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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잉여입니다.
오타유발자, 게으름뱅이, 지나가던 잉여.


 
주식은 컴퓨터, 밀리터리(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밀리터리), 게임, 우주.
 
=== 문서 테스트용 ===
==== [[6.25 전쟁]] ====
===== 3.1 전쟁 전야 수정안 =====
전쟁 초반에 국군이 몇차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계속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한 상황에 대해서는 '국군의 장비가 부실해서 북한군의 일방적인 남침을 막기에는 힘들었다'라는 형태로 설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방부에서 나온 6.25 전쟁사나 다양한 연구자료들을 감안하면 과연 그 정도까지 부실했냐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 서울 이북에 있던 6개 사단들이 모두 화기와 중장비, 차량을 온전히 보전한 체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펼쳤다면 미군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텼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국군의 장비가 당시 상황에 대한 '좋은 변명 사유'가 되지는 못한다.
 
당시 국군의 장비가 북한군 대비 부족하고 뒤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공군과 해군의 경우 상황이 심각했는데, 개전 시점에서 공군은 단 한기의 전투기도 보유하지 못했고 해군은 구잠함(Submarine Chaser)한척을 막 배치한 뒤 추가로 몇척을 더 구매하려고 하던 참이였다. 반면 육군의 경우 이들 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은 면이 있었다.
 
개전 전까지 미국이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국군에게 장비를 지급하는 것을 꺼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예로 공군이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L-4/L-5는 공군이 구매한 것이 아닌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기체였고, 육군의 경우 1,000문의 57mm 대전차포(영국제 6파운더의 라이센스 생산)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등을 미국에게서 제공 받아 보유하고 있었다.
 
57mm 대전차포의 성능이 당시 북한군이 운용한 T-34/85 전차나 SU-76 자주포를 계란을 깨는것 처럼 쉽게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쟁 초기 국군의 기록을 보면 춘천-횡성 지구의 전투에서 전차와 자주포를 격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웅진 지구에서도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육군은 자신들이 상대해야할 북한군의 병력, 특히 북한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어느정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대의 기갑전력을 대전차포 만으로 쉽게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대로 운용되었다면 실제 역사보다는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북한군이 운영한 전차는 T-34계열로 어글리 탱크라는 말처럼 성능이 좋은 전차는 아니였다. T-34계열의 전차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만들어졌고, 그 이후로 이루어진 전차의 발전을 고려하면 한철 지난 병기였다. 물론 이것이 국군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당시 국군이 보유한 장비를 고려하면 충분히 상대해볼 만 했다.
 
문제는 당시 국군이 자신이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 때문에 몇몇 전선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전선의 붕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 신규 추가 문단 제안안 =====
개전 시점에서 국군의 장비가 북한군에 대해 부실했었던 이유는 국군이 가장 빠르게 장비를 보강할 수 있는 패인 '미국의 지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면이 있다. 다만 이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공산국가 턱밑의 대한민국이 털리거나 말거나'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던건 아니고, 당시 미국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장비를 지원해주기에는 영 꺼려지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6.25 전쟁 개전 이전까지 이승만 대통령과 군 지휘부는 허구언날 북진 통일을 외치고 있었다. 당시에 나왔던 드립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로 미군이 충분한 량의 장비를 제공했다면 국군은 정말 진지하게 북진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의 감시가 느슨해진 사이 실제로도 북진통일을 시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였다.
 
다른 문제로는 국군내부의 사정이였는데, 지금이야 빨갱이의 빨자만 나와도 두들겨 맞는 파란나라 대한민국이지만 광복 직후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대한민국은 사회주의자들이 틈만 나면 민주주의 정부를 엎으려 들었고, 이는 국군 내부에서도 다를 것이 없었다. 여순사건, 강태무 소령과 표무원 소령의 월북(자기휘하 대대를 전부 이끌고 월북했다), 공군기 두대 월북 등 국군 내부도 시끌시끌했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윗선은 틈만나면 북진하려들고, 아랫선은 피아구분도 안돼서 무기주면 그거 들고 넘어가버리는 나라'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게 이상할 상황이였고 그 대가로 미국의 장비 지원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한국의 무기 지원요청에 대해 영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다고 해서 국군이 자력으로 장비를 수급할 수 있었던 형편도 아니였다. 공군이 10기의 T-6 택산 훈련기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이걸 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해야했고, 개전 초에 해군이 보유했던 4척의 배도 해군 내부에서 모금한 돈에 정부에서 제공한 돈을 합쳐서 간신히 사온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육군이 전차를 다수 보유하서 운영하네, 공군이 간지나게 비행기를 몰고 작전을 펼치네, 해군이 간지나는 함대를 몰고 우리의 바다를 지키네 하는건 택도 없는 소리였다. 그 결과 개전 시점에서 국군의 장비는 북한군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부실한 상태였다.
 
물론 육군이 미군으로부터 전달받아 보유중이였던 1,000문의 57mm 대전차포에 대해서는 전후의 연구를 통해 '제대로 운영되었으면 북한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국군의 장비가 북한군의 그것에 꿇리지 않았다'라는 서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국군의 장비가 북한군대비 꿇렸지만, 국군이 보유한 장비로 북한군의 초기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있었다'라고 보는 것이 옳은 서술이 될것이다.

2015년 7월 14일 (화) 17:03 판

오타유발자, 게으름뱅이, 지나가던 잉여.

주식은 컴퓨터, 밀리터리(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밀리터리), 게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