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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인 틱스틀라는 신 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 중 가장 인구가 많았는데, 특히 남부 지역 답게 원주민들의 비중이 제일 높아서 게레로 본인은 에스파냐어보단 원주민 언어에 더 능통했다. 그리고 무역량 또한 멕시코에서 제일 높아서 노새 운반업자인 아버지는 틱스틀라의 활발한 무역량에 편승하여 지주, 집주인, 농부, 상인, 민병대, 총기 및 대포 제조원 등의 다양한 계층들과 광범위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게레로 또한 일찍이 아버지와 삼촌의 일을 도왔다. 부모 또한 게레로의 교육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다. 그에게 일과 정직함으로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음을 가르쳤고, 사립 교사를 둬서 잠재적인 재능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의 고향인 틱스틀라는 신 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 중 가장 인구가 많았는데, 특히 남부 지역 답게 원주민들의 비중이 제일 높아서 게레로 본인은 에스파냐어보단 원주민 언어에 더 능통했다. 그리고 무역량 또한 멕시코에서 제일 높아서 노새 운반업자인 아버지는 틱스틀라의 활발한 무역량에 편승하여 지주, 집주인, 농부, 상인, 민병대, 총기 및 대포 제조원 등의 다양한 계층들과 광범위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게레로 또한 일찍이 아버지와 삼촌의 일을 도왔다. 부모 또한 게레로의 교육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다. 그에게 일과 정직함으로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음을 가르쳤고, 사립 교사를 둬서 잠재적인 재능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의 아버지 후안 페드로 게레로는 친에스파냐 인사였으며 멕시코의 식민지배를 지지했다. 하지만 게레로 본인은 아버지와는 달리, 삼촌인 디에고 게레로처럼 대쪽같은 반에스파냐파였으며 독립을 간절히 원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에스파냐 총독에게 충성 맹세를 하려고 자신의 칼을 가지러 갈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아버지 후안 페드로 게레로는 친에스파냐 인사였으며 멕시코의 식민지배를 지지했다. 하지만 게레로 본인은 아버지와는 달리, 삼촌인 디에고 게레로처럼 대쪽같은 반에스파냐파였으며 독립을 간절히 원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에스파냐 총독에게 충성 맹세를 하려고 자신의 칼을 바치러 갈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용문|아버지의 뜻은 저에겐 신성하나, 아버지의 조국이 제겐 먼저입니다.}}
{{인용문|아버지의 뜻은 저에겐 신성하나, 아버지의 조국이 제겐 먼저입니다.}}

2017년 6월 22일 (목) 14:23 판

세계 최초의 황흑백 혼혈 대통령

멕시코 독립의 대영웅

비센테 게레로.png

비센테 라몬 게레로 살다냐 (Vicente Ramón Guerrero Saldaña, 1782년 8월 9일 ~ 1831년 2월 14일)는 멕시코의 전 독립운동가, 전 정치인, 전 군인이다. 멕시코의 위대한 독립 영웅이자 국부 중 하나로 메스티소와 흑인, 필리핀 혈통이 섞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1810년 12월에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이끄는 남부 멕시코 독립군에 입대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각종 게릴라 전술로 신 에스파냐 부왕령의 군대에 저항한 끝에 아카템판의 포옹 사건으로 남부 진압군 사령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와 협상하여 이괄라 계획을 선언하고 독립을 이뤄 멕시코 합중국의 건국에 일조했다. 독립 이후에는 멕시코 내전을 진압하고 1829년 4월 1일에 제2대 멕시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생애

틱스틀라의 교구에서, 1782년 8월 10일, 나 D. 프란시스코 카바예로 학사는 돈 후안 페드로 게레로와 도나 마리아 과달루페 살다냐의 아들 비센테 라몬에게 기름 부음으로서 엄숙히 세례를 내리노라.

1782년 8월 9일 신 에스파냐 부왕령 식민지 시기의 멕시코의 틱스틀라 시 (오늘날의 게레로 주 틱스틀라 시)의 빈농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 과달루페 살다냐는 흑인이었고 아버지인 후안 페드로 게레로는 멕시코 현지 메스티소와 필리핀인의 핏줄이 섞여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혈통을 물려받은 덕에 외모가 매우 특이하고 강렬해서 남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특히 갈색 피부와 흑인인 어머니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검둥이라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의 고향인 틱스틀라는 신 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 중 가장 인구가 많았는데, 특히 남부 지역 답게 원주민들의 비중이 제일 높아서 게레로 본인은 에스파냐어보단 원주민 언어에 더 능통했다. 그리고 무역량 또한 멕시코에서 제일 높아서 노새 운반업자인 아버지는 틱스틀라의 활발한 무역량에 편승하여 지주, 집주인, 농부, 상인, 민병대, 총기 및 대포 제조원 등의 다양한 계층들과 광범위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게레로 또한 일찍이 아버지와 삼촌의 일을 도왔다. 부모 또한 게레로의 교육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다. 그에게 일과 정직함으로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음을 가르쳤고, 사립 교사를 둬서 잠재적인 재능을 넓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의 아버지 후안 페드로 게레로는 친에스파냐 인사였으며 멕시코의 식민지배를 지지했다. 하지만 게레로 본인은 아버지와는 달리, 삼촌인 디에고 게레로처럼 대쪽같은 반에스파냐파였으며 독립을 간절히 원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에스파냐 총독에게 충성 맹세를 하려고 자신의 칼을 바치러 갈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뜻은 저에겐 신성하나, 아버지의 조국이 제겐 먼저입니다.

멕시코 독립 전쟁

아카템판의 포옹

멕시코 합중국 수립

대통령 취임

사망

기타

멕시코의 주 중 하나이자 고향인 게레로 주는 게레로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