를 반대하지만 절차에 따른 퇴거의 경우 지켜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를 겪는다.<br>
준법 정신을 지키고 성과도 내야 세금 지원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운동가들의 부담감.<br>
그러한 부담감이 의외로 법을 모르는 약자에게 잘 알려지지 못한다는 현실적 사정.<br>
누군들 약자를 퇴거시키고 싶겠는가.<br>
아나키즘이나 무정부주의를 고집하기엔 세금 지원이나 법적 절차라는 사정이 크다.<br>
= 약자의 심리 =
== 사람의 얼굴이 무섭지만 소통은 하고 싶다 ==
히키코모리 같은 약자는 사람이 무섭다.<br>
사람이 무서워서 만나기 싫어한다.<br>
무서운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사회 문제 때문에 고통받아서<br>
혹은 사회적응에 힘들어해서가 대부분이다.
사람을 이끄는 방법을 모르다 보니 소통은 하고 싶다.<br>
하지만 딜레마(역설)가 있다.<br>
이끄는 방법을 알려면 소통을 하면서 실수를 제어해줄 후견인이 필요한데<br>
한 번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감싸줄 사람이 없다.<br>
가정에서 있다고 해도 사회에서는 남남이다.<br>
자신의 실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엮일 거라면 차라리 나 혼자 감당하자.<br>
그런 심리가 약자에게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사회에서 이는 이상하게 여겨진다.<br>
인싸들에게 있어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하지 않는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br>
현실에서 메시지만으로는 빈약하기 때문에 실제로 통하는 재능과 지도력이 필요하다.<br>
아싸들도 그것을 안다. 하지만 재능과 지도력이 부족해 메시지를 찾게 된다.<br>
그리고 메시지를 이용한 시도는 실패한다.<br>
메시지의 정당성이라기보단 능력주의와 약자를 향한 구원이라는 두 가지 관점의 간극을 메울 수 없다.<br>
그걸 메울 수만 있다면 인권운동계와 사회인의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br>
하지만 인권운동계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하지 못했던 걸<br>
일반인들이 많은 네티즌들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실정이다.
= 여기서부터는 의분에 매몰된 시절의 목차다 =
= 양쪽 언론을 처음 살펴보는 습관 뒤 첫 회고 =
처음 언론에서 보도하는 걸 봤더니 각자 다른 소식을 전하고 있더라.<br>
심지어 둘 다 여러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br>
인터넷과 인터넷 언론 소식 중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처음 혼란스러웠다.<br>
미련했지. 네티즌을 이상적으로 과대평가했었다.<br>
그리고 네티즌 중 하난 나도 포함되니 자아비판이다.
직접 경험하고 실수를 잘 수습해야만 행복한 삶.<br>
실수를 수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
인터넷이 직접 경험한 사실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까?<br>
검증 없이 언제든지 날조할 수 있는 사실로 보이는 것의 산물이라면<br>
미련하게 내가 인터넷에서 믿어왔던 이상은 부질없는 거 아닌가.<br>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광신과 맹신을 비판해왔던 나는<br>
어느새 이데올로기에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과거 위키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br>
네티즌이 날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한 이상을 가져왔던 사람이 되었었는가?<br>
이상하잖아.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인터넷이 소수자에게 취업과 교육의 문턱을 여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br>
두 문턱을 소수자에게 한 번이라도 열지 않는다면 그런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영원히 죽은 것이고<br>
한 번 죽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br>
취업과 교육의 문턱을 일부분이라도 닫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br>
어떻게 해도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br>
그런 죄는 사라지지 않고 평생 속죄하다 운명해야 할 따름이다.
언어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은 믿을 수 없다.<br>
심증이 아닌 물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br>
어째서 심증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br>
알 수 있는 건 언어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br>
심증만 낳고 여론 조작에 유용하다는 것.<br>
고의적이면서 눈에 안 띠는 여론 조작에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다.<br>
그리고 그걸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조작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라 자신감을 갖지.<br>
미래의 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게 허세 부리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물은 엎지른 후지.
고의적인 눈에 안 띠는 여론 조작에 당하기 전에<br>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자세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br>
당한 후 깨달으면 너무 늦다. 당하기 전에 깨달아야지.<br>
일종의 자책인가.
여론 조작에 당한 사람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br>
조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적은 선택을 하던가.<br>
조작을 극복할 수 없으니 물증중심주의로 안전한 삶을 살아가던가.<br>
조작을 극복할 수 없다면 직접 말하긴 무례해도<br>
양비론적 관점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겠지.<br>
한쪽 관점만 생각하다 그런 비극을 또 되풀이하고 싶진 않으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지만 어려운 선택은<br>
조작을 극복할 수 없으면 조작하는 주체를 없애면 된다는 것.<br>
이건 내가 싫어하는 선택이다.<br>
심증중심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조작을 극복할 수 없는데<br>
조작을 없애겠다는 사람들마저 심증중심주의를 택하면 헛수고다.<br>
머리 아플 필요는 없다고 무책임하게 뭔갈 없애면 다 끝나나.<br>
PTSD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br>
항상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사람은 전쟁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무책임하게 단언한다.<br>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 남이 울부짖는 소리엔 무감정하게 구는 것이 현실이다.<br>
내면의 심정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는 그렇다.<br>
집안에서 화기애애한 가정도 사회밖으로 나가면 모순적이 될 수 있다.<br>
머리가 덜 아프다고 해서 안 아픈 게 되진 않는다.<br>
단지 안 아프게 느껴지는, 언제 갚을지 모르는 빚더미가 될 뿐이다.
조작하는 주체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은 미봉책에 불과하다.<br>
하지만 지혜롭다고 자칭하는 네티즌들, 기자들, 정치권은 그런 단순한 생각에 많이 넘어갔다.<br>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조차 조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br>
하더라도 '우리는 조작의 주체니 반성해야 해요.'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하다.<br>
말만 하면 끝날 일이 아니다. 조작을 못하게 구체적으로 막아야 하지.<br>
아마 그들도 해결방안이 없으니까 한탄하는 심정으로 말했겠지만 무책임한 건 다를 게 없다.<br>
이럴 거면 참가하지 말았어야지. 돈과 명예를 잘못 걸어서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다는 건가.<br>
한 번 악을 바로잡으려면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거기에 들어간 기회비용은...<br>
그건 이해하지만 바깥 사람이 볼 땐 감성팔이로 해석된다.<br>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도 수많은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이 되면<br>
왠만한 리더십을 가지지 않은 이상 무너진다는 것. 그런 건 이해하지만...<br>
적폐가 되라고 한 건 아니었어. 재원 고갈 등의 원인으로 무너질 위기가 기업보다 오기 쉽다는 걸 몰랐겠지만<br>
뒤늦게라도 알았으면 하지 말았어야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br>
살려달라는 목소리와 단죄의 펜과 키보드는 많은데<br>
그러한 것들 중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소위 양비론충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있다.<br>
하나는 반사회적인 사상도 일리가 있다고 말하다 비판 받을 때.<br>
하나는 반사회적이지 않은 양쪽 의견이 대립할 때 타협을 보자고 하다가 누구 편을 들으냐고 욕먹을 때.<br>
내가 목표로 하는 건 잘못을 옹호하는 양비론이 아니다.<br>
하지만 어떻게 해야 물증중심주의에 근거한 납득할 수 있는 양비론을 말할 수 있을까.<br>
어떻게 해야 그런 사회가 될까.
심증을 너무 많이 믿는 사람과 양비론충의 공통점은<br>
범죄를 바로잡고 모르는 분야를 통제하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야 성미가 풀린다는 것이다.<br>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안정적인 교화 체계를 마련하기 귀찮으니까<br>
명령 등의 간단한 장치로 통제하면 움직이기 쉽게 하는 게 편해서<br>
편하게 살다가 복지가 마련되지 않는 허점 때문에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무시한다.<br>
심지어 자기들도 한때 그랬는데 남한테는 남일이라고 무시한다.<br>
머리 아프게 양쪽의 말이 안 맞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물증을 제시하기 답답하니<br>
'물증으로 검증되지 않았는데 불도저처럼 다 밀어버리면 해결되지 않는 거야?'라고 하고 앉았다.<br>
한쪽을 믿는지 양쪽을 믿는지 빼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르는 분야를 자신의 것으로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는, 적응이 느린 불쌍한 사람이 많다.<br>
완전히 모르면 누군가에게 사회에서 살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울부짖다 외면만 받고 원망을 받다가<br>
분노와 증오를 먼저 배우고 사회 문제에 화내다 뒤틀린 취향에 빠지거나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의 말에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린다.<br>
감정조절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단계가 되면<br>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약자보다 강하면서 왜 약자에게 스펙과 감정조절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이해를 못한다.<br>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악의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단계가 되면<br>
나 자신의 악의에도 조종당하지 않으려 하고 남의 말도 함부로 믿지 않고 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br>
스펙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제야 사회인들이 약자를 도울 힘이 없는 또 다른 약자에 불과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br>
경찰서 등의 치안을 유지하는 사람들과 직접 만날 일(대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br>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와 서류 작성하는 사회인들이,<br>
군인과 무사 계급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단했고 힘있는지 느끼게 된다.<br>
동아시아의 나이 제한 문제가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면<br>
노후자금을 예상하다가 고뇌하게 되고 사회인이 된다는 것의 대단함, 좌절감,<br>
물 흐르듯 실수하지 않고 실수하더라도 수습해내어 사람의 신뢰를 사는 편안한 마음가짐이라는 능력을 갖고 싶어하게 된다.<br>
계속 층간소음이 안 되는 낮은 동네에 살다 보면<br>
사회인으로서의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되면 나 자신도 이렇게 사는 건지 회의감이 들며<br>
예의범절이 결여된 낮은 동네에서 산다는 것의 비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며<br>
진상손님과 꼰대와 불합리한 명령을 두려워하고 같은 사람이 되길 싫어하게 된다.<br>
노력함에도 복지 정책이 취업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여전히 제공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게 된다.<br>
한편으로는 노력하지 않는 자신에게 복지 정책이 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터넷의 수많은 악플러와 극단주의자들은 앞서 말한 과정을 겪어도 겪지 않아도<br>
적응이 느려도 굴하지 않거나, 적응이 느린 상태 그대로 포기한 사람이 많다.<br>
포기한 사람의 심정을 나는 모른다.<br>
포기해서 남에게 숨기고 싶은 성격과 취향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모른다.<br>
그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었건 난 낄 수 없다. 그들을 모르니까.<br>
그들의 용어를 알아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뭉치는지 나는 모른다. 낄 수 없으니까.<br>
정서적 관점에서 그들은 비주류지만 나는 비주류와 거리가 머니까.<br>
경제적 관점에서 비교하긴 싫다. 다 같은 사람이니까.<br>
하지만 적응이 느려도 굴하지 않으려는 약자조차<br>
실수를 수습할 방법을 빨리 배우지 못했다.<br>
모든 비극은 그런 능력을 약자가 어느 정도 타고나서 시작됐다.<br>
약자라고 일을 잘하고 싶어하지, 못하게 타고나고 싶진 않았을 거다.<br>
좋은 사회인처럼 좋은 리더십을 가지려고 아득바득 노력하지만<br>
가르쳐줘도 모르고 가르쳐줘도 모르고 자책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br>
공부해서 기억해도 까먹고 또 까먹고 반성하면서 자기 점검을 하면서<br>
좀 더 나아지고 싶다고 희망고문이 아닌 희망고문을 스스로에게 가하는 삶.<br>
인권운동계에선 사회의 냉정한 기준을 약자에게 적용하기 싫어 내부비판조차 부담스러워하지만<br>
결국 내부비판을 가해야 하는 시기가 여러 번 와서 지쳤을 것이다.<br>
사회의 냉정한 기준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맞출 수 없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br>
실수를 수습할 방법을 모르면 모든 걸 불도저처럼 밀고 싶은 불안감에 빠진다.<br>
그런 허상을 진짜 해결책이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극단주의가 탄생하지.<br>
모르면 밀어버리지 말고 알아서 무난하게 가르치는 게 정상적인 평화다.<br>
몸이 피를 흘리면 닦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이 피에 물들면 그 절규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br>
나 자신인가? 선동자인가? 명령자인가?<br>
인간의 존엄성을 한 번이라도 짓밟았다면 그 피는 악몽처럼 사라지지 않는다<br>
실수를 수습한다는 건 타고난 리더십의 영역이라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배로 힘들어한다.<br>
빚더미 등의 후천적 원인으로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br>
복지 정책의 허점에 의해 지원받지 못한 사람일 경우 더하다.<br>
본인들도 괴롭겠지. 실수를 지적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방치할 수도 없고.<br>
리더십을 타고난 사람의 입장에선 가르침을 전하는 건 자유지만<br>
만에 하나 잘못된 가르침이면 실수 하나로 사람이나 일터를 골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br>
수십 년간 가르쳐도 실습이 더딜 수밖에 없다.<br>
가르치기만 해서 쉬웠으면 제왕학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고
일하기 힘들어하는 약자들이 많다.<br>
키보드에서 신세를 한탄하지만<br>
정작 일터에 생각하거나 시도하면 몸이 굳는다. 마음이 굳는다.<br>
뭐라도 수습해야 하는데 굳는다.<br>
진상손님을 만나면 불의를 못 참아서 저항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때렸을 경우에도 황당하게 한국식 정당방위로 인정받거나,<br>
말하는 모양새가 열받지만 묘하게 일리는 있는 상황에서 자기 분을 못 참고 폭행죄를 저지를까봐.<br>
감정조절이 심각해 조롱하지 말아야 할 약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결국 인권운동 단체뿐이다.<br>
인권운동 단체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은, 그보다도 자기가 폐가 되기만 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가지 않는다.<br>
히키코모리 하면 인터넷에서 조롱받는 분위기지만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도 일하고 싶은 마음에 절망한 한 명의 인간이 있다.<br>
설상가상으로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는 수시로 인권운동 단체로 접근해 첩자가 되어 빼갈려고 한다.<br>
이건 성별에 관계없는 인간이 고뇌할 만한 것이다.
보수와 우파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br>
QAnon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안다.<br>
트위터에서 약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br>
여초 커뮤니티 안에서 약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br>
캣맘, 개 기르는 약자, 채식주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br>
하지만 그들도 일하기 힘들어하는 약자들이 많다는 점을 괴로워했다는 점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br>
사회 교화 시설은 부족한데 유흥가라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겠지.<br>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유흥가라는 데가 대체 왜 있는 건지.<br>
성적 욕구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지 않았더라면 비극이 없었을 거다.<br>
인간은 누구나 미지와 금기의 영역까지 다 알아야 성미가 풀리는데<br>
그게 왜 성적 욕구에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지 진짜 이해를 못하겠다고.<br>
차라리 성적 욕구가 위험할 때 자동으로 차단되는 객관적인 영역이었더라면 좋았을 거다.<br>
인위적인 수단 없이도 인체가 성적 욕구를 자동으로 차단하면 모든 게 일사천리인데 왜 그런 구조가 아닌 건지.<br>
일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못하는 약자가 있다는 것.<br>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손에 익지 않아 절망하는 약자가 있다는 것.<br>
그런 약자를 이끌어주는 일이야 말로 사회에서 가장 해야 할 일이었을 텐데...<br>
결국 난 언더도그마 같은 생각을 할 뿐이야.<br>
난 언더도그마 같은 생각으로 말한 회고가 아닌데<br>
이것조차 언더도그마로 남게 되겠지.<br>
내가 극단적인 양비론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길 빈다.<br>
진짜로 그렇다면 난 위선자야. 내가 위선적인 짓을 하는 게 제일 싫어.<br>
발언할 때마다 한마디 한마디가 두려워. 나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br>
용기와 순수함은 참 절망으로 바뀌기 쉬워. 나도 모르는 위선과 거짓말 한마디 때문에.
== 첨언 ==
출신이 하나의 정치적,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상징이 되어서<br>
특정 이념만을 따라야 하는 지역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가.<br>
밖에서는 반대되는 다른 특정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지역드립을 듣고<br>
안에서는 내부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의 삽질을 보고도 막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 화상을 입었는데 안전불감증은 생각보다 일상적이고 심하며 인터넷에는 실감이 없다 =
중증 화상은 아니다. 경도 화상이다.<br>
식수를 끓여먹을 때 냄비나 주전자를 써서 예상치 못한 화상을 입었다<br>
그리고 화상으로 인한 물집을 방지하는 과정에서<br>
인터넷에 실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상을 입었을 땐 머리가 하얘진다<br>
차가운 물로 식혀야 해. 안 그러면 내 몸이 죽어.<br>
이런 생각으로 가득해서<br>
화장실 문을 다짜고짜 열 때<br>
다른 사람이 안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br>
만약 문 손잡이가 복부를 세게 쳐서 다른 사람의 건강을 내출혈로 악화시킨다면?<br>
나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찬물로 씻으려고 한 일이<br>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런 감각,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br>
재난과 안전불감증에 관한 단어를 늘어놔봤다.<br>
지진, 책, 책장, 책장의 무너짐.<br>
화상, 주전자, 냄비, 컵, 텀블러, 종이컵, 유리컵, 유리컵을 깨뜨림, 접시, 접시를 깨뜨림, 유리.<br>
전자레인지, 생각 없이 잠이 덜 깼다는 등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뜨거운지 확인하지 않고 컵을 들이마시기.<br>
생각보다 안전불감증은 예민한 사람들의 과민반응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br>
'그런 거 신경 쓰느니 상사한테 안 찍히게 조용히 하겠다'라는 인식이 아직까지 가득한 사회다.
재난을 당하면, 한 번 전쟁에 휩쓸리면, 피를 보면,<br>
인터넷에서 사상을 극단적으로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br>
그리고 인터넷에서 끔찍한 재난재해와 안전불감증을 다룰 방법은 없다.
인터넷을 교육적 목적 혹은 사회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br>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br>
하지만 두 목적을 온라인계는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천재지변과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고 나서야 깨닫는 동물이다.<br>
인터넷은 전 세계 사람들에 의해 비폭력주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br>
그래서 천재지변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다루지 못한다.<br>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천재지변과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인식되지만<br>
꺼림칙한 것이며 이미 알고 있으니 재조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br>
전쟁이라는 것은 동기가 선해도 비정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br>
인간은 비정상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배타적이고 정상적인 것을 선호한다.<br>
화상으로 인한 고통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똑같이 인간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고<br>
그로 인한 몸부림을 치는 것은 환자나 피해자의 고의가 아니다.<br>
사람은 아파서 살고 싶다고 절박하게 몸부림 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면 무서워하고<br>
정작 그런 상황이 자신이 되면 살려달라고 외치다 주변 사람의 무서워하는 시선을 목격하게 된다.
== 첨언: 편의성, 다양성, 애착, 증오 ==
인간은 비정상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배타적이고 정상적인 것을 선호한다.<br>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br>
다양한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된다.<br>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br>
각 성향의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경험하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닫아 증오하게 된다.<br>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위험하다.<br>
돌봄 받아야 마땅할 존재지만, 위험하다.<br>
모든 성향을 증오하는 상태에서 한 성향의 후견인에게만 먼저 도움을 받으면<br>
먼저 도움 받은 특정 성향에 은혜를 품어서<br>
나머지 성향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으니 숙청해도 좋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br>
정작 그들은 다른 성향에 먼저 은혜를 입으면<br>
지금 성향에 숙청해도 좋다는 마음을 품을 자기 자신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모든 것의 객관화를 위해서 움직이지만<br>
자신만의 삶이 없다는 것에 공허함을 느껴 주관적으로 행복한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br>
객관화를 위해서라면 사회악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에 고통 받는다.<br>
이러한 삶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른다.<br>
인터넷의 극단주의자들이 온건주의자들에게 마음을 닫은 원인이기도 하다.<br>
세상에 극단주의자들의 본거지로 연구하겠다고 용기를 낼 연구자도 없기 때문에<br>
이러한 현상이 순수한 연구 및 극단주의자의 온건화로 재조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난 사람은<br>
여러 사람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br>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없다. 범죄를 자발적으로 즐거워하는 자가 아닌 이상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br>
여러 사람과의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나 건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br>
자신이 그러한 후견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br>
다른 사람이 건전한 애착관계를 가르쳐줘도<br>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하면 반쪽짜리 건전한 애착관계다.<br>
수많은 사람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뒷수습을 평온하게 할 줄 아는 사람.<br>
그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목표 아닌가.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난 사람은 말한다.<br>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고 같이 돕고 살아야 한단다.'<br>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이를 무시한다.<br>
'다른 사람과 어울리느니 나 혼자 살아야지' 하고서 나중에 후회한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정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믿지 않는다.<br>
본인이 정의로운 애착관계를 모르니 불안해서 정의에 집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 중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br>
그나마 이러한 점을 자각하고 좌절하겠지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br>
건전한 애착관계를 오랫동안 몰랐던 사람이<br>
갑자기 다양한 사람과의 애착관계를 형성하기란 힘든 법이니까.<br>
알기 힘들고, 알기 전엔 모르고, 안 후에는 옛날의 약자였던 나를 모르게 된다.<br>
의외로 사람은 같은 처지를 잘 알지 다른 성장하지 못한 약한 처지를 모르게 된다.<br>
실패한 길은 자연스러운 습관의 변화에 의해 잊혀질 수밖에 없다.
== 첨언: 당뇨, 간, 관절, 늙음 ==
흔히 당뇨, 간 건강 악화, 관절에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br>
젊음만 믿고 나댄 걸 후회한다. 그런 경우는 의외로 꽤 많다.<br>
난 아니겠지. 난 영원히 젊을 거야.<br>
관리만 잘 하고 사회에서 위험한 부분만 피하면 문제 없어.
정말 그럴까? 경력단절과 나이 제한이 사회적 문제인 이유와 연관이 있는데.<br>
설령 뒷배가 있어도 나이는 못 이긴다.<br>
나이가 들면 뒷배라도 불안정해지고 서로를 버린다.<br>
지금까지 나이가 들어도 비상사태에 처해도 보호해주겠다고 단언하는 기득권 집단을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건강 문제가 생겨도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은 못 차린다.<br>
자기 행동과 불의의 사고에 의해 자기 몸에서 피라도 흐르거나 남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 정신 차리겠지만<br>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답이 없다.
= 이슈에 먼저 분노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
분노한 사람이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br>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치를 줄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br>
이슈에 먼저 분노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논란 및 사건사고에 먼저 화냈다고 치자.<br>
처음에는 정의로운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치자.<br>
하지만 다 지나고 보면<br>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화를 내서 신상털이까지 번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br>
이게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가 돌아간 결과란 말인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의외로 사람들은 내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을 비교하기 전까지<br>
내가 몰랐던 걸 다른 사람이 알고, 다른 사람이 몰랐던 걸 내가 알고,<br>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주장하는 게 다른데 둘 다 일리가 있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한다.<br>
내 관점만 옳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에게 근거 없는 잔소리나 하는, 나이에 상관없는 꼰대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슈를 조용히 덮자고 하면 피해자에게 억울한 것이 맞다.<br>
하지만 조용히 덮자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악인이 아닌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br>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사람의 정의감을 인정하지만<br>
그 정의감이 비판자 본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까봐 걱정하는 덮으려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 피라미드 사회에 약점은 없다 =
피라미드 사회는 상위층으로 부가 집중되어<br>
상위층에서의 조건 및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는<br>
중산층, 하위층, 빈민층, 히키코모리의 좌절에 의해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다.<br>
병폐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라미드 사회가 사라질 일은 없다.<br>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능력주의를 중시하며 능력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br>
자연스럽지만 안타까우며 멈추지 못할 현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br>
'위에 있는 사람은 그만한 능력이 돼서 위로 오른 거야'<br>
'나는 아래에 있을 만해서 아래에 있는 거야'<br>
'내가 분수를 알고 천천히 공부해야지. 서두르지 말자.'<br>
약자마저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약자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br>
'어디서 같은 약자인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거야'<br>
'약자라면 성격이 착하던가. 성격이 나쁘면 벌을 받아야지.'<br>
자신의 성격이 나쁜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는데 남의 성격은 구분할 수 있다고 근거 없는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피라미드 사회에선 상위층이 생사이탈권을 쥔다.<br>
중산층 이하의 나머지 계층의 지지를 받아야 하지만,<br>
법에 관해선 상위층이 나머지 계층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br>
나머지 계층조차 법을 잘 아는 사람은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은 사기계약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법 앞에 상류층도 평등하다.<br>
하지만 민주주의가 인간의 악의에 의해 무너지기 쉬운 불안정한 체제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br>
독재의 씨앗을 품은 신분제라는 원점으로 퇴화할 가능성까지 생각해봤을 때<br>
필연적으로 반란을 막기 위해 법은 상류층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법도 나머지 계층에게 불리한데 다른 부분에서도 그렇다.<br>
왕족과 귀족이 군사력과 공문서로 이룩해놓은 질서를 평민이 손댈 수 있을까?<br>
시민 혁명 후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다루는 기업이 중요 위치가 되어 질서의 중심이 된 것을<br>
노동자가 노조를 통해서 체제를 전복한 후 손댈 수 있을까?<br>
취업준비생 이하의 아직은 사회적 잠재력이 낮아 높다고 증명되지 못한 계층이<br>
공업을 다룬 경험이 많은 육체노동자나 공업 체계를 수십 년간 이끌어 온 경력직 사원의 노하우를 따라갈 수 있을까?<br>
실무 적성이 불안정한 피라미드 사회의 중산층 이하의 전략은<br>
결국 경력직의 노하우를 일찍 따라가거나,<br>
따라잡지 못해 절망한 나머지 상류층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br>
누군가는 노조를 인륜마저 버린 불법적 조직이라고 욕하고<br>
다른 누군가는 노조를 궁지에 몰린 약자의 절망이라고 말한다.
상류층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상황에서<br>
정서적 관점을 제외하고 경제적 관점에선 약점이 없다.<br>
능력주의에 근거해서 자연스럽게 움직인 결과가 그렇다고 말한다면<br>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br>
이러한 논리는 아무리 약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br>
상류층은 의식주 측면에서 중산층 이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고,<br>
중산층 이하에게 책임을 미룰 선택만 하지 상류층 자신들이 책임질 선택은 하지 않는다.<br>
손해를 안 보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인류에게 장기적인 독이 된 것이다.<br>
게다가 중산층 이하의 계층이 상류층에게 반박할 수도 없다.<br>
반박할 순 있지만 상류층이 일찍 만전의 준비를 갖추면<br>
전 세계에 통하면서도 명분이 사는 항의 방법을 마련하기 힘든 나머지 계층은<br>
뒤늦게 당하거나 저항해도 자본과 준비의 차이에 절망한다.<br>
자본과 의식주 관리 체계 속 입지의 차이 속에서<br>
비폭력시위에 지친 나머지 무력시위가 힘을 얻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어나기 쉬워졌다.<br>
중산층 이하가 비폭력시위에 먼저 지쳤든, 상류층이 이를 먼저 모른 척했든, 결국 결과는 같다.
상류층의 논리가 경제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워<br>
중산층 이하의 나머지 계층을 대표하는 집단의 논리가 애를 먹는다.<br>
상류층의 부패를 고발할 합당한 논리를 고민하지만<br>
현실적인 방법은 부패한 자본을 몰수해 뺏는 것밖에 없다.<br>
그런데 뺏는 쪽이 상류층보다 국가와 기업을 경영하는 노하우가 부족하므로<br>
필연적으로 국력과 경제력이 약해지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br>
상류층 입장에선 나머지 계층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br>
실제로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힘으로 부르주아의 자본을 뺏는다는 강수를 두다가 독재로 퇴화했다.<br>
나쁜 결과로 정해진 것을 되풀이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 5ch(前 2ch)는 뒷세계 스레가 있다고 한다 =
한국에 알려진 다른 나라 커뮤니티 중 5ch, 前 2ch에 뒷세계 스레가 없다.<br>
야쿠자가 지배하는 일본 특성상 나올 수 있었던 스레겠지.
서양에선 불가능하다. 뒷세계 얘길 하면 추적해서 체포한다고 들었다.
진정 자유로운 걸까?<br>
처음부터 자유로운 인터넷 문화는 불가능하지 않았나.<br>
어릴 때라면 호기심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겠지.<br>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br>
한 번 인터넷을 하는 순간<br>
실질적으로 보호막이 뚫린다.<br>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잘 없다.<br>
애초에 안 하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는 담론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br>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돌아다니는 게 잠재시장이었다가 돈이 되었다.<br>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는 시장이 돈이 되었다.<br>
일거수일투족이 다 뚫렸는데 돈이 오가니 철회할 수도 없다.<br>
자유, 평등, 평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br>
이제 와서 인터넷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br>
국민이 국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br>
이민을 가더라도 난민이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 민주주의와 인터넷의 끝 =
과거에는 양비론자가 의견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br>
지금은 가능하다. 지구 전역의 전 국가가 화합할 수 있는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br>
어떤 진영에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칭 양비론자는 잊혀질 것이다.
양비론자가 의견을 내는 것은 조건이 필요하다.
1. 현실에서 각오하고 모두까기 인형이 될 것 (소수의 위인만 가능)<br>
2-1. 민주주의 사회가 올 것<br>
2-2. 뒷세계의 힘이 약한 국가에 속할 것<br>
2-3. 인터넷이 발달할 것<br>
3. 어떤 사상에도 호의적이지 않을 것<br>
4. 특정 사상이나 다른 사상에 빠지면 모든 장단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br>
5. 기록이 소실되지 않을 것<br>
조건을 만족시켜 양비론자가 인간이 모든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어<br>
모든 이념의 수명이 끝났다고 단언해도<br>
인터넷은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므로 조작되기 쉽다.<br>
보존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우거나 조작하는 것은 쉽다.
부질없게 끝날 것이다.<br>
해보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다.<br>
전부 부질없게 끝날 것이다.
= 인간이 목숨을 거는 때 =
섣불리 목숨을 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br>
그런 교훈을 깨달을 때까지<br>
미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거는 이유는<br>
약자를 도와주지 못하는 강자에게 분노하기 위해서다.
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걸 때 비난받지 않는 이유는<br>
순수하게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희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걸 때 비판 받는 이유는<br>
자국민에게 약자를 도와주는 강자에게 분노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br>
그러한 강요는 사람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며<br>
본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미성숙한 인간이 모르는 상태에서<br>
대체로 이미 아는 성숙한 인간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br>
인간관계가 좁아서 진실된 마음조차 남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할 때를 모른다.<br>
그리고 모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목숨을 함부로 걸라고 말하다<br>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벌인다.
= 인간이 고발하는 때 =
인간이 고발하는 때는 두 가지다.<br>
조직에 문제가 있어서 내부고발한 경우.<br>
조직에 앙심을 품어서 고발한 경우.<br>
첫 번째 경우는 국익을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br>
허언증일 수도 있다.<br>
두 번째 경우는 커뮤니티, SNS, 인맥의 단점을 보고 고발하는 경우지만 먹히지 않는다.<br>
오프라인에선 고발하면 압박이 드니까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br>
온라인에선 익명성의 힘 때문에 압박이 덜 들어 고발하기 쉽다.<br>
하지만 정치권과 엮인 중요 문제가 아닌 이상 묻힌다.<br>
다른 커뮤니티는 내가 고발한 문제에 관심이 없고 끼어들기 싫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 고발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데 고발하는 경우가 많아 착잡하다.<br>
애초에 인터넷으로 엮지도 엮이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 길고양이의 약 15%가 살인진드기병에 걸렸다고 하며 개에 물리면 몸이 괴사할 수 있다고 한다 =
길고양이쪽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2016년 8월 22일 연구 결과에서 그렇게 나왔다고 한다.
= 악의 평범성에서 파시즘의 평범성으로 =
인터넷을 교육적 목적 혹은 사회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br>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br>
하지만 두 목적을 온라인계는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평생교육 체계가 마련된 국가기관 사이트를 세운다고 하면<br>
정치적 올바름마저 반대할 것이다.<br>
'국가 검열이다.', '인터넷에 숨겨둔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들키기 싫다.'라는 논리로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네티즌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br>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들키기 싫어서 꽁꽁 숨겨서<br>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파시즘 친목질 집단을 만드는 건강하지 못한 집단으로 전락한 주제에<br>
대화 주제가 안 맞으면 다양성 따위 버리고 맞는 주제만 말하라고 압박을 넣는 집단으로 전락한 주제에<br>
현실의 사람들에게 훈계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인가.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인터넷 독재까진 안 갔다고 부정할 것이다.<br>
하지만 인터넷에선 다수가 다수를 독재하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기 쉽다.<br>
오프라인 독재가 중앙집권이라면 온라인 독재는 독재자 꿈나무들끼리 숙청을 지속하는 끝없는 싸움이다.
이러한 인터넷 독재 속 숙청은 평범하다.<br>
오히려 평범해서 무섭다.<br>
비정상적인 사람이 독재하면 그렇다고 납득이라도 하지.<br>
자칭 정상적인 사람이 독재를 정당화하고<br>
도덕과 윤리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훼손한다.<br>
기준점 중 가장 정확한 물증중심주의를 훼손한다.<br>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회피하면 되니 먼저 공론화하고 보자는 무책임한 태도들.<br>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이익집단 앞에선 한마디도 못하는 위선자들.<br>
한마디를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되었다고 생각이라도 하고 입을 다물기라도 해야 할 것을.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인터넷 독재를 보고도<br>
기자들과 사이트, 커뮤니티, SNS 운영자들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유의 존중이라는 명목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br>
솔직히 그들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br>
인간이 한 번 주관적인 숙청의 기준을 객관화하려고 노력해봐도 거듭할수록 자기 진영까지 돌아온다.<br>
숙청에 숙청을 거듭한 결과 자기 편마저 피해망상으로 의심해버리면<br>
누가 돈을 대줄까. 누가 광고 클릭수를 채워줄까. 누가 제휴 사이트에서 구매해줄까. 누가 선거에서 표를 대줄까.<br>
인터넷의 갑은 을들에게 과감하지 않다. 왜냐하면 네티즌들은 이미 충분한 슈퍼 을들이기 때문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네티즌들이 슈퍼 을이면서 슈퍼 갑이라는 것이다.<br>
조금만 자신보다 낮다 싶으면 슈퍼 갑으로 변모해서 슈퍼 을을 물어뜯는다.<br>
토론, 논쟁, 비판이라는 권리를 가진 슈퍼 갑이자 슈퍼 을들이<br>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물증중심주의에 근거한 교차검증을 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갑은 세계적 대기업을 제외하면 경제적 서열이 낮다. 대체로 자영업자들이다.<br>
자칭 슈퍼 을들은 세계적 대기업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몰래 구매하는데<br>
자영업자들에게는 허위 별점 테러를 하는 등 가혹하기만 하다.<br>
대기업은 소송이 무섭지만 '자영업자들은 소송비도 돈이라 자기한테 함부로 못 대할 거다'라고 비웃으면서 계산하는 속물들이 많다.<br>
정작 네티즌의 위치는 자영업자보다 조금 낮은데도 동족혐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br>
진상손놈짓을 확실히 막지 않으면 자기가 영업직을 할 때 피해를 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br>
소비자일 땐 정당한 물증 없이 생산자를 비웃을 생각이나 하면서<br>
생산자가 되고 나서야 소비자들의 자정작용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깨닫는다.
네티즌들은 무책임하다.<br>
생산자가 되기 전 소비자로서 생산자에게 가난의 고통과 애정결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br>
과도한 친목질과 비위 맞추기만 강요하면서<br>
스펙과 다양한 사람에게 건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은 뒷전이다.<br>
불건전한 애착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 끌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망상하는 팔푼이들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파시스트를 키우는 요람이 되었다.<br>
파시즘을 키우는 요람이 되었다.<br>
민주주의는 살려달라고 빌고 있지만<br>
자기가 파시스트가 된 것도 모르는 팔푼이들은 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자칭하면서 민주주의를 죽인다.
= 인터넷 방송보다 TV 방송이 차라리 낫다 =
TV 방송과 인터넷 방송의 차이는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 딱 하나다.<br>
서양 다큐멘터리가 육체노동자, 노가다 하는 사람의 노동을 보여준다는 것.
사소하지만 왜 중요하냐면<br>
신문과 TV 방송이 대세일 시절에는<br>
적어도 자기가 보는 신문이 배달부의 피땀으로 만든 것이고<br>
TV 방송 속 노가다 하는 사람을 소개한다는 자각이라도 있었다.<br>
육체노동자를 무시하는 풍조가 적었다.
그런데 인터넷 방송에선<br>
항상 안전한 컨텐츠만 보여달라고 한다.<br>
TV 방송에선 간신히 허가를 받아 기업 속 육체노동자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만,<br>
인터넷 방송계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다.<br>
이는 한국 방송과도 관련이 있는 공통점이다.<br>
안전한 컨텐츠만 중시한 나머지<br>
실제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는 하나도 다루지 않는다.<br>
내가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유가<br>
송전탑에서 전선을 관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졌다고<br>
공업 노동자가 만든 시설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하나도 감사해하지 않는다.<br>
그리고 한국 방송계와 시청자들과 인터넷 방송계는 그런 타성에 젖어 있다.<br>
예능으로만 눈을 가리면서 실제 노동자의 힘든 삶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br>
내가 소비하는 물건이, 내가 쓰는 물건이 노동자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도대체 뭔 거부감이 있길래 육체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천대시할까.<br>
뭐 때문에 한국 방송계에선 삶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지 않는 자기검열에 일상적일까?<br>
반사회적 방송을 하지 말라고 어르신들과 학부모층이 항의를 넣을까봐?<br>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아이한테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이는 적나라한 말로 어른들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살 뿐인데<br>
정서에 안 좋다고 무조건 육체노동자의 피땀이 흐른 부분을 배척하고 무시해야 하는 것인가?<br>
아이는 당신들 생각보다 똑똑하다.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거였으면 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생기겠는가?<br>
조선 시대 때도 사농공상으로 육체노동자를 천대시하더니 한국은 그때 편견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br>
혹시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한테 욕먹을까봐 검열하는 것인가?<br>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내부고발자가 될까봐?
인간은 타성에 젖어도 너무 젖었다.<br>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만 물증 없이 보면 기분 좋겠지.<br>
시청률이 그렇게 나오니까 동서양 차이가 있다고 변명하겠지<br>
그러면 취업 다큐멘터리와 범죄 조사 다큐멘터리를 중점적으로 방송하는 서양 방송계가 바보란 말인가?<br>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 한국 방송계와 그 시청자들은 똑똑한 거고?
평생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만 보고 싶다면<br>
인간이 진실과 거짓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br>
과거와 지금의 쓰레기 같은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후회라도 해야 할 것이다.
= 방송과 언론의 문제점 =
== 온라인 거래&민원, 택배기사와 민원 처리 담당으로의 부담 전가 ==
온라인 거래와 민원이 흥한 것도 문제가 된다.<br>
온라인의 물품, 컨텐츠 생산자, 민원 처리 담당 공무원에게 소비자와 국민으로서 책임을 요구한다.<br>
오프라인 시절에는 요구가 일정해 정량화라도 할 수 있었지<br>
온라인 시기에는 변덕스러운 소비자나 네티즌이 많아서 정량화도 객관화도 불가능하다.
빨리빨리 보내기만을 추구한다.<br>
업체라면 그럴 수 있다. 생필품만 주문한다면 그럴 수 있다.<br>
그런데 생필품이 아닌 문화적 과시용도의 물품을 주문하는 문화가 문제가 된다.<br>
모든 것을 노동자의 피땀이 흐른 소중한 물건으로 보지 않고,<br>
택배를 빨리 받지 못해 자랑질하지 못해 항의할 것만 생각하는 소비자와 손놈들이 많아졌다.<br>
육체노동이 없으면 정신노동과 문화도 없다는 법칙을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모를 손놈들이 많아졌다.<br>
원시시대 석기시절로 돌아가면 을질조차 못할 손놈들 주제에 현대 시대에 참 대책 없이 적응하고 앉은 것이다.
원시시대 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중세 근대 현대까지 힘겹게 거쳐온 길을<br>
왜 사람은 쉽게 생각하는 것인가?<br>
손놈 본인들이 그럴 수준이 안 되니까 생각도 못하고 자기혐오와 열등감을 부정하는 것일까?<br>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아니면 멸시하는 천박한 속물들이다.
결국 자원 고갈이나 원시시대 석기시대로 퇴화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천박한 손놈 속물들이<br>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아서 과도한 물품 배송을 요구하는 바람에<br>
택배기사들과 민원 담당과 고객센터한테 온갖 욕설이나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br>
옛날 전쟁터였으면 도태돼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군상들이 왜 현대 시대가 편하다고 타성에 젖는 것인가.<br>
자기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걸 정말로 객관적인 전문가가 다 수습해야 한다는 건 생각도 안 하는 것인가.<br>
만만한 택배기사들과 민원 담당과 고객센터에게 욕설할 깡이 있으면 대기업과 재벌의 병폐도 좀 까봐라.<br>
= 인터넷 방송과 세금 =
인터넷 방송인이 돈을 잘 번다고 해서 그게 다 수익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는 아니다.<br>
그리고 그런 얘기는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잘 나오지 않는다.
최근 버추얼 유튜버가 유행하면서 몇몇 버튜버가 말했다.<br>
누진세가 붙어서 실 수령액은 세간의 예상보다 적다고.<br>
시청자들은 장비에 투자하는 것까지 합해서 계산해야 한다고 한다.
아프리카tv와 트위치와 유튜브 시절에는<br>
시청자층이 세금에 관심이 없었다.<br>
키리누키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라 알려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버추얼 유튜버가 세금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하면서<br>
키리누키로 알려지면서 세금 관련 정보의 진입장벽이 조금 낮아졌다.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인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br>
= ROID와 니코니코 동화 =
VOCALOID. 보컬로이드. 니코니코 동화. VOICEROID. 보이스로이드.<br>
한때 네티즌들이 희망을 걸었던 문화 중 하나였다.<br>
뭐하고 있냐 몸통아 같은 창작물이 나오기 쉬운 분위기의 서브컬처.<br>
합성물과 MAD.<br>
합성물과 MAD는 고갈되기 쉽다. 석유 고갈보다 중요성이 낮지만 비슷한 문제다.<br>
한정된 물건을 어떻게 개그와 자원으로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br>
실시간으로 웃긴 것일수록 재미있다는 인간의 습성에 의해<br>
영상 서브컬처는 합성물, MAD, 인터넷 방송, 버추얼 유튜버로 발달했다.<br>
정적인 영상물일수록 한계가 있다.
니코니코 동화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서브컬처 팬들은<br>
버려진 장소(Abandoned)와 폐허(Ruin)와 고딕(Gothic)과
플레이스테이션 2까지의 몽환적이며 슬픈 포스트 아포칼립스 3D 감성도 좋아했다.<br>
언제라도 세상이 멸망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안개 같은 희망을 가진다.<br>
720p, 1080p의 고화질 시대에선 느낄 수 없는 감성이 되어버렸다.<br>
아직 일본 사회가 극우화되기 전 반전주의가 가득했던 그 감성이었다.
초창기 버츄얼 유튜버는 니코니코 동화 시절의 정서가 있었다.<br>
아직은 불안정한 시장이라 가능했던 현상일지도 모른다.<br>
지금이야 시장이 커져서 세상이 멸망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가진다는<br>
슬픈 안개 같은 정서는 없어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br>
방송인이 행복한 걸 싫어할 팬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스마트폰 시대화 고화질 시대가 오면서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br>
세상이 깨끗해져서 멸망할 일이 없을 거라고. 장미빛 미래만 가득할 거라고.
그런 미래 따윈 오지 않는다.<br>
언제든지 원시시대와 석기시대로 세상이 퇴화하거나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계하지 않으면<br>
현실을 부정하는 데에만 안주할 뿐이다.<br>
우연히 운석이 심하게 떨어져내려 유혈과 고통이 낭자할지도 모르는 사태조차 대비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2021년 10월 23일 (토) 22:17 기준 최신판

교훈[편집 | 원본 편집]

보면 보는 것만 알고 안 보는 걸 모른다.
본 것도 안 본 것도 다 봐야 다 안다.
모르는 게 없을 때까지 다 봐야 한다.
항상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말이 가시가 된다.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해 말을 부드럽게 바꾼다.

틱톡 인스타그램 안 써요[편집 | 원본 편집]

구글링하니까 sabremantis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전에 몇 명 있었는데
제 닉네임의 유래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짓다가 우연히 걸린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